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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27화


664화

지하실에는 준비를 마친 라미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은 잘하고 왔어요?]

“아니, 며칠을 밤새우면 끝낼 수 있을지 계산하고 왔어.”

“이드가 없을 때 쓸 과제인가요?”

이미 앞서 이드의 고민을 들었던 일리나가 말했다.

“맞아요. 네리베르가 과제를 주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요. 그래서 수련장도 열어 둘 생각이에요. 록이 남아서 수련장과 저택을 관리하겠지만 혹시

수련생들이 지하실에 들어가려고 할지 모르니까 라미아가 미리 철저히 막아 둬.”

[그래야죠. 그렇지 않아도 케마란이 사고 친 게 있어서 오늘부터 이드와 일리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출입은 모두 통제할 거예요.]

“나는 빼고 말이지………….”

[네, 일리나와 같이요. 왜요?]

이드는 라미아의 물음에 모호한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아니, 나도 연구실에 있는 물품들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서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장담은 못 할 것 같거든.”

이드에게도 풍부한 마법 지식은 있지만 이는 죽은 지식으로, 펼쳐 보지 않은 책이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물건을 앞에 두면 사고 확률은 자연 높을 수밖에 없다.

뜬금없는 사고 예고에 라미아가 눈썹을 찡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면 이드도 전과가 있었죠. 어쩔 수 없네요. 일리나를 제외하고 출입 불가로 바꿔야죠.]

“일리나는 괜찮고?”

[사고 치겠다고 예고하는 사람보다는 백배 나아요. 저번 같은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완전히 막을 수는 없죠.]

이드는 바이트 타블렛에 잡혀 고생하던 라미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 맞다. 그럼 나도…………….”

[필요 없어요. 일리나만 있어도 충분해요.]

딱 자른 라미아의 거절에 이드는 어쩐지 서운했다. 나름 걱정해서 꺼낸 말인데 말이다. 하지만 먼저 뱉어 놓은 말이 있으니 대놓고 내색할 수도 없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이드는 바닥에 깔려 있는 마법진을 살피고는 말했다.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거야?”

[네. 마법진도 두 번이나 확인했어요.]

자신의 일에 절대 실수는 없다는 듯 라미아가 두 날개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케마란도 준비됐고?”

[케마란은 좀………… 불안하긴 하지만 잘할 거라고 믿어요.]

힘 빠진 라미아의 목소리에 이드는 불안해졌다. 마법의 성공은 물론 케마란의 안전 면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이드가 아는 사람 중 라미아보다 믿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라면 마법의 성공은 몰라도 케마란의 안전만큼은 철저히 지켜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혼의 반쪽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그런데 케마란은 어딨어? 준비도 끝났는데.”

[소울 다이브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단단한 정신이라고 했더니, 옆방에서 정신 통일을 하고 있겠다고 했어요.]

“오호!”

이드가 감탄했다. 생각보다는 행동을 선호하는 케마란이 정신 통일이라니 기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엔 어떤지 모르지만 지금은…………… 자고 있는 것 같아요. 이드가 내려오기 전에 잠깐 코 고는 소리가……….”

고자질 같아 살짝 망설인 일리나의 말 때문이었다. 이드의 감탄은 그대로 웃음소리로 변했다.

화악!

네리베르의 얼굴이 또 붉어졌다. 정신 통일을 하러 가서 졸다니! 어린 수련생도 하지 않는 일이다. 왜 계속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어야 하는가!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

이를 악문 네리베르가 후다닥 방을 나섰다.

쫘아악!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듣는 순간 절로 몸이 떨리는 끔찍한 등짝 갈기는 소리와 함께 오크 멱따는 듯한 케마란의 비명이 들려왔다. 잘 자던 케마란을 단번에 깨우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뒤이어 듣기만 해도 자괴감이 드는 인정사정없는 잔소리와 등가죽을 찢어 버릴 것 같은 찰진 소리가 몇 번 더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케마란을 앞세운 네리베르가 돌아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상한 형태로 어깨를 움츠린 케마란이 고개를 숙였다. 옷이 최대한 등에 닿지 않게 하려는 모양새다. 그것이 하얀 등에 찍혀 있을 붉은 손자국들 때문일 게 분명하지만 이드는 모르는 척해 주었다.

“아니야. 준비하느라 그런 거잖아. 죄송할 것 전혀 없어. 그보다 옷 갈아입었구나. 잘했다.”

“일리나 님이 빌려주셨어요. 찢어지고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으면 집중하기 힘들다고요.”

“어쩐지 옷이 아래위로 다 크다 싶더라니.”

“어흑!”

무심한 이드의 말에 케마란이 진한 기침을 토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리나의 옷을 입는 순간부터 신경 쓰였던 아픈 진실을 지적당했기 때문이었다. 정신 통일로 마음을 진정시킨 노력이 허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자신이 했던 말의 속뜻을 눈치챈 이드가 크게 헛기침하며 케마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나선 네리베르가 케마란의 등을 떠밀었다.

“쓸데없이 늦장 부리지 말고 어서 저리로 가세요. 당신 때문에 다들 기다리는 게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방금 마스터가 내 자존심을………….”

“원래 없던 자존심을 왜 찾아요!”

“…….”

갑자기 행해진 팩트 폭격에 케마란은 입만 쩍 벌리고 힘없이 밀려갔다.

바로 소울 다이브를 시작하려던 라미아는 마음의 상처에 흐느적거리는 케마란이 제정신을 차릴 때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준비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바로 시작해도 되겠지?]

“응………… 방금 그 준비가 모두 헛것이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준비됐어.”

[내가 몇 번을 말하고 다시 강조하는 거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네 정신이야. 바이트 타블렛의 코어는 강력한 사념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정신 에너지로 구성된 인공 정령체에 가까워. 온전히 독립된 ‘존재’로 보기는 어렵지만 특별한 존재지. 정신의 세계에서는 본인의 진실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가장 중요해. 나나 이드도 아니고, 네가 이 마법에 동원된 것도 그 때문이야. 내가 머리에 확실히 박아 두라고 했던 말도 기억하지?] 

“응. 내가 링스피어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했지.”

[그래. 마법이 시작되면 그 순간부터 계속 머릿속으로 외워. 그게 네 힘이 되어 줄 거야. 링스피어의 주인이 너라는 건 너도 알고, 코어도 알고 있으니까. 그 틈을 파고 들어야 해.]

“알았어. 하지만 아직도 그게 어떻게 힘이 된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가.”

[들어가 보면 알아.]

“그거 악질 용병 아저씨들이 애송이 용병 부려 먹을 때 쓰는 말이란 거 알아?”

케마란이 입술을 삐죽이자 라미아가 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겠니. 이게 사실인걸. 그럼 이쪽 마법진 안에 누워.]

“응.”

케마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라미아가 가리키는 마법진 위에 누웠다. 그러자 일리나가 베개로 머리를 받쳐 주며 케마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힘내.”

“넵. 잘하고 올게요.”

일리나가 물러나고 라미아가 케마란의 반대편 마법진에 링스피어를 내려 두었다.

[그럼 시작한다.]

라미아의 신호와 동시에 마법진이 기동했다. 두 개의 마법진에서는 각각 따뜻한 햇빛과 포근한 달빛이 빛났고, 두 마법진이 교차하는 부분에서는 부서진 별빛들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화려한 모습에 이드는 작게 감탄했다. 그때 마법진을 가동한 라미아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천일의 톱니바퀴가 돌아 해에서 달로, 달에서 별로 흩어지는 바람처럼 무한의 하늘 저편으로 사상의 바다에서 흩어진 너와 나를 이을 영혼의 물레를 저으리라. 소울 다이브!]

슈후우우-

마지막 시동어와 함께 물안개처럼 뿜어지던 별빛이 마법진을 감싸 안았다.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던 케마란도 죽은 듯 축 늘어지며 입을 헤 하고 벌렸다. 완전히 잠든 듯하다.

“된 거야?”

[네. 이제 우린 가만히 앉아서 케마란이 코어에 목줄을 잘 걸어서 끌고 나오기만 지켜보면 돼요.]

“볼 수 있는 거야?”

[당연하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인 마법인데요.]

라미아는 말과 동시에 아공간에서 긴 소파를 꺼내 놓았다. 지하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 소파는 한눈에 보기에도 푹신하고 편안해 보였다. 또 그 앞에는 탁자가 놓이고, 그 위로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팝콘과 콜라가 놓였다.

이드가 각자에게 팝콘 한통씩을 안겨 주고는 소파에 앉았다. 일리나는 익숙하게 그녀용으로 따로 준비한 주스를 마셨다. 네리베르는 조심스럽게 맛본 후 얌전한 손짓으로, 하지만 빠르게 팝콘과 콜라를 흡입했다.

그사이 물안개처럼 무리 지은 별빛이 커튼처럼 펼쳐지며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불쑥.

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던 회색의 공간에 케마란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그 반대편에서는 그 끝을 알 수 없이 거대한 성문이 함께 생겨났다. 

[성문이 단단해 보이죠? 코어가 바로 저 성안에 숨어 있어요.]

낯선 공간에 떨어진 케마란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가 성문을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가더니 멈추지 않고 성문을 발로 찼다.

영상을 통해 쿵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성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코어가 성문 뒤에 있다는 것을 느낀 듯 케마란이 성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저히 두드려서 열릴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이드가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저거 케마란이 열 수 있어?”

[당연하죠. 오히려 그녀가 아니면 열기 쉽지 않다고요. 제가 괜히 케마란을 저 안으로 들여보냈겠어요?] 바삭바삭.

“케마란이 링스피어의 주인이라서?”

입안 가득 팝콘을 씹고 있던 네리베르가 용케 팝콘을 흘리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케마란을 앞에 두고 라미아가 강조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본래 코어 같은 정신 에너지는 평범한 물건에 깃들지 못해. 하지만 링스피어는 평소 케마란이 애지중지하면서 그녀의 의념이 스몄고, 그게 코어가 숨어들 수 있는 터가 되어 준 거지. 지금 저기 보이는 성문처럼 말이야. 쉽게 표현하면 주인이 자리를 비운 성을 차지한 경우라고 보면 돼. 저렇게 숨어든 이상 아무리 이드라도 링스피어를 부수지 않고 코어를 꺼내긴 힘들걸요.]

이드는 뜬금없이 자신을 향한 화살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라미아가 마주 웃다가 꿀잠 든 포즈로 누워 있는 케마란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링스피어의 주인인 케마란은 달라. 원래 저 성의 주인인 만큼 성에 대한 권리는 물론 열쇠도 가지고 있거든. 코어가 그녀를 막고 싶겠지만, 성의 진짜 주인이 나타난 이상 막을 수 없지.]

그사이 영상 안 케마란은 성문을 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과 발에는 내공이 방출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케마란은 어이가 없는지 성문을 향해 거친 욕설을 뿜어냈다. 용병들에게서 배웠던 걸쭉한 욕설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듣고 있던 네리베르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케마란도 설마 자신의 모습을 밖에서 보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드와 일리나 앞에서 저런 거침없는 욕설을 뱉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 욕을 하던 그녀가 다시 성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던 이드가 말했다.

“저거 그냥은 안 부서질 것 같은데… 열쇠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가지고는 있어요. 자신에게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해서 못 쓰고 있는 거죠. 케마란이 링스피어의 주인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히 인식만 한다면 열쇠는 저절로 나타날 거예요.]

“허어, 네 말을 들었나 본데?”

라미아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드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상 안에서는 두드린 흔적도 나지 않는 성문에 방방 뜨며 악을 쓰던 케마란의 손에 뭉글거리던 별빛이 모여 링스피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드는 어쩐지 링스피어의 용도에 대해서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저거 열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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