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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75화


712화

대련은 수련하는 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이름난 대문파를 찾을 것 없이 작은 도장에서도 서로 간의 겨루기는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성장과 허점을 알기 위한 수련의 수단이다.

무언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서의 대련은 흔치 않다.

무엇보다 무림에서는 대련을 요청하는 상대도 철저히 가려야 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명성 높은 무인에게 대련을 청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무례로 비칠 수도 있다.

고수가 하수를 상대로 대련을 해 주는 것 자체가 가르침이며, 은혜다.

그러나 엘론드처럼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대련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도 ‘네 실력은 거품이야!’ 하고 달려드는 것은…… 정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나 할 짓이다. 그런 언행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정파의 명숙이라도 웃어넘기지 않는다. 그것은 한 명의 무인으로서 평생 쌓은 공부를 부정당하는 일이니까.

그나마 이런 명숙이라면 화를 내고 엄히 다스릴지언정 순순히 보내 주기는 할 테지만, 사파의 인물이나 평소 손속이 독하기로 소문난 이에게 걸렸다가는 평생 땅만 파먹고 살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단칼에 죽이지 않을 경우에 말이다.

그리고 그레센 대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라면 실력이 돈과 권력으로 이어지는 정도랄까? 무림에서도 실력이 뛰어나면 돈을 벌고 대접을 받지만, 그레센 대륙과는 비교가 안 된다.

좌우간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깝죽대다가는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엘론드는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날뛰는 것일까? 그만큼 이드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는 뜻일까? 초인이 꼼수로 이긴 것이 확실하다는?

이드는 잔잔한 호수처럼 갈무리된 자신의 내력과 기도를 살피며, 너무 잘 감춰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기서 분위기 잡고 있는 양반들처럼 나 고수요~ 하고 표라도 내고 있었으면 이런 꼴을 피했으려나?’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엘론드의 눈을 덮은 콩깍지는 그 정도로 없어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이 덩치를 어떻게 처리하지?’

전의에 불타는 엘론드를 보며 이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이건 무시하기도 받아 주기도 애매했다. 자신감인지 오만인지 모르겠지만, 엘론드는 자신이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믿는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엘론드가 저렇게 나설 수 있는 것도 무림과 달리 초인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수 있다고. 그가 원하는 것은 이드의 힘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초인이라는 사실의 증명이니까.

그의 대련은 결과가 아니라, 대련 중 초인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주목적일지도 몰랐다.

[뭐, 고민할 거 있어요? 원하는 대로 철저하게 이드의 실력을 몸에 박아 넣어서 현실을 확인시켜 주면 되지. 봐 봐요. 관객들도 간절히 원하고 있잖아요.]

‘관객은 무슨, 저 양반들 때문에 더 골치 아프구먼.’

이 많은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엘론드의 억지 따위 벌써 무시하거나, 기절시켜 깔끔하게 처리한 후에 떠났을 것이다.

이드는 어느새 구석에서 구경 중인 라울을 힐끗하고는 엘론드를 향해 말했다.

“겨루어 달라. 뭐, 지금에 와서 못할 말은 없겠지만, 설마 황제 폐하가 내려다보시는 이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겠다는 말은 아니라고 믿겠소.”

“다, 당연합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열기를 뿜던 엘론드의 어깨가 급격히 떨어졌다. 어떻게 봐도 당연히 알았던 얼굴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엘론드의 실망을 막아 주는 목소리가 파티장을 울렸다.

“나는 상관하지 않아도 좋다. 이런 사건도 파티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나의 기사의 실력을 보는 것도, 명예 후작의 실력을 직접 보는 것도 매우 기대되는구나.”

황제의 목소리였다. 제국의 주인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망설일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누가 나선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물러서며 파티 중앙에 무대가 만들어졌다.

“황제 폐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론드가 신이 나서 외쳤다. 과연 그의 대련이 유도된 것을 알고서도 저리 좋아할 수 있을까 싶지만.

황제의 허락에 이드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지만, 검은 피하고 맨손으로 대련하는 게 어떻겠소.”

“저는 좋습니다. 검만큼 주먹도 자신이 있지요.”

말과 함께 불끈 쥐어 내미는 주먹이 어린아이 머리통만 했다. 주먹을 쓴다고 자신할 만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짜게 식은 눈으로 보고는 말했다.

“내가 하려는 건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지만, 자신 있다니 기대하겠소.”

대련 방식이 정해지자 엘론드가 뒤로 물러났다. 장식처럼 걸치고 있던 파츠 아머를 벗어 두기 위해서였다.

맨몸의 이드를 상대로 자신만 보호구를 사용할 수는 없다나?

[진짜 천지 분간을 못 해도 정도가 있지. 고양이 쥐 생각이 만렙이네요.]

라미아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한편 파츠 아머를 풀고 있는 엘론드 옆에는 숙부인 엘코란과, 엘론드 가문과 친분이 깊은 두 명의 귀족이 붙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나마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이었다. 알고는 있는 거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소. 이보게, 엘론드 경.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분께 대련을 하자 한 건가? 도대체 정신이 있나? 이 일은 후에 백작가에도 영향이 미칠지 모르는 일이란 말일세.”

그들은 애가 탄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백작가와 강한 연결을 가진 그들의 입장에서, 이번 일로 백작가가 받을지 모를 피해가 자신들에게 닥칠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말씀처럼 황제 폐하께서 허락한 일입니다. 이번 일로 가문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황제 폐하의 성정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잘 안다. 귀족으로서 첫 번째로 살펴야 할 것이 황제이니까.

‘그래서 답답한 것이다, 이놈아. 황제께서 대련을 허락했지, 네 녀석 무례를 허락하신 건 아니시니………… 어이구.’

이제 곧 대련할 조카라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엘코란이었다. 그런데 이 조카 놈은 그런 것도 모르고 기세 좋게 몸을 푼다고 팔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 후작이 초인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밝히고 말 테니까.”

그 말에 인상을 쓰던 귀족 중 하나가 물었다.

“이보게…… 내 하나만 물음세. 도대체 자넨 후작이 초인이라는 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나? 그리고 후작이 초인이면 또 어때서? 그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말이야.”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초인이라니요.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초인이고, 그래서 검왕을 꺾은 것이라면 세상이 뒤집어질 겁니다. 무공과 기사가 초인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 절대 그런 꼴은 못 봅니다. 반대가 되면 몰라도, 기사가 보조라니요!”

마치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투사처럼 말하는 엘론드의 모습에 그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미친 소리를 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엘론드는 이런 어리석을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 이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과대망상에 빠진 환자 같았다.

“그리고 또 뭐라고 물으셨지요? 아, 어떻게 초인이라고 확신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저 젊은 나이에 오로지 실력으로 마르텔 님을 꺾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제가 기사단에 있으면서 제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천재 기사들을 만나 봤습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뛰어난 기사를 말하라면 주저 없이 게일 경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게일 경조차 아직은 삼검왕께 검을 견주기에는 많이 모자랍니다. 어쩌면 십 년, 아니 오 년 뒤라면 모르겠지만.”

“이보게, 지금 게일 경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

“예, 예. 좌우간 게일 경 같은 진짜 천재가 걸음마를 뗄 때부터 검을 손에 쥐었는데도 이 정도 실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게일 경보다 어린 후작이, 오로지 무공 실력만으로 삼검왕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믿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예요. 전 압니다. 굳은살도 박히지 않은 말랑말랑한 손에,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깨끗한 얼굴. 저건 게으르고 천박한 초인 놈들의 특징이라고요.”

고작 그런 것 따위로 초인으로 단정하느냐고 따지기 이전에, 그의 주장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무공을 수련하는데 어떻게 굳은살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저 환골탈태해서 손이 깨끗할 뿐이다.

무엇보다 초인은 그런 몇 가지 특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엘론드의 시야가 철저하게 막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엘코란이 말했다.

“그래, 차라리 네가 후작이 초인이라고 증명을 했으면 좋겠구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 최소한 멍청하다는 소리라도 피하기 위해 정말 초인이기라도 했으면 싶어 말했다. 하지만 그 속을 모르는 엘론드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 싶은지 믿음직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황색 갈기 기사단이 초인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 정도로 심하지는 않은데………… 엘론드 경이 다음 대의 백작이지요?”

“만약 그가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는다면 우리는 엘론드 백작가와의 연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심하겠소.”

엘코란은 이보다 확실한 엘론드에 대한 거부는 없을 것 같은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음 대 백작은 다른 아이가 될 것이오.”

아니,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저렇게 통제되지 않는 사고뭉치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가문이 먼저 망하고 말 것이다. 엘론드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며 이드는 재차 라울을 살폈다.

그는 사람들의 시야 밖 사각지대에 위치했었다.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의 시선 밖에 설 수 있는지 이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기다 사람의 인식을 저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알아. 기살(殺)이라는 수법이야. 살수들의 수법인데, 초인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

[초인기도 아니고 초인력을 내력 대신 사용해서 특정한 효과를 만들어 냈단 말이죠. 굉장하네요.]

‘내가 느꼈던 초인력의 크기를 보면 당연한 일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지?’

[네. 기살이라고 했나요? 그 방법으로 음파도 차단한 것 같아요.]

‘도청 가능해?’

이드가 라미아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귀신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장담해요, 히힛.]

‘그럼 귀신이 놀라 자빠질 정도로 깔끔하게 부탁해. 황궁에서 이렇게 내게 접근할 초인이라면 ‘그’ 납치범들일 것 같거든.’ 라미아에게 당부하던 이드는 순간 눈이 마주친 라울을 향해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어 보였다.

“뭐, 뭐야.”

갑작스런 미소에 라울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당황한 것이 우습게도 이드는 엘론드가 서 있는 무대 중앙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드의 발치로 은빛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지만,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련은 어떤 방식으로 하시겠습니까? 전 당장에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엘론드가 두 주먹을 쿵쿵 부딪치며 말했다. 신호만 떨어지면 말처럼 당장에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턱을 쓸며 말했다.

“적극적이라니 좋구려. 내가 경과 할 대련은 팔씨름이오.”

우뚝!

“파, 팔씨름 말입니까?”

당황한 엘론드의 주먹이 중간에 뚝 멈춰 섰다.

“그렇소. 팔씨름. 그러나 아마 경의 머릿속에 든 팔씨름과는 조금 다를 것이오.”

그 모습에 이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엘론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팔씨름이 팔씨름이지, 내가 모르는 팔씨름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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