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28화
964화
포롱~
발신기로부터 풀씨 같은 마나가 날아오르고 라미아의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발신기에서 튀어나온 거 있죠? 마나의 씨앗이에요. 그걸 기준으로 이드가 이동해 올 거예요. 그러니 일리나도 조금만 더 힘내고 있어요. 참, 따로 건들지 않아도 3초 뒤면 자동으로 이동해 와요.’
마나의 씨앗. 라미아가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나는 기능이다.
일리나는 통로 안으로 마나의 씨앗을 튕겨 보내고는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기사들이 마법사를 포위하고 있던 공간에는 어느새 검은 기운이 똬리를 틀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짧은 깜빡임과 함께 장소가 바뀐다.
단숨에 주변을 파악한 이드가 숨을 들이켰다. 비릿한 혈향 대신 메마른 흙의 냄새가 났다.
“역시 라미아의 공간 이동은 최고란 말이야.”
다른 마법사들의 공간 이동은 가벼운 멀미나, 어지럼 등의 미묘한 부작용이 있다는데, 라미아의 공간 이동은 어지럼은커녕 한 점 흔들림 없이
깔끔하다.
마법이 발동되는 순간의 마나 집중 현상만 아니라면, 이동된 걸 모를 정도다.
무엇보다 전 대륙적인 차원 진동과 던전 안의 방해 요소를 뚫고서 이런 안정감이라니. 새삼 라미아와 함께하게 된 사실에 감사하고 싶은 이드다. 그런 이드의 기척에 통로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누구냐!”
“일리나가 좀 멀리 던져둔 모양이네. 놀라게 한 것 같아 미안하군.”
“헛! 검을 내려! 명예 후작님이시다.”
“시, 실례했습니다.”
이드를 알아본 기사들이 빠르게 검을 거뒀다. 일 조와 삼 조에 이드의 얼굴을 모르는 기사가 없는 덕분이다. 유명한 것이 이럴 때는 편하다.
“이봐, 길을 터! 이드 조장님이시다.”
적의 의식한 듯 조용한 말과 함께 기사들이 양쪽으로 붙어서며 길이 났다. 그 길을 지나 앞으로 나가자 통로 밖을 바라보고 있는 쉴라가 보였다. 그리고 이드가 왔음을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는 쉴라를 대신해 스폴이 이드를 반겼다.
“정말 딱 필요한 순간에 복귀하셨네요. 혹시 숨어서 몰래 지켜보다 나오신 건 아니겠죠?”
가자미눈을 하고 의심하는 모습에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찌르고 말았다.
“꺄윽! 따가워~!”
“일리나의 신호를 받은 거야. 장난도 때와 장소를 좀 가려.”
“칫, 조장님이 눈을 찌르신 건 때와 장소에 맞나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스폴의 반론이지만 이드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는 쉴라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쉴라가 말을 건넸다. 여전히 밖으로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상태로.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그쪽엔 조금 여유가 있어서요. 아무래도 이쪽이 먼저인 것 같아서 달려왔죠.”
“이드 님을 귀찮게 하지 않고 해결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아내가 부르면 달려오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거기다 그냥 호출도 아니고, 괴롭히는 놈이 있다는데. 오지 말라고 해도 왔을 겁니다.”
“후후, 과연 쓸데없는 소리였군요.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오신 분께.”
“흠. 마음에 드는데요? 가정의 평화라. 그럼 가정 파괴범들은 저 마법사들이겠군요.”
“놈들이 불러낸 뱀도 추가하시죠.”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통로 밖을 살폈다.
고양이 눈을 닮은 타원의 공간에서는 한창 기사들과 일리나 그리고 거대한 뱀 대가리의 싸움이 한창이다.
그런 뱀 대가리 뒤에는 해더웨이와 마법사들이 서 있고, 그 아래로는 뱀의 몸통이 연결된,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 같은 기운이 이글거리며 천천히 그 넓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구멍이 커질수록 뱀도 커진다는 점이다.
“원래는 기사들만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일리나 님을 노리고 계속 이쪽을 공격해 오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일리나 님께서 직접 내려가셨습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통로의 끝이 군데군데 무너지고 깨져 있다.
“일리나를 노렸다고요?”
“네. 일리나 님께서 내려가자마자 이곳으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미끼로 쓸 생각이었나 보군요. 쓸데없이 욕심만 많은 놈들. 지들 수준으로 일리나를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이미 앞서 라미아를 향한 집요한 탑주의 욕심과 살의를 확인한 이드는 마법사들의 목적이 금방 짐작이 갔다.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분한 분노에 살기가 깃들었다.
일리나를 노려 무엇을 할까. 뻔한 일이다. 그녀를 인질로 잡아 자신과 라미아를 노릴 터다. 하루도 피가 마르지 않는 무림에서도 지탄받을 짓거리이며, 이드도 개인적으로 혐오하는 일이다.
일리나가 그 목표가 된 것이다. 차라리 당당한 싸움 중에 일리나가 다쳤다면 화가 덜 났을 것 같았다.
“쉴라 경이 남은 것은 황녀 전하 때문이겠군요.”
“좀 답답했습니다만. 오신 김에 대신해 주시겠습니까?”
쉴라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희망을 담아 말했다. 알았다고 하면 그대로 달려 나갈 모양새다.
어쩌면 당연하다. 지금까지 그녀가 모신 것은 검후다. 쉴라보다, 은색 기사단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지 않은 주인.
그녀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지켜보기만 한 경우가 있었을까. 오히려 가장 앞서서 은색 기사단을 이끌고 검후에 대항하는 자를 향해 검을 든 그녀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가 지켜야 하는 사람은 황녀다. 비록 황녀가 검후의 무공을 익히고, 그 실력이 상급 기사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호해야 할 대상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이드는 그런 쉴라를 향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가정 파괴범은 내 손으로 잡고 싶어서 말이죠.”
“휴~ 어쩔 수 없죠.”
실망하는 쉴라의 뒤로 황녀가 조심스레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황녀 입장에선 쉴라의 보호가 답답한 한편, 자신으로 인해 발목이 잡힌 쉴라에 미안함이 있었던 것.
“이드 님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금방 끝날 겁니다.”
진짜다. 가정 파괴범과 같은 악질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고 있을 생각이 없는 이드다.
툭툭.
자신이 온 줄도 알지 못하고 뱀 괴수와 싸우고 있는 일리나만 주시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던 이드가 예열을 하듯 땅을 찼다. 그런 후, 한 걸음 이드가 앞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이드의 모습이 지워진 듯 사라졌다.
“……!”
그 모습에 이드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는 중에 사라지다니.
하지만 놀람이 지나간 자리에 기대감이 차오르자 모두의 시선이 마법사들을 향했다. 당연히 이드가 그들을 노릴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그런 기대대로 부운귀령보를 밟은 이드는 은밀하게 마법사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어차피 검은 뱀이야 마법사들이 불러낸 것. 마법사들만 처리하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처리하는 데 문제는 없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그냥 둘 경우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아니, 그런 건 상관없지. 일리나를 노렸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그렇게 이드가 마법사들에게 접근하려 검은 구멍 위를 지날 때였다.
거대한 뱀의 몸통을 유지하는 데만도 힘들어 보이던 구멍의 일부가 꿈틀거리더니, 그 속에서 갑자기 수십 마리의 뱀이 튀어나와 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놈들인지 초인과 기사, 마법사의 눈까지 속이는 부운귀령보의 공능을 넘어 정확히 이드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존재가 발각되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드가 움직였다.
촤르르륵.
우선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중인 마법사들을 향해 아까 써먹고 남은 못을 던져 주었다. 자신과 같이 몰래 접근하는 암살자를 대비해 이런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다른 짓을 하기 전에 수를 줄여 놓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깃든 때문인가. 못에는 취을난지가 아니라, 혈뇌천강지의 힘이 실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못이 이드의 손을 떠나고 1초도 지나지 않아 일곱 명의 마법사들이 가슴과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단숨에 절명한 것이다. 그중에는 아티팩트로 보호받은 마법사도 있었지만, 한 점에 집중된 혈뇌천강지의 내력을 막아 내기엔 힘이 모자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이드가 다시 손을 움직이는 순간.
샤아아아~
그 앞을 커다란 벽이 나타나 막아섰다. 직전까지 맹렬하게 일리나와 기사들을 공격하던 그 거대한 뱀 대가리였다.
그뿐 아니다. 한 번 이드를 놓쳤던 수십 마리 뱀 역시 다시 이드를 노리고 독아를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뱀 대가리보다는 작아도 한 마리 한 마리가 건장한 기사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보호 마법을!”
“라운딩 실드!”
“테라 프로텍트!”
동시에 뱀 대가리 뒤로 들리는 마법의 시동어들.
아무래도 단숨에 처리하긴 틀린 것 같다. 이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마법사들 대신 귀찮게 달려드는 검은 뱀들의 머리를 베어 내고서 일리나 옆으로 내려섰다.
“이드.”
“조장님!”
“명예 후작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떨어진 이드의 모습에 일리나와 기사들이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특히 어떻게 된 것이 일리나보다 기사들이 더 좋아하는 모습이다.
이드는 그들에게 슬쩍 손 인사를 하고는 일리나에게 말했다.
“조금 늦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죠? 있으면 말해요. 내가 저놈들을 아주 자근자근 다져 놓을 테니까.”
“충분히 빨리 왔는걸요.”
살포시 웃는 일리나의 미소가 상큼하다. 이 전투 중에 어떻게 저리 평화롭게 웃을 수 있는 건지.
이드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이드를 잡아먹을 것 같던 뱀 대가리가 멈춰서 있고, 그 뒤로 중첩된 보호 마법 뒤에 숨은 해더웨이와 마법사들이 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그중 두 장로와 그 뒤로 남은 세 명 마법사들이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순간 반응도 못 하고 같이 연구하던 동료 마법사를 잃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 사정.
이드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드의 눈이 향한 것은 그들 앞에 서 있는 해더웨이였다.
해더웨이 역시 마찬가지. 그는 죽어 자빠진 마법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드는 그에 혈뇌천강지력이 깃든 못을 튕겨 내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점 흐트러지지 않는 마나도 그렇지만, 혈뇌천강지력에도 흔들리지 않던 단단한 보호 마법을 가진 마법사.
이드는 그가 이 마법사들의 대장임을 단번에 알았다.
“소검후를 조이면 오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 뵙게 될 줄은 솔직히 생각 외입니다. 명예 후작 맞으시지요?”
“아내를 괴롭히는 양아치들이 있다고 하는데, 가장으로서 열일 제치고 당장 달려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나저나 나야말로 조금 의외로군. 탑주는 나름 거래를 아는 정당한 분이었는데, 당신들이 하려는 짓은 삼류라는 것이 말이오.”
“저희가 탑주님에 미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지요. 한데, 다른 부인께서는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라미아 후작 부인이라고 하셨던가요.”
말과 함께 해더웨이의 눈이 쉴라들이 있는 통로를 향해 돌아간다.
그에 이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라미아라면 바쁘기도 하지만 필요 없어서 말이오.”
“필요 없다?”
“삼류 양아치를 때려잡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한 일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