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89화
726화
스위트 덕분에 어여쁜 사신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버렸다.
알았다면 스위트와 먼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리나는 빠르게 전장으로 달렸다.
스위트의 요청이 아니었어도 마침 나서려던 참이었다.
변수가 될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열과 삼 열에 대기하던 자들이 전장에 뛰어들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쉽게 전황이 바뀔 줄은 몰랐다. 스위트가 놀란 것처럼 일리나도 한 호흡에 썰려 나가는 기사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버렸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결과보다 기사들의 최후가 싸우는 중 등을 찔려 죽는 거라는 사실이 슬펐는지도 몰랐다.
일리나는 달리면서 스위트를 살폈다.
적 대장과 대치한 그녀는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긴 했지만 괜찮아 보였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기사들의 전장이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이 열의 암살자들부터……………?
일리나는 전장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이 열의 초인들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지금 전장에서 가장 기사들에게 위협적인 것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전장에 뛰어들었을 때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우선 저들을 처리하고 원거리에서 기사들을 노리는 삼 열의 초인들을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스르릉.
적을 특정한 일리나의 검이 뽑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움직임이 활발한 자를 첫 목표로 잡았을 때였다.
퓨퓨퓨
갑자기 날아든 에너지탄이 그녀를 꿰뚫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곧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보다 몇 미터 앞선 곳에서 멀쩡히 달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절정에 이른 신법에 의한 이형환위였다.
엘프 하면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숲속의 최강자로 유명하다. 이들이 인간보다 뛰어난 것이 단순한 외모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엘프의 근육은 인간의 근육보다 질기고 튼튼한 데다 탄력 있고, 심지어 가볍기까지 하다. 종족으로서의 기본적인 능력치가 다르다는 말이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기사들이 숲속의 엘프는 두려워하는 데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엘프가 절정의 신법까지 익혔으니 이형환위의 지경에 이르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리나는 에너지탄을 쏘아 낸 스키퍼를 슬쩍 돌아보았지만, 곧 무시하고 그대로 쭉 달려 나갔다.
“칫! 과연 후작의 아내도 고수라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
그것도 그냥 고수가 아니라 잔상을 만들어 남길 정도로 굉장한 고수다. 별로 반갑지 않은 사실에 스키퍼가 혀를 찼다.
작전이 실행되기 전, 차후 이드 후작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 아내인 일리나에 대한 공격은 될 수 있으면 피하라는 명령을 받아 급소는 노리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자신의 공격을 저리 쉽게 피해 버릴 줄은 몰랐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만한 고수가 전장에 난입하면 자신들이 승기를 잡아 압도하고 있는 전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될 수 있으면 공격을 피하라고 했으니,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지.”
스키퍼는 명령보다 작전의 성공에 조금 더 무게를 싣기로 했다. 그는 허공을 걷는 듯 보이는 고공 점프로 일리나를 향해 날아가며 양손을 활짝 폈다.
“물어뜯어라! 배틀비!”
부우우우-
주문으로 이미지를 선명하게 만든 스키퍼의 손가락 끝에 날카로운 형태의 에너지탄이 나타났다. 맹렬히 회전하는 그것에서는 벌과 같은 소리가 났다.
“슛!”
양손을 흔들어 쏘아 낸 에너지탄은 회전력을 받아 먼저 쏘아진 것보다 더 빨랐다.
째릿,
짝쇼 같은 방향 전환이라고 해도, 기감을 한껏 열어 둔 일리나가 피하지 못할 공격은 아니었다. 다만 피했다고 생각한 공격이 이어짐에 약간 방심한 터라 앞서처럼 완벽히 회피하지 못하고 검으로 비껴 내야 했다.
끼리리리릭-
검을 통해 느껴지는 힘이 강한 건 아니었지만, 손바닥에 전해지는 진동이 굉장히 난폭하다고 느꼈다. 문제는 이 공격이 단순히 피한다고 끝나는 점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때마침 스키퍼가 친절하게 기능까지 설명해 주었다.
“배틀비는 먹이를 먹고 화를 잠재울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 말처럼 배틀비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로 허공에서 또다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아무래도 스키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좋아요. 잠시 우선순위를 바꾸도록 하죠.”
일리나는 마주 날아오는 배틀비를 피해 내며 스키퍼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러자 그가 연속 점프로 뒤로 물러섰다. 마치 허공답보를 닮은 움직임이었다.
일리나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 스키퍼에게 따라붙었다.
“노드, 나에게 하늘을 열어 줘요.”
소환된 정령은 일리나의 발을 단단히 받쳐 주었다. 숲속 바람길을 달리는 엘프 고유의 기술과 무공을 접목시킨 것이다. 다만 신법에 따른 발길이 워낙 복잡하고 빨라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최소 중급 정령의 도움이 필요했다.
엘프의 바람길을 알지 못하는 스키퍼로서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후작의 무공은 대단하고 다양하군. 하늘을 달리는 무공이 있다니!”
초인기로 얻은 연속 점프로 인해 도망에는 자신이 있었던 스키퍼는 뜨끔한 마음을 감탄으로 숨기고 연신 캐니스터슛을 날리며 발끝에 힘을 더했다. 그러나 지상에서도 맞추지 못한 일리나를 허공에서 맞추는 일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티잉!
“끄악, 내 귀!”
오히려 중간중간 일리나가 쳐 낸 에너지탄에 맞아 피해를 입는 초인들만 생겨났다.
“저런 얍삽한……”
스키퍼는 자신의 공격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일리나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리나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부하들을 위하느라 자신의 위험을 자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일리나가 스키퍼를 쫓고, 배틀비가 일리나를 쫓는 기묘한 술래잡기가 허공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그 기묘한 술래잡기가 일리나가 유도한 것이란 사실을 스키퍼는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방이 트인 허공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곳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고공 점프와 연속 점프로 허공을 누비지만, 가장 중요한 삼차원 공간 감각이 조금 떨어진다는 증거였다.
“술래잡기는 여기까지.”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목적한 곳에 도달한 일리나가 배틀비를 허공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시 돌아오는 배틀비를 향해 검을 들었다. 슈룩, 슈륙.
그리고 검 끝이 아닌 검을 든 손목에서 난화십이식 난화의 내공이 운용되었다. 결코 빠르지 않은 검의 움직임을 따라 검식을 따른 검의 잔상이 생겨났다. 난화십이식을 기검으로 뿌리지 않고 검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난화십이식의 무공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기예였지만, 마을의 엘프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랜 연구를 거친 일리나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조심하고 어려운 내공심법까지 개조해 낸 경험이 있는데, 식을 분해하는 것쯤이야.
하나둘 늘어난 검은 눈 깜짝할 사이 서른 자루가 되어 빽빽한 검림을 만들더니 돌연 둘로 갈라졌다.
쩌억!
휘몰아치는 검열(劍熱)을 품은 은백의 검영은 절반은 하늘로 솟아올라 배틀비를 쪼개 버렸고.
퍼퍼퍼펑!
나머지 절반은 어느새 일리나의 발밑에 서게 된 이 열 초인들의 정수리를 갈라 버리며 곤죽이 된 뇌와 피를 뿌렸다.
“……!”
검영에 당한 초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즉사했다. 그중 자신의 죽음을 아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고 죽었다. 기척을 죽이고 머리 위로 날아든 일리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 후…….”
동료의 죽음으로 일리나의 존재를 깨달은 초인들은, 그 압도적인 무력에 익숙한 한 존재를 떠올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도대체 언제!”
정신없이 달리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스키퍼가 기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멈춰 선 그를 향해 번개처럼 쏘아지는 화령화의 검강은 상황을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슈슉. 슈슉. 슈슉.
“크헉!”
스키퍼의 어깨가 갈라지며 ‘푸확’ 하고 피가 터져 나왔다. 본능과 같은 고공 점프가 그를 살린 것이다.
일리나는 공격이 실패한 것을 보고 검을 뒤집었다. 그러자 목표를 잃었던 화령화가 배틀비만큼 기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초인들에게 박혀 들었다. 실패한 공격을 재활용하는, 제법 알뜰한 방법이다.
일리나는 스키퍼가 다시 방해하기 전 자신이 처리해야 할 자들을 빠르게 파악하고 난화십이식을 펼쳐 냈다.
난화, 낙화. 비혼. 뇌정.
스키퍼가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 한 줌의 호흡 속에서 단숨에 네 개의 초식이 초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퍼퍼퍽!
꽈과과광!
“끄악!”
“이런 미친!”
“빌어먹을! 검후가 있는 소드 팰러스를 친 건 미친 짓이야!”
“뒤로! 뒤로! 뒤로!”
폭음과 피가 난무했다. 조금 전까지 기사들을 몰아붙이며 광소하던 초인들이 기겁해서 몸을 뺐다. 지옥의 불꽃놀이같이 강렬한 강기의 비에 애초에 대항할 생각조차 버린 모습이었다. 그중에는 일리나를 검후라고 여기는 자도 있었다.
반대로 기사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일리나의 고고하고 화려한 검기에 감격했다.
“검후님의 검법이다.”
“난화십이식이다.”
위기의 상황에 나타난 검후의 무공은 기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아아, 검후님.”
그중에는 감동해 눈물 흘리는 자도 있었지만, 그도 나쁘지 않았다. 울면서도 검 하나는 열심히 휘둘렀으니까.
그러나 모든 기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젠장, 강한 줄은 알았지만…… 저건 거의 검후와 동급으로 보일 정도잖아……..
그는 마치 중상을 입은 듯 쓰러진 채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번 일, 실패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를 찔러 버린 입장에서는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습이 성공하길 원했지만, 일리나라는 변수의 존재가 너무 강렬했다.
특히 그녀의 무공이 문제였다.
초인과의 화합을 고집하는 문제로 검후에 대한 충성을 접었지만, 막상 다시 눈앞에서 검후의 무공을 보게 되자 가슴이 울렁였다.
이드 후작과 그 아내라면 검후의 무공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기는 하지만, 저렇게 비슷할 줄이야!
자신조차 이런데, 아무런 사실도 모르는 다른 기사들은 어떻겠는가. 무공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대련에서 사색 기사단의 기사들을 상대로 실력을 증면한 바 있었다.
힘겨운 전장에서 고수는 그 존재 자체로 용기가 되고, 기둥이 된다. 꽈꽈꽈꽝!
기사가 궁리하는 사이에도 일리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 열의 초인들은 자신들이 집중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피하려 했지만, 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수의 공격이 무서운 게 아니겠는가.
그러한 발악 끝에 이 열의 초인들은 전부 죽었다. 그들 근처에 있던 일 열의 초인 열둘과 함께.
그나마도 기사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감안해서 방어가 단단한 자들을 준비했기 때문에 이 정도 인원만 당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힘이 약해 검강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좀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기사는 기울이고 있던 머리를 땅에 박고 갑옷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리나의 손에 쓰러진 어느 초인이 가지고 있는 단검과 꼭 같은 것이었다.
기사는 그 단검을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크흐흑, 멍청한 놈들. 저 여자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려 줬잖아. 그럼 좀 더 제대로 준비를 해 왔어야 할 것이 아니냐. 왜 내게 스스로 옆구리에 칼을 박게 만드느냔 말이다!’
밀려오는 통증에 욕설을 씹어뱉은 기사가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기사의 자해 사실을 화원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암살자들을 처리한 일리나는 정해 둔 우선순위에 따라 삼 열의 초인들에게 향했다.
그녀가 자신들을 향하는 모습에 그들의 얼굴이 거대 몬스터를 앞에 둔 마을 사람처럼 변했다. 공포에 질려 버린 것이다.
“오지 마!”
“우선 저 여자부터 노려!”
“죽어!”
이미 일리나의 활약을 목격한 초인들은 죽기 살기로 일리나를 향해 초인기를 날렸다.
그러나 그런 공격에 당할 것 같았으면 이 열의 초인들이 죽지도 않았을 거란 사실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다.
일리나는 귀신같은 신법과 검강으로 그 모든 공격을 무위로 만들었다.
빼곡한 화망을 귀신처럼 빠져나온 일리나가 삼 열의 초인들 속에 떨어져 내렸다.
사뿐.
사르륵거리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일리나의 모습에 초인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그들에게는 그 작은 소리가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소리보다 무섭게 들렸다.
그리고 공포는 현실이 되었다.
“백화난무.”
일리나가 빙글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