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2화
699화
벤텀 백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제국에 설치된 일리나스의 공관을 책임진 자로, 일리나스 출신의 귀족들을 대표하고 관리하는 자였다. 가진 힘이 강한 만큼 자존심이 높은 그는 타국 귀족들의 조롱 섞인 수군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망신, 망신! 이런 개망신이 있나. 도대체 본국에 있는 놈들은 모조리 등신뿐이란 말인가.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저 무식한 마스 놈들에게까지 이런 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이야!”
사실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라지 않기는 했다. 타국의 일이었다면 벤텀 자신도 같이 어울려 열심히 씹어 주고, 조롱하고, 그러는 중에 자신이 취할 것이 없는지 살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일이 타국의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일이라는 점이었다.
당장 백작이 이드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것도 본국으로부터가 아니었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 서로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마스의 백작을 통해서였다. 제국이 시온 숲에 머물고 있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찾아 데려왔는데 그것도 몰랐냐며,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낄낄거릴 때 얼마나 분하던지. 잘도 그 자리에서 사고를 치지 않고 공관으로 돌아왔다 싶어 스스로를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분노와는 별개로 마스 측 백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 이드를 데려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손 놓았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건 뭐, 변명할 거리가 있어야 변명을 하지.
‘제길, 공관의 일만 아니라면 오지 않는 것인데.”
이를 악문 벤텀 백작이 슬쩍 몇 걸음 물러났다. 도저히 앞에서 조롱을 감당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덕분에 마침 대전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사무엘 백작이 아닌가.”
그중 어렵게 기억 속에서 사무엘을 찾아낸 벤텀 백작이 의혹 어린 표정이 되었다.
“저치가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지?”
그가 알고 있는 사무엘은 본국의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자로 제국 수도에 얼굴을 들이밀 인물이 아니었다.
때마침 사무엘 역시 벤텀 백작을 알아본 듯 곧장 그에게로 다가왔다. 사무엘과 이그렌을 안내하던 시종은 제 일을 마쳤다는 듯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벤텀 백작님.”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사무엘이었다. 같은 백작이었지만 벤텀 백작이 그보다 나이도, 권력도, 힘도 위였으니까. 같은 작위를 가졌다고 모두 같은 백작은 아닌 것이다.
“그러하네. 한데 사무엘 백작을 여기서 볼 줄은 몰라서 놀랍군. 이 자리엔 어떻게 참석한 것인가?”
비록 타국의 귀족에게 열린 자리이지만, 인연이 없는 자가 함부로 참석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벤텀 백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옛 인연이 다시 이어졌지요.”
이그렌을 슬쩍 돌아본 사무엘이 말했다.
“옛 인연? 백작 가문이 따로 제국과 인연을 맺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제국이 아니라 오늘 검증을 받는 주인공과 인연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이라면. …설마!”
그 말에 오늘의 행사가 어떤 것인지를 떠올린 벤텀 백작의 눈이 퉁방울만 하게 커졌다. 급히 주변을 돌아본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백작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인연이 닿은 것인가? 도대체 언제, 어떻게?”
벤텀 백작은 일리나스도 하지 못한 일을 정계에서 밀려난 백작이 해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과거를 떠올려 보시지요. 제국에 검후가 있다면, 본국에는 저희 가문과 시온 가문이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라면, 설마 그 가짜 무공을 말하는 것인가?”
의혹 가득한 벤텀 백작의 말에 조용히 움츠리고 있던 이그렌이 불쑥 튀어나왔다.
“가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인드 마스터가 초대 자작님을 위해 정성을 가득 쏟아 만드신 무공이었습니다.”
당당한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짜 무공이라 평가받던 그레이의 무공이, 사실은 검후의 무공보다 마인드 마스터가 더 신경을 써서 다듬은 무공이라지 않는가.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리나스의 온 땅을 돌아다니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상황 때문에 그럴 수 없었는데, 마침 옛이야기를 꺼내는 벤텀 백작의 등장에 이그렌은 그간 억눌렸던 분함을 풀 듯 고개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큰소리쳤다.
그런 과격한 자신감에 벤텀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에서 사무엘의 말과 이그렌의 말을 듣고 연상되는 사실이 있었다.
“자네가 시온 자작가의………….”
“현 시온 자작님이 제 아버님 되십니다.”
“그랬군. 과거 동료의 후손끼리의 만남인가. 허, 미치겠군. 도대체 이런 보물을 두고서도 왜 본국에서는…”
푸념을 늘어놓던 벤텀 백작은 사무엘과 이그렌이 그의 말에 눈을 반짝이자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초대 자작의 무공에 무슨 사연이 있었다는 건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도대체 언제부터 후예와 같이 있었던 건가? 어느 정도 관계야?”
참 알고 싶은 것도 많다. 의문을 마구 쏟아내는 벤텀 백작의 모습을 본 사무엘은 흐뭇하다 못해,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이거지. 내가 이 맛에 시온 자작을 잡아 두고 이드를 찾은 것이지.’
당장 나라를 대표해서 제국에 온 저 노련한 백작이 저렇게나 대놓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사무엘은 벤텀 백작을 따라 자신에게 모여드는 일리나스 귀족들의 시선을 즐기며 대략적인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럴수록 귀족들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 이그렌을 바라보며 사무엘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뒤늦게라도 이그렌과 친해지려 접근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대전 시종이 이그렌에게 다가왔다.
그는 어떻게 얼굴을 익혔는지, 이그렌의 신분을 확인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이그렌 경,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자리라니, 무슨 자리 말입니까?”
이그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레오날도 후작님의 명령으로 준비된 자리입니다.”
“아…….”
시종의 말에 이그렌과 사무엘의 눈이 마주쳤다. 후작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이드가 후작에게 따로 부탁했다는 사실을 짐작한 것이다.
“이그렌 경의 자리뿐인가?”
사무엘은 자신이 언급되지 않아 혹시 하고 시종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입맛을 다시다 이그렌의 등을 밀었다.
“그렇다는군. 어서 가 보시게. 후작님이 준비한 자리라는데, 비워 둘 수 없지.”
“으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그렌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비록 작위도 가지지 않은 그가 말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지만, 자국의 귀족들 앞에서 시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좀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작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힘든 일. 이그렌은 결국 시종의 뒤를 따랐다. 분명 아쉽기는 했지만, 일단 말을 해 놓은 것이 있으니, 사무엘이 잘 설명해 줄 것이다.
혹여 그가 엉뚱한 소리를 할 걱정은 없었다. 곁에 이드가 있는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헛소리를 했다가 그것이 이드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현재 사무엘은 이드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고 이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이그렌은 잘 알고 있었다. 이그렌이 시종을 따라 대전 앞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일리나스의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지,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지요?”
“나도 들었습니다. 레오날도 후작 각하가 준비한 자리라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입니까?”
“이그렌 경과 후예의 관계가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레오날도 후작 각하와 후예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은 자신들이 느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전의 앞자리는 벤텀 백작조차 서지 못하는 자리다. 아니, 자국의 귀족을 두고 왜 타국의 귀족을 그 자리에 세우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런 자리에 작위도 받지 못한 타국 자작의 아들이 서게 되었다. 그것도 제국 권력의 핵심 중 하나인 레오날도 후작에 의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귀족들의 시선이 벤텀 백작과 사무엘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곧 있을 검증에 대한 일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벤텀 백작이 사무엘 백작과 나란히 붙어서며 말했다.
“아직 듣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도 들려주겠나? 그리고 자네에 대한 일, 본국에 알리고 싶네만 괜찮겠는가?”
사실 이런 일에 본인의 허락은 상관이 없었다. 제국에 있는 일리나스 귀족에 대한 일을 보고하는 것이 벤텀 백작의 일이자 권리였으니까.
그런데도 그 의사를 사무엘에게 묻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무엘 개인의 공을 높이 본다는 뜻이었다.
바로 사무엘이 원하던 상황이었다. 비록 그의 손에 쥔 것이 이드의 무공이 아니라 이드와의 인연이 되었지만, 뭐, 어떤가. 모로 가도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되는 것을.
사무엘이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도 이드와의 가볍지 않은 인연을 일리나스를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사무엘이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핥았다. 바짝 말라 있던 입술이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다.
시종을 따라 앞자리로 향한 이그렌은 다행이게도 아는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벤 자작님.”
“오, 이그렌 경. 잘 쉬었나?”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배려해 주셔서 오긴 왔습니다만, 낯선 공간이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자작님이 계셔 마음이 놓입니다.”
“하하하, 그렇다고 마음을 놓지는 말게. 황궁에서 실수를 했다가는 그냥 끝나지 않으니까. 이곳은 전쟁터만큼이나 무서울 수도 있는 곳이네. 일단은 후작 각하께 가세.”
은근히 겁을 주는 벤 자작의 말에 헤프게 풀리던 이그렌의 얼굴이 다시 바짝 조여졌다. 벤 자작을 따라서 간 곳은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이 모인 곳으로, 각 귀족 뒤로는 그들에 속한 귀족들이 서 있었다.
벤자작은 이그렌을 데리고 후작 뒤에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시종의 고함이 대전을 울렸다.
“대아나크렌 제국의 온당한 지배자이시자 제국 신민을 지키는, 가장 고귀하고 현명하신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간 웅성대며 떠들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닫고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고귀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외치는 소리에 대전이 쩌렁 울리고 뒤이어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이그렌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일리나스 왕국의 왕성에도 가 보지 못한 자신이 제국의 대전에서 황제를 보게 될 줄이야.
이 순간만은 자신을 끌고 이드를 찾은 사무엘이 고맙게 느껴졌다.
나팔 소리가 멈추었을 때 이그렌은 더 참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황제를 훔쳐보았다.
거대한 붉은 망토를 두르고, 화려한 황금 관을 쓴 남자.
“저분이 제국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