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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88화


725화

“대 기사전 형태?”

말 그대로 해석하면 오로지 기사만을 전문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전투 진형이라는 뜻이다. 많은 전투에서 병사, 마법사, 그리고 같은 기사들이 적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의 일종이라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초인의 존재는 없었다. 초인들의 대 기사전 형태는 무엇일까? 스위트와 마주한 자의 초인기가 아니라도 복면인들이 초인임은 명명백백한 것. 일리나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적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기사들이 잘 대처한다면 좋겠지만, 위험한 순간이 오면 그녀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야 했으니까.

그리고 호기심 어린 일리나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보여졌다. 복면인 중 절반이 넘는 수가 물러서던 것을 멈추고, 돌격해 들어오는 기사들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것이다.

꽈르릉!

강력한 힘이 부딪히며 폭음과 기파가 휘몰아치자 화원의 꽃잎이 날리며 산산조각 났다.

검과 방패를 든 기사들에 반해 복면인들의 공격은 실로 다종, 다양했다. 무인처럼 무기를 든 자가 있는가 하면.

화르르륵!

흔하지만 효과는 가장 확실한 불을 뿜어내거나.

“가루가 되도록 빻아 주마!”

몸을 바위로 만들어 두드려 대는 등. 통일성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일사불란하게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기사들과 비교해서 너무 난잡한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초인기의 위력까지 난잡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지간한 군진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 기사단의 돌격을 멈춰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떠렁!

적의 공격을 막아 낸 기사, 더글라스가 밀려나며 바닥에 두 개의 선이 생겨났다. 힘에서 밀려 버린 것이다.

‘제기랄. 며칠 전에는 후배 기사에게 지고, 이번엔 초인 떨거지에게 밀려나다니. 이게 무슨 꼴이냐! 내가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면 가장 먼저 이드 후작의 수련법대로 실력부터 높인다. 이런 망신을 당하고는 못 참아!’

그는 내심 굳게 다짐하며 소리쳤다.

“방심하지 마! 이 새끼들 보통이 아니야!”

사실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은 더글라스만이 아니라 적을 상대한 모든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더글라스 경의 말대로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다. 전장을 살핀 일리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복면인들이 어지간한 기사만큼 강하긴 했지만, 그 어지간한 기사들이 선망하는 오색 기사단의 기사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복면인 측에서 가장 먼저 부상자와 사망자가 나왔다.

“변수는 저들이 무엇을 하느냐지.”

일리나는 기사들과 싸우지 않고 뒤로 물러난 복면인들을 살폈다. 그들은 어느새 다시 둘로 나뉘어 있었다.

기사들과 붙은 일 열과 좀 더 가까운 이 열과 좀 더 멀어진 곳에 자리 잡은 삼 열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기세가 날카로운 것이 그저 구경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싶었다.

일리나가 그들을 좀 더 유심히 살필 때였다.

삼 열의 초인들이 각자의 초인기를 사용하기 위해 초인력를 끌어 올렸다.

부우우우-

그리고 한창 전투에 정신없는 기사들을 향해 적당히 위력을 더한 초인기를 쏘아 냈다.

퉁!

후방에서 공격을 지원하는 그들의 모습에 일리나가 궁병을 떠올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궁병의 화살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았다. 

“위험!”

그러나 지금 당장 나서기도 늦었다 싶은 순간, 전장의 소음을 뚫고 고함을 지르는 데일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거리 초인기가 날아온다. 방패 들어!”

다행히도 뒤로 물러난 이 열과 삼 열의 초인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진 것은 일리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위트를 대신해 기사를 이끌던 그녀는 오히려 일리나보다 더 열심히 복면인들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삼 열의 공격도 재빨리 알아챘다. 평소 덤벙대는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놀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전장에서의 그녀의 진짜 모습이었다. 썸 타는 커플보다 빠른 눈치와, 독수리만큼 넓은 시야를 가진 뛰어난 기사. 그녀의 진가는 전장에 섰을 때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방패 들어!”

오늘도 그 빛이 많은 기사를 살렸다.

전열의 기사들이 방패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쩌저정!

끼기기긱!

하늘에서 떨어지고, 창처럼 찔러 오던 공격들이 방패에 막혔다. 딱 반의반 호흡만 늦었더라도 기사들 중 사 분의 일이 단숨에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 무사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커헉! 비겁한…….”

“당하는 놈이 병신이지. 전투에 비겁이 어디 있어!”

흑색 기사단의 어느 기사는 원거리 공격에 생긴 빈틈을 적 초인에게 찔렸고, 또 다른 청색 기사단의 기사는 방어는 했지만 충분히 힘을 주지 못해 땅바닥을 구르는 망신을 당했다. 물론 그것이 죽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은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단 한 번의 원거리 공격이 기사들에게 가져온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원거리 공격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원거리 공격뿐이 아니었다.

“스위치!”

뒤쪽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일 열의 초인들이 일제히 싸우던 기사를 버리고 다른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둘이면 상성이 나쁘기에 도망쳤다고 이해하겠지만, 단체로 상대를 바꾸는 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전장의 명예도 품위도 모르는 천박한 것들이 할 만한 짓이구나!”

경험 많은 기사는 그들이 노린 것이 새로운 초인기를 상대하는 기사의 허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흐흐흐, 왜 아니겠느냐! 크합! 그러니 품위 있는 너희들은 우리 따라 하지 말고 그냥 당하면 되는 거야! 스톰 니들!”

“이노옴!”

그러나 기사의 분노와 달리 적의 스위치는 의외로 큰 효과를 보이며 많은 기사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사실 상대를 바꾸는 것은 기사뿐 아니라 당사자인 초인에게도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서로 비슷한 검법을 상대하는 것과, 속성에서부터 공격 방법까지 모든 것이 다른 초인기를 상대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피해가 클지를 계산하면 답은 금방 나온다.

기습으로 속전속결을 노리는 초인의 입장에서는, 상대에게 더 큰 피해가 된다면 부담을 안고서라도 시도해 볼 만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거기에 그들은 부담을 덜어 줄 수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이 열과 삼 열의 초인들이었다.

그들이 상대를 바꾼 직후 흔들리는 초인들을 후방에서 지원하여 도왔던 것이다.

침묵하고 있던 이 열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오늘 습격 작전의 부대장이자 후방 지원으로 물러선 초인들의 지휘를 책임진 스키퍼의 공격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사신의 낫질을 시작하자.’

그들은 바람처럼 일 열의 초인들 사이로 스며들어 기사들을 기습했다. 일 열에 있는 초인들보다 위력에서는 떨어졌지만, 암살자와 같은 은밀한 공격에 많은 기사들이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다.

특히 그중 스키퍼의 활약이 굉장했다. 빠른 속도로 고공점프를 계속하며 양손으로 콩알만큼 작은 에너지탄을 뿌려 댔기 때문이다.

“캐니스터슛!”

너무 작아 알아차리기도, 막아 내기도 힘든 우박 같은 공격에 기사들은 속절없이 쓰러지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 가던 균형이 그의 공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급기야 기사들은 화원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스키퍼는 거기에 확인 도장을 찍듯 또다시 스위치 명령을 내렸다.

“조심해. 또 바뀐다!”

“으드득! 빌어먹을 초인놈들, 얕은꾀만 늘었어.”

“정신 똑바로 차려. 우린 오색 기사단의 기사라고!”

기사들은 연이어지는 위기에 악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상대의 작전에 말렸고, 기세에서도 밀려 버렸다.

“기사단이 뒤로 밀린다고?!”

적의 대장과 싸우던 스위트도 그런 사실을 알고 신음했다. 이번 임무의 지휘관으로서 전장의 상황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그러게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경고했잖나? 그만큼 죽음을 마주했으면, 사신이 눈앞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봤어야 해. 오늘 기사들이 죽는 것도 바로 스위트 경 당신 탓이야.”

도둑놈이 물건을 훔치러 들어와서 훔쳐 갈 것이 없다고 집주인에게 따지는 것만큼이나 기막히게 멍청한 헛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흐흐ᅳ”

허탈하게 웃는 스위트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졌다. 얼음을 다루는 상대의 초인기에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내가 보는 눈이 없었다. 설마 삼류 암살자 놈들의 실력이 이렇게 좋을 줄 미처 몰랐다. 내가 아는 사신은 너희처럼 멍청하게 생기지 않았거든.”

“이년이 미쳤나?”

꼬박꼬박 스위트 경이라고 부르던 적 대장은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던 스위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자 당황한 듯 막말을 하고 말았다. 그 반응에 스위트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봐. 바닥이 이렇게 얕은 놈의 실력이 이렇게 좋을 줄 어떻게 알겠느냐고. 정말이지, 이래서 근본 없는 초인들이 싫어!”

“미친년. 오냐,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스위트의 말에 제대로 심사가 뒤틀린 적 대장은 얼음이 덕지덕지 붙어 와이번의 발톱만큼 거대해진 손으로 냉기를 쏘아 냈다.

꾸드드드득

얼마나 냉기가 강한지 공기가 얼어붙으며 순식간에 뿌연 얼음안개가 생겨났다.

스위트는 자신에게 밀려오는 안개 속으로 검을 찔러 넣음과 동시에 단전에서 가속시킨 내공을 잘게 잘라 검극에서 터트려 연속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투투투퉁!

물에 생긴 파문처럼 여러 개의 동심원이 냉기를 휘감고 밀어냈다. 처음에는 당황하며 막아 내던 공격을 이제는 세련되게 봉쇄해 버리는 스위트의 실력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적 대장은 입술을 실룩이며 다른 손을 들었지만, 그가 손을 휘두르기 전에 스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역시 멍청해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군. 좋아, 그렇다면 내가 특별히 배려해서 듣고도 믿지 못하는 네놈들에게 사신을 만날 기회를 주지. 대신 네놈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바로 너에게 있다.”

스위트는 적 대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는 시야 한쪽에 한순간도 놓지 않고 있던 데일리와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데일리 경은 중심에서 방어 진형을 구축하라! 그리고 일리나 님.”

스위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정문 앞에 있던 일리나가 계속되는 기사들의 위기 상황에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네, 스위트 경.”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스위트는 일리나를 나서게 하고 싶지 않았다. 쉴라로부터 가능하다면 일리나를 전투에 노출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쉴라의 당부와 상관없이 어지간한 상황은 은색 기사단과 파견된 사색 기사단의 기사들로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만이나 자만이 아니라 오색 기사단과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에 기반한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결국 일리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말았다. 적의 뛰어난 실력보다는 자신의 모자람이 한심했다. 그리고 슬펐다. 어차피 일리나를 부를 것, 좀 더 빨리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기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에서였다.

“일리나라면, 과연, 저자가 후예의 여자인가!”

일리나를 향한 적 대장의 눈이 욕심과 호기심으로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스위트는 그 모습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사늘하게 말했다.

“아니. 네놈들은 감히 쳐다보기도 두려울 정도로 어여쁜 사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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