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302화


739화

여기사의 은밀한 기대는 보기 좋게 불발되었다.

“그런가.”

황녀의 말을 전해 들은 게일이 쓰게 말하며 돌아섰기 때문이다. 서운하게 눈도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지만 딱히 섭섭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황녀가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마음이 어떨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그녀가 돌아선 게일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황녀궁에서 등을 돌린 게일의 얼굴은 박탈감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이 버무려진 귀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뿌드득, 예상은 했지만 기분이 더럽군. 그러나 밀리아리아 전하께서 직접 나와 보지도 않으실 줄이야. 그간의 쌓은 정이 있다 생각한 것은 나뿐이란 말인가!’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은 이미 예상했지만, 여기사를 통해 딱 잘라 거절을 전하는 황녀의 행동은 게일에게 제법 충격이었다. 승승장구하며 당연히 자신의 짝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황녀가 얼굴조차 비치지 않을 줄이야!

세상의 주목을 받고,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고,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그였기 때문에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세상의 주목에서 이드에게 한 수 밀린 것보다, 황녀와의 거리가 벌어진 것이 더 충격이었다.

게일은 자신이 내심 황녀와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공식적인 아내가 있는 명예 후작에게 황녀를 보낼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설마 했던 일이 진짜 일어나 버렸다.

아마 게일이 부녀자들 사이에 빠르게 번지고 있는 이드의 둘째 부인에 대한 소문까지 들었다면 어떠했을까? 어쩌면 묘한 배신감을 느끼기보다 황녀의 입장을 동정하지 않았을까.

부인이 둘이나 있는 명예 후작과 연결되고 있다니!

거기다 기사와 초인간의 대립을 이용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이드의 존재 의의를 흔들어 보려 했던 일도 엘론드가 성급하게 나서면서 너무 빠르게 풀려 버렸다.

그나마 이드의 등장으로 자신의 존재가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에 동료 기사들이 옹호해 주어 큰 소문이 나지 않은 것이지 지금도 초인들

사이에서는 그때의 소문을 자신이 일부러 만들었다며 조롱하기도 한다.

이제 공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쌓아 둔 명성을 해하기만 할 뿐이니 조심해야 했다. 섣불리 나서서 소드 팰러스의 후계자, 검후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흔들리게 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행동하는 것은 최대한 참아야 했다. 마음 같아서야 직접 이드와 대결해서 자신의 실력이라도 뽐내고 싶지만, 아무래도 마르텔을 이겼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엘론드를 이긴 것이야 대단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마르텔 님은 다르다. 조금만 지나면 토벌이 있을 테니, 일단은 자중하고 기다리자. 과연 세상의 주목 속에서 놈이 사라지면 그때 세상과・・・・・・ 황녀가 어떻게 변할지 두고 보리라.’

황녀는 멈칫하던 게일이 끝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커튼을 닫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같이 훔쳐본 어린 시녀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우우, 게일 경이 불쌍해 보여요. 황녀님은 너무 단호하세요.”

“그럼 네가 달래 주지 그러느냐.”

“에이, 전 황녀님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전 황녀님보다 가슴도 작아서 매력이 없다고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살랑거리는 당돌한 어린 시녀의 모습에 살짝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살아났다. “호호, 작은 가슴도 충분히 매력 있으니 실망 마렴. 그런데 릴리 말처럼 너무 단호했던 게 아니었을까?” 남녀 사이라는 것이 본래 사소하게 시작해서 큰 원한이 되는 경우가 많아 황녀는 우려를 담아 말했다.

“저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이전까진 뛰어난 자였지만, 당장 명예 후작께서 나타나시고 보인 행동은 좋게 보기 어렵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파티 때 소란의 발단은 그였으니까요.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흠이 있는 자를 만나 전하께서 고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황녀에 대한 걱정과 진심이 가득한 말레나의 말이었다.

“역시 날 가장 생각하는 건 유모인 거 같아.”

그 마음에 끌려 황녀는 어린 시절 말레나를 부르던 호칭을 꺼냈다.

“그런 말씀 하시면 황제 폐하와 황후께서 섭섭해하십니다.”

“부~ 저도 섭섭한걸요.”

마치 모녀처럼 보이는 황녀와 말레나의 분위기에 샘이 난 릴리가 볼을 부풀리고는 드레스 한 벌을 척하니 들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혼식에는 이 드레스를 입으세요, 전하!”

살짝 삐진 릴리에 의해서 황녀의 드레스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안티로스 전역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화려하게 꾸미는지 천을 수급하는 상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사태에 결혼식의 진짜 주인공을 딸로 두고 있는 하리온 백작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정말 너무들 하는구먼. 이래서야 누가 결혼식의 신부인지 알겠는가.”

예식마다 예의라는 것이 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일단 결혼식에서는 가장 빛나야 하는 것이 신랑, 신부이기 때문에 파티 참석자들은 적당히 선을 지키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암묵적인 예의가 무너졌다. 너도나도 잘나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화려하게 준비했던 딸의 드레스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조금 더 아름답게, 조금 더 화려하게! 결코 하객들의 화려함에 묻힐 수 없는 신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몇 번째와 같은 패턴으로 문이 벌컥 열리며 울상을 한 딸이 달려 들어왔다.

“아버지! 드레스를 다시 해야겠어요. 웨이더벨이 주문한 드레스가! 드레스가!”

“그래,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제발 소리치지 말려무나.”

그렇지 않아도 뜻하게 않게 서두르게 된 결혼식 때문에 딸에게 미안해하던 하리온 백작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일이 지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정말 귀족 가문에 있어서는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라미아가 주문했던 드레스도 전날 완성되어 왔다. 과연 미스터 터너의 실력은 뛰어나 다시 손볼 필요도 없었다.

[어때요? 이쁘죠!]

아직 출발할 시간이 멀었는데도 라미아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이드는 그 모습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최고야!”

당연했다. 쇼윈도에 걸린 옷 중에 이쁘지 않은 옷이 있던가! 천하제일미라는 골렘을 움직이고 있는 라미아의 지금 모습은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 접히지도, 구겨지지도 않은 조각 같은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턱이 있나.

그런 의미에서 지적했다.

“그런데 얼굴은 가면으로 감춘다고 해도, 머리카락 같은 드러난 부분은 어쩔 거야?”

[당연히 다 수가 있죠.]

라미아는 미리 준비해 둔 순백과 순흑의 자수천을 뒤집어썼다. 몇 장의 천을 겹쳐서 사용하자 가려진 문양이 아련해지면서 라미아의 머리카락과 목덜미, 그리고 쇄골 부위가 가려졌다.

[짜잔! 흑마법사의 저주로 빛을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마법사 콘셉트가 완성되었습니다.]

“・・・・・・ 그런 낡은 수법이 먹힐까?”

[당연히 먹히죠! 무엇보다 전 후작 부인이잖아요. 누가 감히 의심하고 들춰 보자고 하겠어요?]

과연 틀린 말이 아니라 이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힘없는 가문의 레이디도 아니고 누가 감히 얼굴을 보이라고 강짜를 놓을 수 있을까?

‘대신 결혼식에서 최고로 주목받을 건 확실하겠어. 신부에게 미안하게 됐는걸.’

이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개성과 특징으로 밀린 거라 신부가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라미아가 아름다움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포기할 거였으면 그렇게 공을 들여 천하제일미를 만들어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확실히 아름다운 몸이란 말이지. 라미아를 인간으로 바꾸면 꼭 저 몸매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

은밀한 맹세를 가슴에 담는 이드였다.

그때 이그렌이 뛰어 들어왔다.

“이드님!”

[아! 왔어요? 이 드레스 어때요?]

“어・・・・・・ 라미아? 그래, 이뻐!”

좋은 반사 신경이다!

이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이그렌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 주고는 말했다.

“이그렌 경도 어서 준비해요. 결혼식에 같이 가야죠.”

“아, 참! 이드 님. 지금 제가 검후님과 소드 팰러스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이상한 소문? 검후님에 대해서?”

검후에 대한 이야기에 이드의 눈이 번뜩였다.

그 안광을 마주한 이그렌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는 급히 입을 열었다.

“네. 그것이…… 검후님께서 수련 중이라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모종의 사고요?”

“예. 사고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풍문이 있어서 부상을 당하셨다거나, 납치를 당하셨다거나, 사망하셨다는 등 무수한 억측이 난무 중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번 소드 팰러스에 대한 습격도 토벌에 대한 흑마법사들의 수작이 아니라 검후님에 대해 확보한 단서를 탈취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호오~ 그런 소문까지 돌고 있다고요?”

살짝 눈을 크게 뜬 이드가 라미아와 눈을 마주쳤다.

이전까지는 소드 팰러스에 대한 공격을 토벌을 두려워한 흑마법사들의 섣부른 발악이라는 추측성 발언이 제일 많았었는데 그게 바뀐 것이다. 그런데 또 그게 사실이란 점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단순한 소문이 이렇게 사실에 가까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지금까지 잘 단속되던 검후의 실종에 대해서도 이렇게 갑자기 퍼지고… 누군가 일부러 퍼트리고 있는 건가.’

이드는 추측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다.

“예. 그 때문에 지금 밖이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엉뚱한 거긴 한데…….”

[무슨 일이기에 엉뚱하다는 거예요?]

“그게・・・・・・ 소드 팰러스에 동원된 자들이 모두 초인이었다는 것과 토벌 대상이 초인을 연구하는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합쳐져서 흑마법사들이 초인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 돕니다. 거기에 걸쳐서 검후님의 사고에 대한 범인이 흑마법사들과 초인이라는 소리도 있고요.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소리죠. 흑마법사들이 초인을 만들어 낼 힘이 있으면 벌써 세상을 지배했겠죠. 그리고 초인을 가장 먼저 인정한 검후님을 초인들이 공격한다는 것도 어림없는 소리고요. 그래서 그들이 얻을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드는 자신들의 의도와 사실 그리고 거짓이 묘하게 섞인 이그렌의 말에 턱을 긁었다.

아무래도 결혼식이 끝나면 일리나를 통해서 쉴라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다.

“혹시 이드 님은 검후님의 일에 대해 모르십니까?”

“아는 건 있지요. 하지만 소문을 해결할 만큼 아는 건 아니라서 일단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빨리 결혼식에 갈 준비부터 하세요. 좀 있으면 다임 백작이 올 겁니다.”

결혼식 초대장을 가져왔던 다임 백작은 자신의 마차로 이드를 결혼식장까지 모시겠다고 연락해 왔었다.

“그런데 그 결혼식에 제가 가도 되는 건가요?”

“가도 되느냐가 아니라 꼭 가야죠. 이제 그만 시온 자작님도 자유를 찾으셔야죠?”

“……!”

이그렌은 갑자기 나온 아버지에 대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