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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44화


980화

라미아가 제압한 초인의 등을 밟고 있는 모습이 압권이다. 마치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의 기념사진 포즈 같다. 이드는 내심 조금 적절치 않은 자세가 아닐까 하면서도, 메르시오를 향해서는 기세등등하게 웃어 보였다. 

“보다시피, 누구하곤 달리 혼자가 아니라서 말이지. 꼭 내가 아니어도 초인쯤이야 금방 정리가 가능하거든.” 

“부부 일심동체! 우린 영혼으로 묶여 있는 사이죠. 어?”

일리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농담처럼 외쳐 보는 라미아였다.

꿈틀 꿈틀.

그 목소리에 자극받았는지, 그녀의 발아래 있던 초인이 격렬히 온몸 비틀기를 시전했다.

어떻게든 메르시오를 향해 나가려는 모습. 폭주라기보단 마치 미쳐 버린 스토커의 최후 같다.

 “끄아아악! 풀어 줘! 놈을, 놈을 죽여야 한다고! 피크다운!”

그러나 결국 쉽사리 움직일 수 없자 그 초인은 메르시오에게 직접 달려드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엎드린 자세 그대로 피크다운이란 초인기를 끌어 올려 이마 위에 발사체를 만들어 내려 했다.

퍽.

그에 라미아가 밟고 있던 발로 뒤통수를 까 버렸고, 초인은 그대로 기절했다.

동시에 주변에 뒹굴고 있는,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초인들의 머리도 시원하게 올려 차 기절시켰다. 조금 멀리 있다 싶으면 마나슛터를 쏘았는데, 백발백중으로 하나도 빗나가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모든 초인을 기절시킨 라미아가 옷깃을 다듬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마무리에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코홈. 이젠 완벽해졌어요.”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메르시오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작 부인이 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둘 다 내 자랑스러운 아내들이지.”

“저 왈패 같은 여자가 후작 부인이라니. 마법 쪽이면 라미아라는 이름이던가. 묘하게 귀에 익은 느낌인데.”

“당연히 귀에 익어야지.”

과거 그들이 이드와 싸울 때 라미아의 마법에 고생한 걸 기억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마법을 온몸에 둘러 진면목을 숨겼기 때문인지, 메르시오는 현재의 라미아와 과거의 마법 검을 전혀 연관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좋은 아내로군.”

“부러우면 어디 들판에 가서 예쁜 들개라도 찾아보든가.”

승자의 미소를 담아 답한 이드가 라미아를 향해 말했다.

“오 조 조원들은 먼저 밖으로 옮기도록 해. 아무래도 주변에 있으면 다칠 것 같으니까.”

“알았어요. 아, 하는 김에 저기 숨넘어가기 직전인 전직 검왕도 데려갈까요?”

“훗, 그러면 좋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라미아의 말에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 그에 메르시오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누구 마음대로!”

우우우우~

마나가 담긴 긴 고함 소리로 마나를 흔들고, 동시에 두 손을 번뜩였다.

순간 송곳니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한 드릴 형태를 갖춘 마나의 탄환이 생겨나 이드와 라미아, 그리고 존 워스에게 쏘아졌다. 당연히 앞선 두 사람을 향해선 공격의 목적이었고, 존 워스를 향해서는 보호막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 보호막이 있는 이상 공간 이동은 힘들다. 메르시오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라미아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드는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은빛 송곳니와 수라검강이 섞인 난화십이식이 충돌하며 석실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메르시오가 라미아나 초인들을 직접 노리는 것쯤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는 이드였지만, 전투의 여파로 석실이 무너지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한 메르시오는 그만한 여력을 남기고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후두두둑.

“아쉽지만 존 워스는 포기해야겠네요.”

라미아는 기절한 어느 초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막아 내며 존 워스를 단념했다.

메르시오가 적극적으로 막아선다면 라미아도 손을 쓰기 힘들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전하게 오 조의 초인들을 수습하는 것이 나았다. 무엇보다 저렇게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상대를 극단까지 몰아붙일 경우, 어쩌면 되레 메르시오 쪽에서 존 워스를 죽여 버릴 수도 있다. 피해는 피해대로 보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으니 차라리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이 낫다.

이 혼란 중에 운 좋게 살아난다면 언젠가는 분명 다시 보게 될 테니, 그때 오늘 끝내지 못한 결말을 보면 된다. 어차피 이드나 라미아나 혼돈의 파편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깔끔히 돌아서는 라미아였지만, 그녀 앞에 선 발터는 달랐다.

“조원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오조 조장으로서, 청색 깃털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카리스마 있던 인상과 달리 깔끔하게 단념하지 못하고 말을 늘어놓는 발터에, 라미아는 굳이 더 듣지 않고 손을 들었다.

이드에게 배운 기초권공과 철황권은 폼이 아니었다. 은밀히 사각으로 이동한 주먹이 발터의 관자놀이를 두드린 것. 

“……”

라미아는 순간 눈이 돌아가며 쓰러지는 발터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기절에 좋은 슬립 마법이 있지만, 폭주에 대항하려고 단단히 정신 방법을 쌓아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굳이 주먹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건 아주 만족스러운 효과를 보였다.

발터를 질질 끌어 초인들 위에 던진 라미아는 순식간에 그 아래에 마법진을 깔아 초인들을 이동시켰다.

목적지는 지상에 만들어 놓은 대응 마법진.

수십도 아니고, 수백의 인원을 한꺼번에 옮기는 일은 황궁 마법사를 모조리 동원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라미아는 태연히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토벌대에 따라붙은 마법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비상 상황인 것을.

“거기다 나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지. 이드에게 달라붙을 기사들에 비하면야.”

부관주를 상대하며 보인 모습도 있지만, 이제부터 이어질 메르시오와의 전투를 알게 되면・・・・・・ 글쎄?

검후와 검왕을 최고 존엄으로 두고 존경하는 기사들의 베스트 순위가 바뀌지 않을까.

라미아는 자신들의 막사를 둘러쌀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상상하곤 부르르 떨며 마지막 초인까지 이동시켰다.

“여긴 모두 끝냈고.”

‘그럼 일리나와 다른 토벌대들도 부탁할게. 메르시오가 나타난 이상 정신의 관에 볼일은 더 없을 것 같아. 아, 적색 기사단도 잊지 말고!’ 탁탁 손을 터는 라미아에게 전해지는 이드의 말.

그렇지 않아도 일리나와 황녀의 위치를 찾던 라미아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내가 없다고 지면 용서 안 해요.”

협박을 가장한 응원의 말.

웅! 우우웅!

그러자 그 말에 이드가 답하기도 전에 일라이져가 몸을 떨었다. ‘내가 없다고’라는 라미아의 말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라미아라는 검으로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하, 걱정 마. 라미아에게 네가 약해서 졌다는 말, 절대 듣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우우웅!

그에 다시 몸을 떠는 일라이져.

기분 탓인가, 이드는 검신에서 뿜어지는 수라참마인의 강사가 더 힘차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우리 힘내서 메르시오를 좀 괴롭혀 보자!”

그에 기분이 좋아진 이드가 메르시오의 어깨 너머로 존 워스를 바라보았다. 메르시오가 라미아의 마법을 막기 위해 초인들을 노려 이드와

라미아를 괴롭혔는데, 이드라고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 마침 신경 쓰이던 초인들도 모조리 사라진 상태가 아닌가.

“어딜 보는 거냐!”

그런 이드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메르시오가 한층 더 강력하게 손톱을 휘둘러 왔다.

거기에 쩍 벌어진 입에서는 붉은 열선의 스칼렛 버스트가 폭발한다.

“진짜 눈치 하나는 늑대가 아니라 여우네, 여우. 그래, 어디 네가 얼마나 잘 막을 수 있나 보자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존 워스를 노리는 이드와 그걸 막아서는 메르시오.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 같은 전투가.

그렇게 싸움이 이어짐에 따라 이드의 기도도 점점 변해 갔다.

신경 쓰이던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보다 깊게 보다 자유롭게 보다 강렬하게.

하나의 초식에서 다음 초식으로 이어질 때마다 눈에 띄게 강력해지는 위력.

이드와 메르시오가 부딪칠 때마다 그 충격에 석실이 무너졌다. 이윽고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결국 석실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하아아압!”

“아우우우우!”

이드의 기합 소리와 긴 늑대 울음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콰르르릉!

붉은색과 은색의 마나 덩어리가 되어 버린 이드와 메르시오가 무너지는 땅속을 종횡무진 누비기 시작했다.

땅속을 날고 있음에도 두 사람의 속도는 느려지기는커녕 점점 빨라졌다.

어떨 때는 메르시오의 공격에 이드가 3개 층을 부수고 올랐고, 또 다음 순간엔 이드의 멸혼향에 가슴을 두들겨 맞은 메르시오가 5개 층을 무너트리며 처박히는 식이었다.

각 층이 워낙 넓고 커서 아직은 피해가 한정되었지만, 전투가 길어지고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피해 지역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결국 정신의 관이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정신의 관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푸스스스슥!

당장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사방이 흔들리고, 머리에서 흙과 돌이 떨어지는데 모를 수가 있겠냐는 말이다!

“타, 탈출이다! 모든 마법사는 긴급 이탈용 마법진으로!”

“자료는 이미 옮겼어. 중요한 것만 챙겨라!”

“나머지는 태워! 소각시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정신의 관 소속의 마법사들이다. 어차피 토벌대가 마지막 층에 도달하면 도망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임이 없었다.

반대로 그런 계획이 없는 토벌대는 우왕좌왕 생매장의 두려움과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만도 힘들 지경에 있었다.

쉴라가 이끌고 있는 일 조와 삼조 역시 마찬가지.

“당장 지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던전이 무너질 겁니다!”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나가는 데만도 며칠이 걸릴 겁니다!”

“그럼 어쩔 겁니까? 던전이 무너지는 지경에 아래로 내려가기로도 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그 태도는 뭡니까?”

“왜요? 생매장당하게 생겼는데, 예의라도 차리란 말입니까?”

소란이 사방에서 터졌다. 그러는 중에도 쉴라는 조용했다.

대신 그녀의 머리는 뜨겁게 탈출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라고 또렷한 방도가 있을 리는 없다.

‘최소한 황녀 전하만이라도 꼭 무사히 복귀하시도록 해야 한다.’

쉴라의 눈이 황녀를 향했다. 그러다 황녀가 손을 잡고 있는 일리나로 이어졌다.

혼란한 중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고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녀에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절대 그녀를 위험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도, 일리나의 능력이면 최소한 이 깊은 지하에서도 황녀를 보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령을 부리는 엘프니까.

그래도 일리나에게 다시 당부를 해야 할까 싶을 때였다.

화아아악!

“짜잔~! 기다렸죠?”

밝은 마법광과 함께 라미아가 나타난 것은 말이다.

“후작 부인!”

“라미아 님!”

뜨겁게 쏟아지는 눈길에 라미아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모든 목소리가 멈추자 말 대신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 보였다.

“이 위로 올라가세요. 그러면 지상으로 갈 수 있으니까.”

“오오! 후작 부인 만세!”

“라미아 님을 찬양하라!”

“후작 부인은 저희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눈물을 흘리는 기사까지 있었다. 그 중 특히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은 각국에서 파견된 귀족들이었다.

“살아 나갈 수 있겠습니다. 다행이에요. 다행”

“그런데 사무엘 백작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데.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찾아보시든가요?”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모래 더미.

그에 사무엘 백작을 걱정하던 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뭐…… 불행한 사고는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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