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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79화


716화

“끝났군.”

부축을 받아 파티장을 나가는 엘론드를 지켜본 발터가 말했다.

“예. 황궁에서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발터를 보좌하며 황궁의 사정에 훤한 칸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라울이 칸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가 저 초인 혐오의 대표 주자 같은 인간을 왜 걱정해? 뭐, 받아먹은 거라도 있어?”

“받아먹다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얼토당토않은 혐의에 칸이 펄쩍 뛴다.

“그럼 뭐야? 우리 입장에선 저런 시대에 덜떨어진 등신들이 물리적, 사회적으로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좋은데, 왜 불쌍해 죽겠다는 얼굴이야?

배신자냐?”

꺼림칙한 단어를 쉽게도 내뱉는 라울의 모습에 칸이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말씀 마십시오. 그저 레오날도 후작 손에 이용당한 모습이 불쌍했을 뿐입니다.”

“정말?”

“물론입니다. 저도 황색 갈기 기사단의 기사는 질색입니다. 다만・・・・・・ 엘론드 경은 평소 기사도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 점이 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앙~ 역시 뭐가 있구나!”

굳이 숨일 이유가 없어 진심을 말하는 칸의 모습에, 라울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능글능글하게 엉겨 붙어 괴롭혔다.

칸으로서는 모시는 상사와 동격이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라울의 행동에 바짝바짝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 부하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발터가 지친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 부하는 그만 괴롭히고, 볼일 다 봤으면 돌아가. 나도 돌아갈 거니까.”

“왜? 벌써 가게?”

한창 칸의 목을 겨드랑이에 끼워 조르고 있던 라울이 하던 짓을 멈추고 물었다. 말끔한 신사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난이지만, 기살의 힘에 가려진 덕에 그의 흉한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발터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이드를 일별한 후 담백하게 말했다.

“후작의 얼굴은 봤으니까.”

거기에 레오날도 후작이 깔아 준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으니, 이익이라면 이익이다.

“으음, 그럼 나도 그만 돌아갈까? 어쨌든 서로 인사도 했고.”

“끄응! 그런데 라울 님은 정말 여기에 후작 얼굴을 보기 위해 오신 겁니까? 그런 일이라면 굳이 직접 오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라울의 힘이 빠진 사이 팔에서 빠져나온 칸이 한 걸음 떨어지며 물었다.

그러자 상사를 닮아 진지해져 가는 칸을 더 이상 괴롭힐 생각이 없다는 듯 라울이 두 손을 들었다.

“뭐, 겸사겸사랄까. 거기다 네가 쉽게 말하는데, 후작의 가치는 커. 내가 얼굴 보러 오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너도 쉽게 보지 마라. 그러다 실수하는 거야.”

“저 대련을 지켜봤는데 어떻게 쉽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와 별개로, 제국 아래 있는 후작을 위해 대륙 초인 단체를 경영하는 라울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 격에 맞는 것인가 하는 의심은 여전히

남았다.

“그럼 가지. 이제 슬슬 시작할 때니까.”

라울이 제법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파티장을 나섰다.

“뭐를…….”

그 뒤를 따르며 기계적으로 반문하던 발터는 곧 한 가지 계획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칸도 마찬가지인 듯,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순식간에 라울과의 거리를 좁히며 그를 따라 이동했다.

“렉터 일을 해결하는 것이 오늘이었나?”

“마침 제국이 주목하는 파티가 열렸으니까. 어지간한 문제는 덮어 버리기에 적당한 날이지.”

“과연. 그래서 오늘까지 기다리신 거군요.”

“전혀 영감들이 좋은 날이라고 받아 온 날짜야. 그 영감들 상대로 굳이 그렇게까지 배려할 의리는 없거든.”

라울은 영감들을 괴롭히지 못해 아쉽다며 툴툴댔다.

절묘한 타이밍이라며 감탄하던 칸은, 그의 이런 모습을 외면하고 반짝이는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저런 분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정말이지 사람 맥 빠지게 만드는 데는 뭐 있으시다니까.’

감탄하던 자신이 민망했다.

하지만 뒤에서 실망하건 말건 라울의 얼굴은 제법 신나 있었다.

“자, 빨리 가자고, 늦으면 좋은 구경거리 놓친다.”

“소드 팰러스는 들여다보지 못하는 곳이 아니었나?”

소드 팰러스는 물론 일정 기준 이상의 중요 시설에는 원견(遠見)과 클레어보이언스 마법, 불법 침입을 방지하는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데, 당연히 이것은 초인에게도 통했다. 즉 라울의 황금 눈동자도 들키지 않고 훔쳐볼 수는 없었다.

라울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중요 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만저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초인과 손을 잡은 삼검왕은 특히나 경계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라울은 지금까지 소드 팰러스를 마음 놓고 훔쳐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보자면 못 볼 것은 없지만,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까.

거기다 그가 보지 못할 뿐, 사람의 통행이 자유로운 소드 팰러스의 특성상 정보 대부분이 바로바로 손에 들어왔기에 더욱 필요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드 팰러스를 지금 들여다보겠다고 한다. 발터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렇지. 그런데 오늘은 특별하잖아. 영감들이 활짝 문을 열어 준 상태니까 말이야. 보라고 열어 놨는데 안 보면 섭섭하지. 이번 기회에 구석구석 들여다볼 생각이야.”

라울은 숨겨 둔 비밀 일기의 내용까지 까발려 주겠다는 듯 의지를 불태웠다.


[이드, 놈들이 자리를 떴어요.]

라미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끝없이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눈이 뱅글뱅글 돌던 이드의 눈이 그 소리에 차갑게 반짝였다.

‘셋다?’

[세 명 함께요. 라울이 이제 슬슬 시작할 때라고 말한 걸 보면,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확실히 자신이 듣기에도 시커먼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말이었다.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못 들었어?’

[그 말을 하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들을 수 없었어요.]

‘괜찮아. 잡아서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이드가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자리가 적당하지 않아 잡지 못했는데, 마침 먼저 움직여 준다니 차라리 감사하고 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드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중에는 이드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자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턱!

한 남자가 돌아서려는 이드의 어깨를 잡았다.

“언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같은 후작의 작위를 받고 나니 만나게 되는구려.”

이드가 돌아보니 거기에는 색이 바랜 갈색 머리와 구레나룻이 멋진, 단단하면서도 날씬한 체형의 남자가 있었다.

움직이려던 이드는 남자의 등장으로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귀족들의 모습에 쉽게 그의 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런 이드의 모습을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보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사를 하지 않았구려. 코엘시 록마틴이오.”

이드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 용기사의 주인, 록마틴 후작님이셨군요.’

과연 주변의 귀족들이 한발 물러선 이유가 있었다. 록마틴 후작은 황녀와 황제 외에 오늘 이드에게 손을 내민 귀족 중 가장 고위의 귀족이었다.

제국의 후작과 공작은 먼저 움직이면 모양이 빠질까 봐 서로 눈치만 볼 뿐 먼저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록마틴 후작이 먼저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그제야 다른 최고위 귀족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하게 라울들을 쫓으려는 이드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반응들이었다.

“바로 알아보는구려. 우리 부단장이 후작을 얼마나 칭송하던지.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는구려.”

“이런, 그때 부단장이 절 좋게 본 모양입니다.”

“어허허허, 부단장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오.”

제법 말이 통한다고 느꼈는지 후작이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반대로 이드는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젠장, 이거 자리를 뜰 수도 없고.’

이드는 록마틴 후작의 웃음에 장단을 맞추며 라울들의 기척을 살폈다. 기살로 온전히 기감을 죽이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파티장에서는 그 때문에 오히려 감지하기 쉬웠다.

파란 바다에 떨어진 검은 공처럼, 시끄러운 파티장의 소음에서 라울들이 움직이는 곳만 소리도 기척도 소거되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만 따라가면 되기에 더욱 쉬웠다.

아무래도 직접 움직이기 곤란하다고 판단한 이드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난 아무래도 못 움직일 것 같으니까 라미아가 대신 따라가 줘. 제압하지 말고 추적만 해.’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라미아가 이드의 어깨에서 사라졌다. 투명 마법으로 모습을 지워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이드의 어깨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사라져도 그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항상 주목을 받던 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없이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쩝.]

쉬리리릭.

입맛을 다신 라미아가 수직 이착륙 전투기처럼 그 자세 그대로 천장까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체조 선수처럼 320°로 회전하며 라울들이 나간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일었지만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많은 귀부인들이 부채를 살랑이고

있었으니까.

뒤에 홀로 남은 이드는 마음이 편했다. 라미아의 실력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만큼 단단히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편해지자 록마틴 후작과의 이야기도 편해졌다. 록마틴 후작은 생명의 관과 관련된 사건의 공을 프랑 기사단에게 몰아준 것을 상당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사실 미노스 부단장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오.”

록마틴 후작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 진정을 읽은 이드는 이 날렵한 인상의 후작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기야 스폴과 함께 달려온 당시의 프랑 기사단의 잘 정돈된 기도를 떠올려 보면, 그 주인인 록마틴 후작의 인품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아랫물이 맑으려면 윗물부터 맑아야 하는 법이니까.

좋은 사람은 좋게 대하는 것이 맞다. 이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록마틴 후작께서 부단장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셨으면, 스폴 경이 부단장을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허. 이거, 이거. 두 사람 사이의 일을 후작도 아시는 모양이요. 보기 좋지 않소? 내 두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기대하며 보고 있다오.”

과연 미노스 부단장이 스폴이 부를 때마다 달려가면서도 멀쩡히 부단장직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참, 그리고 탈탈 영지의 영주를 기억하시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땅에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빼앗기지 않으려 록마틴 후작가로 떠났던 자였다.

이드는 불쾌한 의심을 받게 된 록마틴 후작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그자를 이번 토벌대의 최선봉에 세울 생각이오. 제 영지에서 그런 무도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알지 못한 자이니 그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소?”

토벌대 사령관으로 내정된 록마틴 후작의 말에, 이드는 내심 탈탈 영주의 명복을 빌었다.

사령관이 굴리기로 작정을 했다면 얼마나 고생을 할지…………….

‘그래도 그때 잘 얻어먹고, 잘 쉬었는데. 부디 살아 돌아가시길. 물론,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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