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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01화


738화

미스터 터너는 수도에서 다섯 손에 꼽히는 재단사다. 셋도 아니고, 다섯 중 하나라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안티로스에 얼마나 많은 재단사가 일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런 소리 못 한다. 수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의 옷을 만들자면 최소 세 자릿수는 필요하다.

물론 그것도 각자 집에서 옷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감안한 숫자다.

그중 다섯이라면 최고라고 자칭해도 누가 딱히 부정하기 힘든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의 손님 중에는 후작과 공작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 대귀족의 옷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덕분에 그의 가게는 항상 손님들로 붐볐다.

그러나 그런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손님일수록 요구하는 것이 많고, 취향이 까다로워 여간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만큼 대가가 크기 때문에 절대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미스터 터너에게 새롭게 탄생한 명예 후작의 의뢰는 아주 기쁜 일이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로 현재 안티로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의 의뢰가 아닌가.

어지간한 귀족들이 찾아가도 얼굴을 볼 수 없는 인물을 직접 본다는 사실에 미스터 터너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달려왔다.

“명예 후작께서 내가 만든 옷을 입으신다면 내 명성도 그만큼 오를 것이 아닌가.”

어쩌면 황제와 황녀가 입고 오는 옷보다 더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터너는 정말 명예 후작의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만들어 계속 그의 옷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간 취향 까다로운 귀부인들을 충족시켜 준 자신의 실력이라면 충분하리라!

그런 자신감으로 달려온 미스터 터너였지만 막상 황금 미녀상을 마주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명예 후작의 옷이 아니라 이 미녀상의 드레스를 만들라고?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미스터 터너는 조심스럽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제가 만들 것은 이 예술품에 어울리는 드레스입니까?”

“바로 그렇다.”

위엄을 세우라는 집사의 충언에 이드가 하대로 답하자, 그를 바라보는 미스터 터너의 눈에 불온한 잡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드는 절대 유쾌하지 못한 상상일 것이 분명한 미스터 터너의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조각상은 여기 있는 내 아내의 조각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지. 그래서 옷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 둔 것이 이 조각상이다.”

“아・・・・・・ 그러시군요.”

미스터 터너는 곧 수긍했다. 귀족들 중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내보이며 자랑하고 싶어 하는 부류도 있지만, 이번처럼 함부로 내보이려 하지 않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까.

“후작님의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운 후작 부인이십니다.”

미스터 터너는 다른 것은 무시하고 오직 조각상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며 말했다.

급하게 만든 골렘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라미아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드레스의 제작은 가능하겠죠?]

“물론 가능합니다. 오히려 치수를 재기에는 이쪽이 더 편하니까요.”

다만 이 비현실적인 라인이 실물과 똑같을 경우에 한해서이지만, 미스터 터너는 거기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럼 치수는 잠시 후에 확인하도록 하고, 디자인을 골라 보시겠습니까?”

미스터 터너가 말하자 그를 따라온 조수가 품에 안고 있던 카탈로그를 탁자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수십 벌의 드레스가 줄줄이 들어와 걸렸다.

미스터 터너는 그중 가장 화려한 옷 세 벌을 고르고 카탈로그에서 몇 장의 그림을 뽑아 라미아에게 내밀어 추천했다.

“제가 추천하는 것은 이런 디자인입니다. 원하신다면 모든 드레스를 직접 입어 보실 수도 있습니다.”

‘으…….’

순간 이드는 아찔한 현기증에 신음했다. 저 옷을 다 입으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이며, 옷 하나하나에 대해 물어 오는 감상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드는 그 순간 라미아가 골렘의 몸을 사용하고 있음에 감사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이드와 달리 라미아는 아쉬워하며 미스터 터너가 추천한 디자인 중 하나를 골랐다.

[이것으로 하겠어요. 하지만 이대로만 하지는 말고…. 일루젼!]

라미아가 미스터 터너의 앞에 손을 내밀자 그 위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호오! 아름다운 옷이군요.’

과연 재단사, 미스터 터너가 일루젼 코앞까지 눈을 들이밀었다.

[나는 저 드레스에 이 드레스의 하의를 합치길 원해요. 그리고 문양도 같이.]

“이 디자인을 옮겨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가능합니다.”

[그건 오래 걸리니 제가 해 드리죠.]

라미아는 바로 빈 종이에 일루젼 영상을 프린트해 주었다. 고화질 영상에 버금가는 깔끔한 그림에 미스터 터너가 탐난다는 듯 감탄했다.

“후작 부인께서도 대단한 마법사셨군요. 존경합니다. 이 그림이 있으니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의상을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새로운 디자인에 미스터 터너가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아직 라미아의 말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제 남편의 예복을 추천해 주겠어요?]

갑자기 등장한 황금 미녀상에 당황했지만, 애초 목적은 명예 후작의 예복이 아니었던가!

“물론입니다. 마음껏 골라 주십시오!”

미스터 터너의 말과 함께 드레스, 카탈로그와 함께 수십 벌의 신사복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느껴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골렘을 움직이는 그녀야 드레스를 입어 보기 어렵지만 자신은…….

“어・・・・・・ 그러고 보니 해결해야 할 일이…….”

꽈악!

상투적인 병명과 함께 일어나려던 이드는 허리춤을 틀어잡은 라미아의 손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모두 입어 볼 수 있죠?]

“명예 후작께서 입어 주신다면 그걸로 영광입니다.”

“크흑…….”

이드의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 후 이드는 하루라는 시간이 인생에서 삭제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나름. 익숙한 경험이다. 불행하게도!

저택에서 라미아의 오더를 온전히 받아들고 돌아온 미스터 터너는 그 사실을 주변 재단사들에게 전했다. 고위 귀족들끼리 서로 비슷한 옷을 입고 등장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정보 공유였다.

물론 그 속에 은근한 자기 과시와 자랑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정보는 소문이 되어 퍼졌다. 파티 전에 어느 가문의 레이디가 굉장한 드레스를 주문했다거나, 대단히 비싼 보석을 준비했다는 소문이 이렇게 퍼지는 것이다.

그리고 황녀도 그 소문을 접했다.

“명예 후작의 아내라고? 소드 팰러스에 남았다는 부인이 수도에 온 거야?”

많은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에 착용할 보석을 고르던 황녀가 물었다. 백작가 여식의 결혼식에까지 황녀가 참가할 일은 없지만, 그 자리에 명예 후작이 참석하기 때문에 황녀의 참가가 결정되었다.

“그분은 아닌 것 같아요, 황녀님. 이전에 소드 팰러스 사건이 있을 때 후작 부인께서 크게 활약하셨고, 그 뒤로도 계속 자리를 지키신다고 들었어요.”

황녀의 어린 시녀가 종알거렸다.

“그렇다면 아쉽구나.”

묘한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던 황녀의 눈에 아쉬움이 어렸다. 검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위기가 찾아온 소드 팰러스를 지켜 낸 일리나의 존재는 검후를 우상으로 두고 있는 황녀에게 굉장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후작 부인이라는 말에 그녀를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니.

비록 어린 몸종의 말이었지만, 황녀가 아끼는 그녀가 물어 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진실에 가까운 고급 정보이기 때문에 다른 의심은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명예 후작님께 또 다른 부인이 있으셨다니. 전 저번 파티처럼 당연히 이번에도 황녀님께 파트너 신청을 할 줄. 아얏!”

“무엄하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린 시녀의 거침없는 말에 중년의 시녀가 꿀밤을 때려 멈추었다. 황녀는 어린 시녀가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보며 괜찮다 손짓하고 말했다. 

“괜찮아, 말레나.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명예 후작의 부인이라니. 누굴까? 그녀에 대한 정보는 있니?”

황녀의 말에 머리를 살살 문지르던 어린 시녀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그게, 재단사에게서 나온 이야기 말고 전혀 없어요. 아예 후작 부인이 언제 저택에 도착했는지도 본 사람이 없대요.”

재단사가 후작 부인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또 다른 후작 부인 또한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때 단단한 표정으로 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중년의 시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전 명예 후작께서 소드 팰러스에 있을 때에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는 현 후작 부인 이외에 부인이 또 있다 말씀하신 것으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앗! 저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말레나 부인께서…….”

어린 시녀의 호들갑에 말레나는 조용히 꿀밤으로 답해 주었다.

“꺄울~”

한 방에 어린 시녀를 침묵시킨 말레나가 황녀의 기분을 살펴 물었다.

“결혼식 참석을 취소할까요?”

“아니, 가겠어.”

짧은 문답. 그 속에는 복잡한 사정이 섞여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말레나가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살짝 열었다. 문 앞에는 황녀 궁을 지키는 여기사가 늠름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기사님.”

“말레나 부인, 게일 인테그란 경이 만남을 요청하여 황녀 전하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게일 경이…… 혹시 무슨 용건인지 말하던가요?”

“예. 하리온 백작의 결혼식 참석 건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기사의 말에 멜레나가 황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따로 말을 전하지 않아도 황녀 역시 기사의 말을 들었을 것. 황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말레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말레나는 눈매가 날카로워지더니 기사를 향해 말했다.

“게일 경에게 황녀 전하께서 다른 일로 분주하여 만나지 못한다 전하고, 결혼식은 따로 참석하겠다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여기사는 한 호흡 늦은 대답을 하고 돌아섰다. 명예 후작의 등장에 게일이 흔들린다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당장 황녀궁을 찾아 그냥 돌아간 적이 거의 없는 게일이 만남을 거절당했을 뿐 아니라 결혼식 참석도 따로 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과연 이 말을 전하면 어떤 표정을 할까?’

기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황녀에게 버림받아 흔들린다면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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