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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05화


742화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황녀를 보며 하리온 백작이 서둘러 뛰쳐나갔다. 그에 트라보 후작도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칫!”

이드는 혀까지 차는 모습이 재미있어 실소를 지었다. 자신과 이야기할 때 있는 대로 대범하고 멋진 척을 해 놓고 황녀를 상대로 표정이 무너지다니. 제국 귀족파가 힘을 쓰지 못하고 소수파를 유지하는 이유가 꼭 황제의 권력이 강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그에 익숙한 듯 노백작이 트라보 후작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에 표정을 고친 트라보 후작이 하리온 백작의 안내를 받은 황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황녀 전하. 설마 고작 백작가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실 줄이야. 오늘 결혼하는 두 사람에게 큰 축복일 듯합니다.”

그의 말에 고작 백작밖에 되지 않는 하리온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매우 중요한 결혼식인걸요. 참석하는 게 당연하죠. 아마도 오늘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안티로스에 없을 거예요. 그만큼 중요한 손님이 오셨으니. 안녕하셨어요? 명예 후작님.”

이드는 결혼식보다는 자신을 보기 위해 참석했음을 전혀 숨기지 않는 황녀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파티장에서 구해 준 은혜를 잊을 수는 없다.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최근 소드 팰러스에 있는 후작 부인께서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후작 부인까지 그런 강자라니 놀랐고, 기뻤답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란 것과 후작 부인이 강한 것이 무슨 상관인지는 일단 두고, 그게 왜 황녀가 기뻐할 일일까?

하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황녀의 시선이 이드와 나란히 서 있는 라미아에게 향했다.

“소문의 황금 미녀상의 주인이신 듯한데,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드가 황녀의 요청에 입을 열려 하자 라미아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황녀 전하께 라미아 그래이드론이 처음 인사 올립니다.”

“라미아 후작 부인이군요. 저도 영웅의 부인을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황녀는 반갑게 대꾸하며 라미아의 이름을 되새겼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행동이 결코 평민 출신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녀의 성은 전대 드래곤 로드 이름. 오히려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므로 황녀는 라미아의 출신을 유추할 수는 없었지만, 잠정적으로 귀족 출신으로 대했다. 어차피 이드의 아내로 소개된 이상 가볍게 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짧은 인사 후 황녀는 자연스럽게 라미아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라미아가 뭐라 답하기 전에 트라보 후작이 이 이상 황녀와 이드들이 더 친하게 이야기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듯 끼어들어 말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후작 부인께서 흑마법사를 퇴치하던 중 저주에 당하셨다고 합니다. 황녀 전하.”

흑마법사라니!

예상치 못한 사정에 황녀는 호기심과 함께 트라보 후작에 대한 못마땅함이 솟았다. 그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왜 그가 대답을 하는가. 물론, 그 속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로서는 자신과 이드들이 가깝게 이야기하는 것을 막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트라보 후작에 대한 불만은 라미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드를 상대로 꼬리를 치는 황녀를 상대로 자신의 대단함을 자랑해서 기선 제압에 나설 생각이었다. 마차를 함께 탄 다임 백작의 반응을 보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트라보 후작이 끼어들어서 흐지부지되어 버린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선 우아한 후작 부인이어야 하는 라미아는 평소 성격을 참고 걸쩍지근한 투로 말했다.

“……후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런, 흑마법사의 저주라니. 해주가 쉽지 않았나 보군요. 혹 도움이 필요하다면 황실이 나서서 교황의 신성력을 빌릴 수 있도록 도울 거예요.” 제국의 황녀라서 그런가, 역시 통이 크다. 쫀쫀하게 주교나 추기경은 언급도 하지 않고 즉시 한 교단의 최고위 신관을 입에 올린다. 어떻게 보면 황실의 힘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말투가 워낙 자연스러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이 대단했다.

“황녀님의 배려에는 감사하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제 스스로 이 저주를 해주하고 싶으니까요. 마법사의 자존심이랍니다.”

그걸 떠나서 교황을 마주했다가는 거짓말이 들통나고 만다!

하지만 이런 라미아의 말에 황녀는 오히려 기꺼운 얼굴을 했다.

“후작 부인의 기개에 감탄했습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황실에 요청하세요. 기꺼이 도울 것입니다.”

바짝 털을 세우고 있던 라미아는 황녀의 눈에 담기기 시작한 호감에 어쩐지 김이 새는 것 같았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는 건데?’

분명 정중하긴 했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날선 경계심을 느꼈을 법한데도 저런 호감을 보이다니. 아무리 이드에게 관심이 있어도 그렇지. 황녀로서의 자존심도 없나?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곧 이어진 황녀의 말에 풀렸다.

“두 후작 부인이 한 분은 검으로, 또 여기 있으신 라미아 후작 부인은 마법으로 경지에 올라 활약하고 있다니. 검후님을 가장 존경하는 저로서는 두 분의 활약이 너무나 부럽고 즐겁습니다. 이런 대단한 부인을 두었으니 명예 후작님이야말로 복 받으신 결혼을 하셨군요. 저보단 명예 후작님의 참석이 새로운 한 쌍에게 더 큰 축복이 될 것 같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황녀의 말에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무공을 배우고 있었지? 검후가 우상이란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과연 그렇다면 검후만큼은 아니라도 이번 소드 팰러스의 습격에서의 활약을 통해 알려진 일리나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아쉽네. 이드에게 함부로 접근 못하게 확실히 밟아 주려고 했더니.’

이런 분위기에선 그러기 힘들 것 같다. 대신 이드의 부인으로 확실한 이미지는 심은 듯하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 체면에 부인이 둘이나 있는 남자와의 혼인에 대해서는 말이 나오지 않겠지.’

혹, 나오더라도 거절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김이 빠진 라미아와 달리 바짝 독이 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페니메나다.

“황녀면 황궁에나 박혀 있을 것이지. 왜 결혼식까지 온거야?”

사실 말만 그렇지 황녀가 방문한 이유야 뻔했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이들이 지닌 목적과 동일할 테니까.

다만 그녀의 불만은 황녀의 출현으로 이드와 라미아에게 접근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돌한 그녀라도 트라보 후작에 황녀까지 함께한 자리에 끼어들 순 없었다.

대신 가만히 귀를 기울인 덕분에 새로운 사실은 알았다. 저 후작 부인이 마법사라는 사실이었다.

오색 기사단장급의 무공을 가진 부인과 그 실력이 불명하지만 흑마법사를 퇴치한 마법 실력을 자랑하는 부인이라니.

“제길, 무공에 마법이라니. 능력치가 너무 높잖아!”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가족이 되는 것보다는 일단 얼굴만이라도 익혀야겠어.”

“아버지, 전 어떻게 해요? 전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는데………….”

“괜찮다. 강한 여자도 매력 있지만, 남자란 자고로 연약하고 자애로운 여자에 약한 법이니까. 네가 딱이다!”

‘퍽이나!’

페니메나는 한쪽에서 들리는 어느 부녀의 대화를 듣던 중 아버지쪽의 말에 동의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의 취향이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딸이 연약하고 자애롭다는 말에는 동감해 줄 수 없었다.

당장 허벅지 굵기가 자신의 허리만 하다. 일단 신붓감으로 내놓으려면 저 살이나 어떻게 좀 하던가! 무슨 용기로 저런 딸을 이드에게 내보이려고 한 것일지 심히 궁금하다.

그러나 두 후작 부인의 위용이 알려지면서 은밀히 야망을 불태우던 경쟁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간 것이 사실.

‘나야 환영할 일이지. 그러니 당신들도 그 남자를 그만 우리에게 좀 넘겨. 언제까지 당신들이 독차지하고 있을 건데!’

그런 페니메나의 속마음을 알았을까.

트레보 후작이 다시 황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는 이번에 쉽게 놓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황녀를 물고 늘어졌고, 이드는 자신들과 관계되지 않은 정치적 이야기에 자리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르신들의 밥상머리에 다가가지 못하던 아이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옆에서는 노백작이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들을 이드에게 소개했다.

‘됐다!’

페니메나는 그 모습에 내심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파트너를 찾았다.

평소 행실이 좋지 않고, 여색을 밝히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자로, 오늘을 위해 특별히 파트너로 고른 남자였다.

“벨로우 경, 우리 저쪽으로 한번 가 볼까요?”

“하하하, 그럽시다. 그리고 소영주로 불러 달라지 않았소, 페니메나. 난 기사처럼 폭급한 자들과 동급으로 불리는 것이 싫다오.”

“호호호.”

불룩한 배를 내민 벨로우의 말에 페니메나가 화사하게 웃었다.

기사들의 성지를 품에 안고 있는 제국에서 기사를 폭급한 자 취급하다니. 평소 행동이 좋지 못한 만큼 기사도를 숭상하는 기사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 그런 듯하지만, 정말 멍청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자리에 파트너로 함께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만족스러운 행동이다.

페니메나가 벨로우의 팔을 끌면서 향하는 앞에는 구석에서 조용히 과일주를 홀짝거리고 있는 이그렌이 있었다.


끝없는 사람의 파도에 질린 이드가 사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라미아와 함께 조용히 쉬는 시간을 가졌다. “휴우~ 정말 정신없네.”

“이 정도는 벌써 각오한 일이잖아요. 이게 싫으면 다른 귀족들처럼 자주 얼굴이라도 비치던가 해야죠.”

“그건 더 싫다~ 이 사람들이 얼굴 보는 걸로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잖아.”

차가운 냉수를 들이켜던 이드가 질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한데 모여 있던 레이디들이 꺄악 하고 작게 환호했다. 이드는 그 모습이 어이없는 한편, 그녀들을 데려온 귀족들이 한심했다.

“최소한 성인은 되어야 할 거 아냐? 아직 세상모르는 아이들을 데려온 인간들은 도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요. 이드 취향을 몰라 일단 찔러 보자는 걸지도 모르지만, 엄연히 저와 일리나가 있는데 말이죠.”

“취향을 몰라서 일단 준비했다니. 끔찍한 소리지. 혹시 저 속에 남자도 끼어 있는 거 아냐?”

이드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하자 라미아가 눈을 번뜩였다.

“한번 찾아볼까요? 성별 감별 마법으로!”

“제발 참아 주세요! 그나저나 왜 너한테는 사람들이 안 붙지?”

이드가 불공평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하죠. 어디까지나 이드가 중심인데. 전 명예 후작의 부인일 뿐이라고요.”

그 외에도 아름답지만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접근이 꺼려졌던 점이 컸다. 아무래도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차라리 모두 가면을 썼다면 모르지만, 자신만 드러나 있다는 점이 어려웠으리라.

“그래도 다임 백작이 잘 말해 준 덕분에 가면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없어서 큰일은 덜었다.”

“그러게요. 덕분에 편했죠.’

다임 백작은 마차에서 말했던 대로 사람들에게 라미아가 가면을 쓴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꺄악! 누가…… 누가 도와 주세요!”

페니메나가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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