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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59화


796화

불행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잊은 듯, 이드가 별별 시시한 이유까지 끌어와 설득하는 모든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게 당연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피 튀기는 전장에 세울 아버지가 어딨겠어?’

그래도 황녀와 약속한 것이 있어 이드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래 봤자 황제의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이게 할 만큼 펀치력 있는 이유는 없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최우선으로 보호되어야 할 황족이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나라가 망할 때뿐이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이드도 황제가 끝까지 거절해 주는 편이 편했다. 자신의 설득으로 황녀가 전장에 서게 될 경우 그녀의 안전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하니까.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듯 황녀의 참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허락이 떨어지면 그 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반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결국 이드가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음?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이 아니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답니다. 언변은 제 전문이 아니라서요.’

“확실히 명예 후작의 말솜씨는 검 솜씨만 못한 것 같소. 그럼 내가 결정을 내릴 차례구료.”

“이미 허락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드셨지 않습니까?”

뭔가 싸한 예감에 이드가 지금까지 불가를 외치던 황제의 자세를 언급했다.

“그렇긴 하오. 하지만 황녀가 바라고, 명예 후작이 처음으로 하는 부탁인데 어떻게 거절하겠소. 나는 황녀의 참전을 부분적으로 허락하겠소. 단, 조건은 있소. 황녀가 전장에 설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뿐이며, 황녀가 전장에 설 때는 꼭 명예 후작과 황색 갈기 기사단이 함께하는 것이 조건이오.” 

‘젠장,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한 번 아니면 아닌 거지, 조건을 달아서 허락할 건 뭐야. 황제씩이나 되어서는 왜 이렇게 줏대가 없어!’

이드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황녀의 안전은 자신의 책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황녀 옆을 지키라고 하지 않는 것이 어딘가. 거기다 황녀의 활동 시간은 한 시간!

그 정도면 크게 나쁘지 않다. 수일 동안 이어지는 전장에서 한 시간은 순식간이다.

“명대로 한 시간 동안 황녀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이 소식을 알면 기뻐하시겠군요.”

“글쎄, 토벌이 끝난 후에 원망이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오. 경은 전쟁을 겪어 보았소?”

이드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무림에서 싸움은 많아도 전쟁은 없었고, 그레센에서도 가볍게 발을 담근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기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깊게 발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 알겠구려. 이번 토벌과 같은 큰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말이오. 황녀가 지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싶다고 하지만 토벌이 끝나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오.”

‘그렇게 걱정이라면 끝까지 참전 불가를 관철하면 서로 편하고 좋은데.’

아무래도 황제는 황녀가 전쟁의 처절함과 잔혹함 속에서 무언가를 깨닫기 바라는 것 같았다. 이드로서는 자식 교육은 제발 남의 손을 빌리지 말고 스스로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잠시 후 황제와의 만남이 끝났다.

이드와 황제 서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출정 파티가 있고, 드디어 토벌대가 출발한다는 말이지.”

헤어지기 전 내일 있을 회의는 몰라도 파티에는 참석하라며 황제가 해 준 말이었다.

[모일 사람은 다 모였다는 거겠죠.]

“그런 거지. 더 늦어지면 토벌대에 참석한 사람들이 늘어지기 시작할 테니까.”

그렇게 늘어진 마음의 빈틈이 사고와 패배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황녀 전하는 만나고 갈 건가요?”

“어떻게 할까요? 황녀를 만나면 일리나가 상당히 피곤해질 수 있는데.”

[・・・・・・굳이 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일리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이드가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궁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마차와 그 곁에 서 있는 안면 있는 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코린 경?”

여기사는 이드가 자신을 알아보자 꾸벅 인사를 하고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서 저택까지 함께 돌아가길 원하십니다.”

코린의 말처럼 마차 안에서는 황녀가 유혹하듯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드는 두 볼을 붉힌 황녀가 뚫어져라 일리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끌끌 혀를 찼다.

“저번에 찾아와서는 라미아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더니, 이번엔 일리나가 목적인 모양이네요.”

[괜찮아요.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어차피 토벌 때 볼 텐데 미리 알아 두면 좋죠. 같이 가요.]

일리나가 뭐라 하기도 전에 라미아가 나서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후다닥 마차에 오르자 이드도 두 사람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그럼 저택까지 잘 부탁해요, 코린 경.”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명예 후작님.”

달깍.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그 사이 세 사람은 재빠르게 통성명과 인사를 끝내고 있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일리나 후작 부인을 드디어 만났어요! 부인은 제가 부인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 했는지 꿈에도 모르실 거예요. 정말 감격스러워요!”

황녀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뜨거운 사랑 고백과 같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황녀 전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에 반해 대답하는 일리나의 모습은 담백하다. 감정이 넘치고 있는 황녀와 극과 극으로 비교되는 순간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카리스마는 어디 가고 갑자기 저런 열혈 팬이 튀어나온 거야? 황녀도 클라인 백작과 같은 과인가?’

클라인 백작이 검후 빠돌이라면 그녀는 검후를 필두로 한 여성 능력자 빠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첫 인상과의 갭이 너무 크다. 너무 한심해 보인다! 이드는 내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설마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 분이 입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다 싶어 바로 달려왔죠. 지금이 아니면 토벌 전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토벌대가 출발하기 전에 무조건 볼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대답을 하면서도 일리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부담스러워하는 그녀를 위해 이드가 나섰다.

“그럼 황녀 전하의 부탁에 대한 황제 폐하의 말씀을 듣고 나오신 건 아니로군요.”

“참, 부탁드렸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제야 자신을 향하는 황녀의 시선에 이드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역시 명예 후작님이 나서 주시면 허락해 주실 줄 알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드는 환하게 웃는 황녀를 보며 황제가 제시한 조건들을 알려 주었다.

다른 두 조건과 함께 가장 걸릴 만한 한 시간의 짧은 한계 시간에 대해 들었지만, 황녀는 전혀 실망하거나 아쉬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한 시간은 짧고 아쉽지만, 전장이 가장 치열할 때 뛰어든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한 시간 안에 최고의 효율을 뽑겠다는 말이군요.”

“황제 폐하는 한 번 결정한 일은 어지간해서는 잘 바꾸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괜히 시간을 늘려 달라고 졸랐다가는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할 거라며 황녀는 황제의 속이 좁다고 흉을 보았다.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의 흉을 보다니. 황제의 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마침 고민하던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황녀가 한층 더 신이 난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일리나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소검후님, 앞으로 소검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으면서 뭘 묻는지. 저건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통보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소검후라는 별명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소검후라는 별명은 굉장히 특별한데요.”

황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검후를 세상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그녀로서는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지고 싶은 별명이었다. 어중간한 전쟁터나 용병들 사이에서 나온 별명도 아니다. 검후의 터전인 소드 팰러스에서 만들어 붙인 별명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거기에 살고 있는 수많은 기사들과 수련생들이 작은 검후로서, 새로운 검후의 가능성으로서 인정했다는 뜻이 아닌가.

지금까지 소검후를 비롯해서 검후를 차용한 별명이 없었을까. 있었다. 그것도 수없이 많이. 하지만 모두 일부에서 잠시 불려지다 의미 없이 사라졌다. 모두 소드 팰러스와 기사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도 마음대로 줄 수 없는 별명을 가졌는데 그것이 싫다니. 황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검후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기대 중 어느 것에도 응해 줄 생각이 없으니까요. 제게 소중한 것은 이드와 라미아라는 가족과 제 고향 마을뿐이랍니다. 그 이외에는 상관하고 싶지 않아요.”

조용하지만 자기주장이 확실한 일리나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마차 안을 울렸다.

이드는 창밖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엘프인 일리나에게 인간 세상의 별명 따위 무슨 값어치가 있을까.

황녀는 놀란 듯 쉽게 입을 닫지 못했다.

일리나의 대답은 그녀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별명 속에 담긴 기대가 싫다니. 자신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선망과 경외라고 생각했다. 부러움이라고 생각했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가 소검후라는 별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었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시기 때문에 후작 부인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후작 부인께서 싫어하시니 소검후라고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후작 부인께서 소검후로 불리게 된 소드 팰러스의 습격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후작 부인께 꼭 듣고 싶었답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군요. 하지만 그 전에 황녀 전하.”

“네.”

“이 손부터 좀 놓아 주시면 안 될까요?”

“호호, 조금 더 잡고 있으면 안 될까요? 소검후라 불리게 된 기운을 조금 더 받고 싶은데…….”

주물주물. 쓰담쓰담.

황녀는 말하는 중에도 일리나의 손을 만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일리나의 손에 묻은 검법의 정수를 조금이라도 가져가고 싶은 듯이.

그리고 그 옆. 이드는 변태의 손에서 일리나를 구해야 할지, 아니면 열성팬의 팬심으로 너그럽게 넘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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