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20화
757화
젊은 기사 중 가장 빛나는 실력을 가진 게일의 가르침이 소용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검기 운용이 매끄러워지는 단계에 있는 황녀다. 하루 먼저 검술을 익힌 자라 해도 선배로 여기고 배울 것이 있는 법인데, 황녀와 게일의 차이는 그야말로 까마득함 그 자체가 아닌가.
“행여 내가 경의 실력을 폄훼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드가 보기에 절대 아닌 게 아니다. 얼굴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데다 귓불이 붉어져 있다.
“내가 그대가 아니라 명예 후작께 부탁하는 이유는 난화십이식 때문이니까요. 명예 후작이라면 검후님 만큼이나 난화십이식에 대해서 잘 아실 테니까요. 그렇죠, 명예 후작님?”
“검후님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요.”
“사실인걸요.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드가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하자 황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겸손이 아니었다. 비록 이드가 무공에 뛰어난 재능이 있고, 드래곤 하트로부터 강력한 내공을 얻긴 했지만 검후도 제국의 도움을 받으며 백 년을 고려했다.
이드의 나이에 몇 배에 이르는 시간을 일로 정진한 그녀의 실력을 이드는 가볍게 예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의 무게는 단순히 내공의 양으로 이겨 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검후가 없는 지금 이드가 난화십이식에 대한 최고수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헛, 그렇다면 난화십이식의 삼식을 마스터하셨다는 겁니까?”
게일이 감탄한 듯 말했다.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기에는 충분할 정도로요. 그래서 경이 아니라 명예 후작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에요.”
“으음,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녀님께서 너무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완벽하게 익히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이드는 무공보다 젯밥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게일의 말을 듣다 물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게일 자작도 난화십이식을 익힌 듯합니다?”
이드의 물음에 게일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재능을 사랑하신 검후님께서 손수 당신의 무공을 알려 주셨지요. 황궁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수해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인 삼식을 모두 전수해 주셨는데, 이식 이상을 배운 사람이 거의 없지요.”
그는 자신이 검후에게 인정받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난화십이식의 정통인 이드를 앞에 두고 검후의 무공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이드가 보기에 우습지도 않은 반항이었다.
‘보자, 쉴라 경이 난화십이식을 몇 식까지 익히고 있더라?’
모르긴 몰라도 쉴라의 검이 품은 무리를 미루어 짐작하면 사식 혈화 이상은 익혔지 싶다.
그러자 저 혼자 검후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는 듯 우쭐한 게일의 말이 신빙성 없게 느껴졌다.
거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일리나가 화원에서 쉴라에게 난화십이식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난화십이식을 얼마나 익혔느냐는 이미 의미 없어져 버린 것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황궁의 난화십이식이 아니라, 이드가 가진 난화십이식을 쉴라에게 가르치고 있다. 황궁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제가 보기에 황녀님께서는 앞의 삼식을 더욱 깊이 익히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답을 마친 게일이 다시 설득에 나서자 황녀가 귀찮다는 기색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명예 후작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익힐 수 있는 무공에 제한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적정 수준 숙달된 후에 다음 초식을 익히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의 무공은 길고 긴 끝없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 이야기 중 하나만 파서는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이드가 단정적으로 말하자 황녀가 게일을 돌아보았다.
“이렇다고 하시는군요?”
“물론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난화십이식은 하나의 초식에 무한한 깊이를 가진 무공입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도 작은 것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황녀님을 압니다. 황녀님의 성향에는 제 주장이 옳습니다. 명예 후작께서는 황녀님을 모르시고 너무 성급히 일반적인 주장을 펼치신 것입니다.”
게일이 섬세함이 모자란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내심 헛웃음이 났다.
설마 그레센에서 무공에 대해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난화십이식은 전 삼식만 익힌 자에게 말이다.
다른 때였다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은 무시해 버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좋은 후원자이자 정보 제공자인 황녀가 잘못된 길로 빠지도록 둘 수는 없다.
“게일 자작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말이지요. 그러나 난화십이식은 특별한 무공입니다. 검후님의 무공이 아니겠습니까. 난화십이식은 그 안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이 워낙 깊어 일부분만 파게 되면 그 색에 너무 물들어 이후의 초식을 익히는데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러니 적정 수준에 오르면 진도를 나아가고, 그 후 전체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 깊이를 더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난화십이식을 익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드는 난화십이식의 전 삼식과 중 삼식의 차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괘, 강, 변을 핵심 키워드로 두고 있는 전 삼식과 달리 중 삼식은 그에 둔과 환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중 환은 그렇다 치더라도 둔은 앞의 핵심 키워드에 모두 반하는 성질이다. 느리고, 무르고, 어리숙하다.
쾌, 강, 변에 너무 매몰되다 보면 그 반대편에 있는 둔을 깨우치기 너무 힘들어지는 것이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게일 자작은 난화십이식의 중 삼식을 모르지 않습니까.”
“…..”
“검후님도 가르치지 않을 중 삼식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가 없으셨을 테니까요.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르치지 않을 것이기에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드의 말에 게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드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황녀에게 중 삼식에 대해서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 갔다.
황녀는 최근 막혀 있던 부분의 해설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부르르르.
그 모습에 게일은 온전한 구경꾼으로 떨어져 버린 느낌에 주먹을 떨었다.
‘그러나 나 게일, 이대로 밀려나진 않는다.’
비록 난화십이식에 대해서는 이드보다 알지 못해도, 황녀에 대해서는 자신이 더욱 자세히 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이드가 설명을 마치자 끼어들었다.
“하지만 명예 후작님, 저는 여전히 제 주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난화십이식을 익히는 것은 일반인이 아니라 제국의
황녀님이십니다. 그분의 몸에 가장 알맞은 방법을 선택해야지 않겠습니까.”
이드는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게일의 말에 살짝 피곤한 표정이 되었다.
“그 방법이 게일 자작의 주장이고요.”
“그렇습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제가 직접 증명하겠습니다.”
“증명? 어떻게 말입니까?”
강하게 나오는 게일의 주장에 관심을 잃던 이드가 흥미를 보였다.
“실력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저와 대련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저 발악할 뿐입니다. 난화십이식을 모두 익히신 명예 후작께 황녀님과 마찬가지로 전 삼식만을 익히고 있는 제가 크게 밀리지만 않아도 제 말이 증명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 말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지요.”
정치꾼들이 모인 황궁에서 근무하기 때문인지 말이 참 매끄럽다. 거기다 끝말도 묘하다. 기회를 주지 않으면 이드가 일부러 사실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드는 그것 이전에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도전하는지가 궁금했다. 소문을 통해 자신이 마르텔을 꺾었다고 알려졌을 텐데, 설마 게일은 자신이 마르텔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드는 그의 억지 주장보다 그의 꿍꿍이가 알고 싶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렇게 합시다.”
“역시 황녀님의 평가처럼 마음이 넓으십니다.”
“하하.”
그럼 억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좀생이가 되는 거였던가?
“그럼 제 개인 연무장을 열어드리죠.”
가만히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황녀가 말했다. 이미 결정된 일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굴 위해서 말린단 말인가? 자신의 눈에 찍힌 게일? 아니면 이길 것이 분명한 이드?
“아닙니다. 기사 연무장으로 가시지요. 그곳에 제 말을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기운찬 걸음으로 게일이 앞장서서 황녀궁을 나섰다.
이드가 그 뒤를 따르자 황녀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제가 아는 게일 경은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랍니다. 그는 명예 후작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짧은 말이었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하지만 이드도 그런 사실은 그녀의 말이 아니라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처음 게일 자작이 저와 악수할 때 그의 눈을 못 보셨나 보군요?”
“네?”
“그때 보셨으면 그런 말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이드는 자신의 말에 알 듯 모를 듯 갸웃거리는 황녀와 함께 게일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나오자 코린이 다시 마차를 몰아야 했다. 기사단의 연무장은 황녀궁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이 사용하는 연무장에는 언제나 실력을 높이려는 기사들이 가득했다.
소드 팰러스에서 많은 실력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만큼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황궁의 기사를 실력만으로 보고 뽑지는 않지만, 충성심만으로 기사 자리를 보전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후배들 이외에도 기사들과 주도권을 놓고 힘을 겨루고 있는 초인들도 있다.
무엇보다 그 초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연무장에는 언제나 땀 흘리는 기사들이 많다.
그리고 오늘 그 연무장에 소란이 일어났다.
다름 아니라 황녀가 연무장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언제나 수련에 힘쓰는 그대들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을 하세요.”
그러나 하던 일 하란다고 할 수 있을 턱이 있나. 황녀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아닌가.
기사들 중 웃통을 벗어 던지고 있던 자들은 티 나지 않게 근육에 힘을 주어 부풀리기도 했다. 그때 이드와 황녀를 한곳에 둔 게일이 연무장에 딸린 창고로 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게일 경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 그 물건인가요?”
팔찌라고 하기에는 넓고, 완갑이라고 하기에는 짧은 미묘한 원통형의 물건을 보고 황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착용자의 내공 사용량을 정해 주는 대련 전용 아티팩트입니다.”
정확하게는 착용자가 제한된 내공 이상의 힘을 사용할 경우 부서지며 그 사실을 알리는 물건이었다.
내공을 금제하는 아티팩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음은 물론 그 한계가 있는 물건조차 제작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게 높다. 또 들어가는 희귀 재료는 얼마나 많은지.
과열과 부상 방지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그래서 간단히 내공을 측장하고 그것을 외부에 알리는 싼 물건을 제작한 것이다.
이드는 게일의 설명에 이 장비가 사용되는 이유가 단순히 가성비에만 있지 않음을 눈치챘다.
“제한된 선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고 내공을 뽑아 사용하는가가 중요하겠군요.”
이드의 말은 정확했다. 서로 실력과 육체 능력이 비슷하다고 할 때 승패를 가르는 것은 내공의 양과 통제력에 달릴 테니까.
아티팩트가 부서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힘을 뽑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기사단에서는 이 아티팩트에 루키브레이커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내공의 통제에 미숙한 신입 기사들은 주로 설정된 내공의 한계를 넘겨 아티팩트를 부수기 때문인데, 이때 부서진 아티팩트의 대금은 부순 사람이 책임지게 된다.
기능은 심플하지만 일단 아티팩트인 이상 신입 기사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일 수밖에 없다.
즉, 승부에서 패한 후에 아티팩트의 구매로 멘탈과 지갑을 둘 다 부숴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