이드 2부 – 224화
661화
“음, 이게 무슨 난리야?”
바이트 타블렛이 놓인 연구실에 들어선 이드는 순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빈 테이블에 링스피어를 올려두고 살피는 라미아와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케마란. 그리고 그와 좀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마주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 중인 일리나와 네리베르. 양측의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잠시 그들을 살피던 이드가 라미아와 케마란에게 향했다.
케마란의 옷에 남은 핏자국과 베인 흔적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케마란이 다친 것 같은데. 상처는 괜찮아?”
“아, 마스터. 오셨어요.”
이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케마란이 테이블에 올려두고 있던 턱을 떼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날 필요는 없어. 그보다 상처는? 그리고 상처를 입었으면 어디 누워 있든가 앉아 있어야지. 왜 테이블 옆에 붙어 있어?”
“링스피어에 문제가 있어서………… 아, 그리고 상처는 라미아 님께서 포션과 마법으로 치료해 주셔서 지금은 괜찮아요.”
“라미아 님? 너 라미아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
“아하하하.”
라미아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 이드의 말에 케마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라미아가 고개를 드는 순간 뚝 멈추고 말았다.
[잘 짚으셨어요. 이 녀석이 아주 큰 사고를 쳤죠. 덕분에 저희에게 평생 무료로 부려먹을 수 있는 좋은 하인이 생겼어요. 이름은 케마란이라고 하죠.]
“어어, 갑자기 무슨 하인이에요!”
갑작스런 하인 취급에 케마란이 질색을 했다.
[변상한다며?]
“그 ·건 몰라서 그랬지. 무엇보다 네가 말조심하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 줬잖아!”
흥분한 케마란의 말투가 평소처럼 반말로 돌아갔다.
[그건 네 생각이고, 본래 쏟은 물과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난 그냥 넘어가 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
케마란이 말을 잊었다. 그녀의 얼굴은 믿던 친구에게 사기당한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이드는 라미아의 눈가에 이글거리는 장난기를 보고 이제 그만 멈춰야 할 때라는 생각에 말했다.
“자자, 장난은 그 정도로 하고. 케마란은 왜 다친 거야?”
“우우, 역시 마스터밖에 없어요!”
상황을 장난으로 마무리해 버리는 말에 케마란이 이드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그 모습에 라미아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생각을 정리하고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과연 적당히 말만 잘하면 인생을 저당 잡을 수 있는 사고를 치기는 했구나.’
이드는 라미아의 말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라미아의 장난에 가담해서 케마란을 하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수술대 위의 환자처럼 놓여 있는 링스피어를 잡은 이드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이 안에 코어가 있다는 말이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그런데 워스는 갔어요? 분명 이야기가 길어질 분위기였는데.]
“너하고 일리나가 급하게 자리를 뜨는 걸 보고 바쁠 것 같다면서 빠져 주더라.”
[의외네요. 좀 물고 늘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한데, 일전에 찾아왔을 때도 호감을 보였던 사람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싶어.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게…………… 나 그 사람하고 이야기 중에 초인력을 느꼈다?”
[엥? 그 철벽의 검왕한테 초인력이요? 그 거짓말 진짜예요?]
라미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녀뿐 아니라 옆에서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케마란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거짓말!’이라며 소리칠 것 같은 얼굴이다. 그나마 이드가 말했기 때문에 참는다는 표정이다. 이드가 아니었다면 당장 멱살을 붙잡고 정신 차리라고 짤짤 흔들었을 것 같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천하의 소드 팰러스를 지배하고 있는 삼검왕 중 철벽의 검왕이자, 초인을 가장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초인력을 가지고 있다니!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에 틀림없다. 저택 문 앞에서 있었던 짧은 대화만 아니었다면 이드도 착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너희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진짜라고!”
“진짜 거짓말이라고요?”
“대형 사고를 쳐 놓고 농담이 나오냐?”
따닥!
불쑥 끼어든 케마란의 말에 이드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튕겼다.
“악! 미치도록 아파!”
케마란은 대뇌를 거쳐 뇌하수체까지 파고드는 통증에 미친 듯이 이마를 문질렀다. 사고를 치고도 자중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다.
“자업자득이죠. 자중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네리베르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찼다.
이드는 그들을 향해 워스와 이야기하던 당시 알아낸 것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특히 뭔가 미묘했던 초인력에 대해서 신경을 썼다.
“초인들을 상대하면서 느낀 초인력과 달리 정순하지 못한 느낌이었어. 뭔가 섞인 것 같달까? 분명 초인력 같기는 한데 하나가 아닌 느낌이었어.”
두루뭉술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에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드의 기억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라미아는 갸웃거리는 그들과 달리 답을 냈다.
[그 말대로라면 어쩌면 존 워스는 다중 능력자일지도 몰라요.]
처음 듣지만 다른 설명이 없어도 단번에 이해되는 단어에 이드가 호기심을 보였다.
“다중 능력자? 그런 것도 있어?”
[비올라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네요.]
라미아는 비올라와 함께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조사를 하며 그에게서 초인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과연 초인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던 생명의 관에 소속되어 있던 마법사답게 초인에 대해서는 해박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초인학의 권위자랄까? 뭐,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지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중 능력자는 말 그대로 두 개 이상의 초인기를 가진 초인을 가리키는데, 굉장히 희귀한 자들이다.
이들은 발견되는 즉시 해당 국가나 초인에 의해서 보호되어 특별 관리되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각성한 초인기의 유용성이 떨어질지라도 보유 초인력만은 대륙 모든 초인들 상위 10%에 든다는 것이다. 아무 수련도 하지 않은 각성 초기의 초인력이 말이다!
실로 굉장한 힘이다. 각 세력이 눈에 불을 켜고 보호할 만했다. 금이야 옥이야 귀중하게 감싸고도는 덕분에 실제 다중 능력자를 보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란다.
생명의 관에서는 이들의 연구를 원했지만, 스폰서 중 그 어디도 다중 능력자는 지원해 주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다중 능력자는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이드의 손에 무너졌다.
많아야 전체 초인의 대략 1% 정도가 다중 능력자일 거라고 생명의 관은 추측하고 있었다고 한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다.
“어이없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벽의 검왕이야. 거기다 그냥 초인도 아니고, 다중 능력자라고? 세상이 알면 뒤집어지겠는데?”
[뭘 멀리서 찾아요. 여기 벌써 뒤집어진 사람이 있는데.]
라미아의 말대로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일리나가 두 사람 앞에서 손을 흔들지만 반응이 없다. 완전히 정신 줄을 놓은 것 같다. 워스가 초인 중에서도 귀한 다중 능력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충격인가 보다.
“그럼 워스도 초인기를 몇 개 더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이네.”
[아마 두 개일 거예요. 다중 능력자의 대부분이 두 개의 초인기를 가졌거든요. 그 이상의 초인기를 각성한 다중 능력자는 떠도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래요. 그것도 다섯 개 이상은 괴담 수준이고요. 그 이상은…… 말 안 해도 알죠?]
아마도 그 이상의 초인기를 가진 다중 능력자는 아이들의 전쟁놀이나 어른들의 술안주 대용일 테지.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이네.”
[비올라 말로는 다중 능력자의 한계에 대해서 확인된 바가 없기 때문에 초인기 각성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법사의 이론일 뿐이니까요.]
“뭐, 가능성으로 보자면 워스나 다중 능력자나 마찬가지잖아. 둘 다 확실하게 확인된 게 아니니까. 그저 우리 짐작이지.”
[하지만 워스에 대해서는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정말 다중 능력자라면 삼검왕과 초인파의 연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보기엔 초인에 대한 거부 반응이 심하던걸?”
“위장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리베르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있어요. 일단 워스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렇지 않아도 록에게 정보를 좀 모아 보게 하려고.”
저녁에 수업이 끝나면 록을 시켜 여러 곳에 의뢰를 넣어 볼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이전 워스에 대해서 조사해 알아낸 정보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소드 팰러스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너무 제한적인 것이 문제였다.
“저기, 중요한 이야기는 끝난 것 같은데. 제 링스피어 문제부터 마저 해결해 주시면 안 될까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케마란의 말에 네리베르가 째려보며 옆구리를 찔렀다.
“지금 링스피어가 문제예요!”
“나에겐 이보다 큰 문제가 없어. 거기다 코어라는 것도 끼어 있는 일이잖아.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을 가지고 짐작만 하는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지. 지금은 링스피어를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봐!”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눈치 없는 타이밍이기는 했다.
‘하지만 저렇게 당당히 말할 줄 알아야 어디서도 손해를 안 보지.’
이드는 케마란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케마란의 말도 틀린 게 아니지. 확실히 코어를 그냥 버릴 수도 없는 일이니까.”
“역시, 마스터는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이드가 자신의 편을 들자 케마란이 기가 산 듯 얼굴이 활짝 폈다.
라미아가 어쩔 수 없다는 혀를 차고는 다시 링스피어를 마법진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 대기 시작했다. 환하게 빛나는 마법진 위에 있으니, 불판 위에 올린 오징어 다리처럼 보였다. 케마란은 그런 테이블에 턱을 올리고는 절절한 표정으로 링스피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딱 이드가 방에 들어와서 보았던 그 장면이었다.
“완전 수술대에 오른 자식을 보는 눈이네. 저렇게 좋을까.”
이드도 자신의 무기를 아끼기는 하지만 케마란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링스피어를 만들 때부터 그 후 관리까지 케마란이 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네리베르가 케마란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케마란이 링스피어를 세상에 내어놓았으니 둘의 관계는 정말 부모와 자식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잘 아네?”
“굳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케마란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링스피어를 잃으면 그녀는 아마 굉장히 슬퍼할 거예요.”
이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작은 걱정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무조건 다투더니 그사이 미운 정이 들었나 싶다.
“걱정 마. 라미아가 확실히 고쳐 줄 테니까.”
이드는 두 사람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일리나에게서 네리베르와 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드는 네리베르가 한 걸음 크게 성장할 거라는 일리나의 말에 동감할 수 있었다. 그때쯤 링스피어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링스피어 환자의 가족과 친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자, 동시에 불안한 순간이 다가왔다. 라미아는 환자의 차트를 확인한 의사처럼 무뚝뚝하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미안. 링스피어만 살리기는………….”
“오, 세상에 그럴 수가!”
미안이라는 말로 입을 열었기 때문일까. 케마란은 라미아의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콸콸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