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03화
740화
이드는 두 눈을 크게 뜬 이그렌을 보며 말했다. 깜짝 놀라는 모습이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왜요. 아버님 모셔 오기 싫어요?”
“아니요. 당연히 모셔 오고 싶습니다.”
이그렌이 강력하게 부정하며 말했다. 아무리 호화로워도 감옥은 감옥이다.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경치 좋은 휴양지에서 요양하는 것도 아니고, 인질로 잡혀 있는데 당연히 구하고 싶지. 두말하면 입 아프다!
“하지만 아직 왕실에서도 직접적인 연락이 없는데,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요?”
“아니, 지금이 적당해요. 이그렌이 원한 대로 피 흘리지 않고 잡음 없이 시온 자작을 빼 오기엔 말이죠. 오히려 여기서 시간이 더 늘어지면 사무엘 백작이 아니라 왕궁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왕궁이 문제라니요?”
“생각해 봐요. 일리나스에서 사무엘 백작과 시온 자작의 문제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왕궁에서 사무엘 백작과 같은 입장을 노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나라면 쓸데없이 중간에 사무엘 백작을 끼우지 않고 그럴 것 같은데?”
과연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무엘도 힘에 겨운 판에 왕국에서 나선다니. 그에게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너무 극단적인 가능성을 예로 들었나? 심각한 얼굴을 보니 괜히 미안하네.’
이드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말이 과하긴 했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근시안적인 인간들만 모인 것도 아니고, 왕궁이 나선다면 사무엘처럼 굴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이드가 사라질 것도 아니고, 이드와의 유일하고 튼튼한 연결 고리가 될 이그렌을 거칠게 다루지는 못하리라. 그게 아니라도 이드에게 직접 무공을 배운 이그렌이라는 개인의 가치도 무시할 것이 못된다.
당장 이드에게 무공을 배웠던 검후가 절대의 경지에 이른 것을 보라. 이그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왕궁이 나선다면 사무엘 백작과 같은 방법보다는 원만하고 확실한 혈연으로 이으려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혹시 이그렌이 감추고 있는 무공이 있을까 하는 의심을 둘 필요도 없을 테고.’
이그렌의 자식은 곧 왕실의 핏줄이 될 테니까. 그것이 권력자들이 힘을 키우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그런 만큼 효과는 확실하다.
하지만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물러 빠진 이그렌에게 자극을 주자면 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왕궁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사무엘 백작도 가만히 있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온 자작의 안전에 어떤 해로운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나서는 것이 오히려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무엘 백작의 욕심이 커져서 엉뚱한 행동을 하기 전에 시온 자작을 빼 오자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만약을 대비한 보험도 들어 놓았고.”
“보험이라뇨?”
시온 자작을 대상으로 어떤 일이 진행되었다는 말에 이그렌이 적극 관심을 보였다.
“일리나의 고향 분들에게 시온 자작의 안전을 따로 부탁했어요.”
“일리나 님의 고향이라면 엘프 분들께서요?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을……”
일리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그렌은 엘프들이 나섰음을 알고 안도했다. 과연 보험이라고 할 만했다. 엘프의 능력이라면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믿을만하니까.
동시에 언제 그런 준비를 했는지 믿음직한 한편, 의문도 들었다.
이드는 이그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이그렌이 먼저 도와 달라고 할 줄 알았어요.”
“예?”
“사무엘 백작 말이에요. 그가 시온 자작을 내성으로 옮겼다고 말할 때, 그때 먼저 어떻게 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좀 더 두고 보겠다고 했죠? 하지만 그건 너무 일을 좋게만 본 거예요. 시온 자작을 내성으로 옮긴 사무엘이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마냥 기다립니까? 이번에야말로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대비해야지.”
그런 생각에 이드는 이틀 후 일리나를 통해 시온 숲에 연락을 했더랬다.
그의 말에 이그렌은 이드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인해 신음했다. 그때는 그저 분하기만 했는데, 이드의 말을 듣자 처음 상황을 너무 좋게만 해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모르지만 이드와 일리나라는 기댈 곳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는데도, 그 도움을 적절히 이용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 이그렌이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잊지 않았다.
“어리석은 저를 대신해 아버님을 보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드는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이그렌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준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탁드리지만 말을 편히 해 주십시오. 그리고…… 혹 엘프 분들이 다치는 일은 없을까요?”
아무래도 백작이 다스리는 내성인 만큼 걱정이 된 모양이다.
“그럼 말은 편히 하는 것으로 하고, 엘프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능구렁이 같은 든든한 지원군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이드는 이번 일에 채이나와 마오 모자가 함께할 것이라는 일리나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설마 아직 마을에 있었을 줄이야!’
일리나를 찾아오는 길. 채이나에게 휘둘렸던 기억이 있는 이드는 질색하는 한편 마음 든든해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일리나를 통해 부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었다. 오랫동안 숲에서만 살아 세상 물정 모르는 엘프들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서다. 그레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엘프들에게 피해가 생길 것 같다면 차라리 시온 자작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인연인 시온 자작과 달리 시온 숲의 엘프들은 이제 이드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채이나의 동행은 참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주먹이 부들거릴 정도로 자신을 휘두른 그녀라면 엘프들이 세상일에 휩쓸리지 않도록 잘 이끌어 줄 테니까.
다른 사람을 휘두르며 곤란하게 했으면 했지, 피해를 볼 성격은 절대 아니다.
‘그 대상이 누가 될지 모르지만, 미안!’
이드는 재앙을 세상으로 끌어내 버린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누군가를 향해 용서를 빌었다.
“그렇다면 이드 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그렌이 말했다.
이드가 보니 입술을 꽉 문 것이 결심을 마친 듯하다.
“그렇게 긴장할 일은 없으니 어깨에 힘 빼. 당장 네가 할 일은 크게 없으니까. 그저 결혼식에 가서 내 뒤에 붙어 있기만 하면 충분해. 그러다가 벤텀 백작을 만나면 내 말에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면 되니까.”
과연, 정말 별로 할 일이 없다. 자신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세워 놓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벤텀 백작이 결혼식에 올 수 있을까요?”
정말 별것 아닌 역할에 긴장보다는 기운이 빠져 물었다. 이드의 설명을 통해 그도 이번 결혼식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귀족파와 이드의 만남을 위한 자리. 귀족파가 아닌 자들을 불러 괜히 남 좋은 일 시킬 이유가 없다. 그 때문에 당장 사무엘 백작은 물론 그와 함께 만나는 일리나스의 귀족들 중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젠장, 누가 결혼식 초대장 좀 구해 봐!”
모임이 있을 때면 항상 나오는 소리가 저것일 정도다. 이드가 결혼식에서 벤텀 백작을 만나려고 해도 그가 참석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그 말에도 태연하기만 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마 문제없이 참석할 테니까.”
파티 때 애를 태워 놓은 것도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참석할 것이라고 이드는 내심 확신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벤텀 백작을 무시할 수는 없다. 초대하지 않아도 축하하기 위해 왔다는 명목으로 방문하면 내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만, 일리나스와 벤텀 백작의 경우 썩기는커녕 싱싱한 준치급이다.
이드 앞에서야 기를 펴지 못했지, 일국의 대표로서 충분한 권력이 있는 자였다.
[그렇게 믿고 있다가 결국 참석 못하면 어떻게 해요?]
“어쩌긴. 내 눈이 삐었구나 반성하고, 썩은 준치 취급해 줘야지.”
“이드 님이 번거롭지 않게 벤텀 백작이 싱싱하길 바라야겠군요. 하하하!”
벤텀 백작을 한없이 가볍게 취급하는 이드의 말에 이그렌이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드가 그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그래야지.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 참석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고 와. 곧 마중 올 시간이니까.”
이드의 시간 감각은 정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임 백작이 도착했다.
이드는 그와 인사를 나누며 마중에 감사를 표했다.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저 제가 죄송해서 하는 일이니 절대 고맙다 하지 마십시오.”
이드는 말을 마친 다임 백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라미아에게 향하자 빙긋 웃으며 그녀를 소개했다.
“소개하죠. 제 부인입니다. 이전 백작님이 당부하신 것이 워낙 무서워 급히 불렀습니다.”
“과연 이분이 소문이 자자하신 부인이시군요.’
[만나서・・・・・・・]
“큼…….”
“크흠, 만나서 반갑습니다, 백작님. 라미아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에 순간 실수가 있었던 라미아가 급히 목소리를 고쳐 말했다.
다행히 다임 백작은 그런 부분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라미아의 본체라 할 수 있는 가면과 복장에 압도된 때문이었다.
“아, 저야말로 후작 부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콜린 폴 다임 백작입니다.”
이드는 그가 가면을 쓴 라미아의 모습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후작 부인의 신상에 관해서 먼저 말을 꺼내긴 쉽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모습이 좀 특이하지요. 나름 사정이 있습니다만, 당장 문 앞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장소를 바꿀까요?”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뒷이야기는 마차에서 하시지요.”
먼저 앞선 다임 백작을 따라 세 사람이 마차에 올랐다. 과연 백작 가문의 마차는 넓고 화려했다.
네 사람이 탔지만 공간은 넉넉했다.
이드는 다임 백작 옆에서 딱딱하게 굳은 이그렌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미리 라미아가 설정해 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흑마법사의 저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다는 설정 말이다.
말하면서도 과연 잘 통할까 걱정했는데..
“그럴 수가.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흑마법사와 싸우다니, 이제 보니 후작 부인께서도 명예 후작님만큼이나 용감하고 대단한
분이셨군요.”
너무 잘 통했다.
“하면 저주는 아직 해주하지 못하신 거로군요.”
“네. 다행히 제때 저항해서 빛만 닿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조금 해주가 어려운 저주라서요.”
“신전의 도움을 받지는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흑마법사 관련은 신전이 천적이다.
“부끄럽지만 자존심이죠. 꼭 제 손으로 이 저주를 부셔 버리고 싶어서요.”
라미아가 조막만 한 손을 꾸욱 쥐어 보였다.
“과연! 기사로서 공감이 갑니다. 후작 부인의 자부심을 응원하겠습니다.”
이드는 라미아의 이야기에 감동한 듯 반응하는 다임 백작의 모습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과연 저 이야기가 모두 만들어 낸 것임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래도 될 수 있으면 네리베르와 케마란에겐 라미아의 골렘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주로 백작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때 라미아가 한술 더 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걱정이에요. 오늘 사람들 앞에 나서면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나서서 후작 부인의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해서 알려 두겠습니다.”
“호호호, 감사합니다. 백작님.”
마주앉은 이그렌이 입을 막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