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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51화


987화

“옳은 말이오. 나도 그럴 것 같았소. 역시 저 늑대 놈이 문제인 게지!”

이름 모를 강자여~ 어쩌고 하며 존대를 할 땐 언제고, 이젠 늑대 놈이란다. 거기에 말이 이어질 때마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심지어 입가에는 침까지 흘리고 있다.

깔끔하던 탑주의 모습을 알고 있는 이드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화가 나는 거야 당연하더라도, 너무 급격히 끓어오르는 것이 절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아서다.

“탑주, 적을 앞에 두고 너무 흥분하는 건 좋지 못하오.”

“바이트 타블렛을 탈취당했고, 부관주 또한 저자의 손에 죽었소.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오. 그러나 걱정 마시오. 내 머리는 항상 얼음처럼 차가우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꺼낸 탑주의 말이다.

하지만 묘하게 초점이 흐려진 탑주의 눈동자를 보면 그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이드는 저 썩은 동태눈이 기억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초인들이 폭주하기 전에 딱 저런 상태였는데 말이야.’

다만 그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탑주는 초인이 아니었다.

이드는 문득 빼앗은 초인기를 사용해도 폭주가 일어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그는 탑주가 직접 초인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초인 마법을 만들고 미완의 마탑을 세운 탑주다. 특별한 초인기 한둘 챙겨 두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가정을 기초로 했을 때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초인의 폭주’와 ‘혼돈의 파편’ 사이의 연관 관계였다.

앞서 메르시오의 울부짖음에 반응한 초인들, 그리고 현재 탑주가 보이는 모습을 볼 때 관계가 없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이드의 머리를

두드린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서서히 눈이 돌아가는 탑주를 향해 메르시오가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크흐, 어리석은 마법사, 비켜라. 별의 의지에 먹혀 스스로의 의지조차 지키지 못한 병신 따위 상대하고 싶지 않다.”

메르시오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팔을 저었다. 파리를 쫓는 듯한 가벼운 손짓에, 태양에서 불어온 듯한 뜨거운 열풍이 일어났다.

그것에는 음울한 저주의 마나도 견디지 못했다.

탑주 앞을 막아선 촉수는 한순간에 바짝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탑주가 드러났다.

“멸망해야 할 오만한 자! 좋다.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직접 그 목을 따 주마!”

탑주는 메르시오를 맹렬히 노려보며 지팡이 위에 떠 있던 수정구를 가루로 만들었다.

반짝이는 가루는 떨어지지 않고 탑주의 손끝을 타고 움직이더니, 검의 형태로 뭉쳐 메르시오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미스릴로 만든 검으로도 벨 수 없는 지금의 메르시오다. 당연히 수정 가루로 만든 검 정도로 상처를 입힐 수는 없다.

메르시오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그의 주변을 격렬하게 맴도는 마나의 흐름에 걸려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어리석은 마법사. 이젠 사고할 능력마저 잃어버렸나.”

그에 메르시오가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자, 탑주는 미친 사람처럼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답했다.

“흐흐흐. 늑대 따위가 인간의 지혜를 어찌 알리오. 그것으로 베리타스가 네 마나의 맛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죽을 때까지 널 꽃을 것이다!”

치이이익!

그런 탑주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듯, 사방에 가득한 촉수가 동시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갑자기 늘어난 용해액이 줄줄이 떨어져 바닥을 녹이며 독한 냄새를 뿜어냈다. 그 모습이 마치 군침을 흘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 살짝 맛이 가 오롯이 메르시오에만 집착한 탑주가, 수정구를 통해 메르시오에 마킹을 한 것이었다.

모든 전력이 오직 그만을 노리도록.

우어어어!

그런 탑주의 뜻에 따라 베리타스가 없는 입을 대신해 온몸을 떨어 소리를 지르며 메르시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탑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대한 모래 폭풍을 소환하며 직접 공격에 나선 것이다.

“바이트 타블렛을 내놓아라! 샌드 스톰!”


“순식간에 구경꾼으로 밀렸네.”

미친 듯 달려든 탑주에 의해 다시 시작된 전투. 그에 옆으로 밀려난 이드가 곤란한 듯 말했지만, 말과 달리 표정은 싱글벙글이다. 자신의 전투를 빼앗기긴 했지만, 자신을 대신해 메르시오를 괴롭혀 준다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대신 이드는 메르시오의 말을 되새겼다.

‘별의 의지에 먹혀 의지도 지키지 못했다?’

별의 의지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의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내용을 볼 때, 폭주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즉, 이드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는 증거였다.

다만 메르시오가 왜 이런 중요한 일을 대놓고 흘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장은 이드에게 이렇다 할 이득이 없을지 몰라도, 이런 중요한 정보는 그 자체로 굉장한 가치를 가지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럼 점점 무작정 죽이기 힘들어지는데 말이지.”

‘별의 의지’만 해도, 메르시오가 아니라면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난감하다.

딱 봐도 탑주도 모르는 일 같고, 심지어 초인파의 발터는 폭주의 이유조차 모른다고 했다.

쿠우웅!

“겨우 마물 따위가 끼어들 곳이 아니다!”

퍼퍼퍼펑!

그러는 사이 메르시오와 탑주의 전투는 엉망진창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탑주는 광전사처럼 메르시오를 향해 달려들고, 지옥 출신 베리타스는 본능대로 촉수를 휘두르며 난리다.

그러는 중에 메르시오는 거대 신랑의 형태로 변해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중이다.

마법으로 힘과 본능만을 강림시켜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메르시오의 발톱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을 것이다. 하나 촉수가 부수는 족족 재생되어 끊임없이 메르시오를 괴롭히는 중이다.

언뜻 보면 비등해 보이는 전투.

그러나 이드의 눈에는 보였다. 메르시오를 막고 있던 결계가 점점 약해지고, 베리타스의 움직임도 느려지고 있다.

그나마 쌩쌩한 건 탑주 뿐인데, 그나마도 광전사 모드라서 그럴 뿐이었다. 저러다 진짜 힘이 떨어지면 한순간에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게 전부 상대가 메르시오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규격 외로 강력한 메르시오를 상대하기 위해 모두 한계 이상의 힘을 짜내야 했고, 그로 인해 빠르게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

이대로 두면 결계가 깨지는 순간 메르시오가 탈출할 수 있다.

“그럼 슬슬 개입해 볼까.”

말과 함께 중심을 낮추고 다리를 넓게 벌리는 이드다.

그 모습이 마치 로켓 발사대 같아 보였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의 주변에는 그런 감상을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뒤이어 허리 뒤로 넘어가는 이드의 주먹에 황홀한 빛을 품은 광혼이 어리며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빛이 뻗은 주먹에서 튀어 나가 막 탑주의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메르시오의 머리를 두드렸다.

떠떵!

그 덕에 탑주가 아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깨문 메르시오가 이를 갈았다.

“그러게 싸우던 상대를 버려 두면 쓰나. 이건 날 외롭게 한 벌이야.”

“귀찮다! 모두 타 버려라!”

상큼한 윙크를 날렸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달려드는 촉수를 무시한 메르시오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거대한 화염을 토해 냈다.

이드는 심상치 않은 열기에 한발 물러서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촉수들이 움직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처럼, 저들끼리 겹겹이 벽을 쌓아 화염을 막아 낸 것.

덕분에 천에 가깝던 촉수의 삼분의 일이 재가 되어 버렸다.

“멍청한 마물인 줄 알았더니, 같은 편은 알아보는 모양일세?”

설마하니 촉수가 탑주뿐 아니라 자신도 보호할 줄이야. 뜻밖의 아군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드다.

“네가 주인보다 낫다. 그럼 잠시지만 우리 호흡을 좀 맞춰 볼까.”

우우우우!

그때부터다. 이드와 촉수는 나름 합을 맞추며 메르시오를 몰아붙였다.

메르시오가 촉수를 파괴할 때면 이드가 막고, 이드가 공격받을 땐 촉수가 메르시오의 공격을 막았다.

“커허허헝! 이 빌어먹을 미물 따위가!”

제법 손발이 잘 맞는 합공에 메르시오가 짜증을 참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디스페이스!”

그리고 그런 메르시오를 공격하는 탑주. 문제라면 전투의 맥을 끊어 먹는 탑주의 개입에 그가 소환한 베리타스까지 한탄할 정도라는 점이다. 우우~ 우우우~

그리고 기어코 망둥이 같은 탑주의 개입이 결정적인 틈을 만들어 버렸다.

“디스맨틀!”

뜬금없이 튀어나온 해체 주문.

경우에 따라서는 산 채로 몬스터를 해체해 버릴 수도 있는 마법이지만, 어디 저 딴딴한 메르시오에 통할 마법인가.

오히려 주변 일대의 촉수들이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베리타스의 소환자였기 때문에 영향이 큰 듯, 재생하던 촉수까지 해체되며 순식간에 베리타스 전력의 절반이 증발해 버렸다.

“저런 미친!”

너무나 어이없는 행동에 이드가 기가 막혀 하는 사이.

“크하하하! 멍청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광소를 터트린 메르시오가 발톱으로 바닥을 그었다.

그에 바닥이 돼지 배를 가른 듯 쩍 벌어지자 발을 넣어 틈을 벌리더니, 그 안에 청백 화염을 쏟아부었다.

안으로 쏟아진 화염은 순식간에 내부를 녹이고, 단숨에 중심핵까지 닿았다.

“냄새나는 입 좀 다물어!”

빠바박!

순간 달려든 이드가 쏟아 내는 공격에 메르시오의 화염이 멈추기는 했지만, 그땐 이미 중심핵의 상당 부분이 망가진 상태였다. 우우우!

고통이 느껴지는 울림과 함께, 단단하던 바닥이 출렁였다. 곧 그 사이로 화염에 녹아 버린 내용물이 붉은 용암이 되어 흘러나오며 폭발했다. 퍼펑!

마치 바닥 전체가 지뢰밭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상황.

그에 가장 먼저 당한 것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탑주다.

“크윽!”

바로 발아래서 터져 나온 용암에 튕겨 나간 탑주. 그러나 아티팩트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은 모습이다.

대신 충격 때문인지 흐려져 있던 그의 눈에 맑은 빛이 살짝 떠올랐고,

퍼억!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자신이 했던 멍청한 행동에 바닥을 쳤다.

그 충격에 주먹에 피가 흘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깟 상처보다 완벽하다 여겼던 초인 마법에 나타난 부작용에 마음이 더 아팠다.

그는 급히 일어나 지팡이를 들었다.

멍청한 짓거리를 벌인 건 이미 지나간 상황이고, 중요한 건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저 괴물과 떨어지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저 괴물 중 하나, 또는 둘 다 자리를 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의견에는 괴물 역시 반대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괴물과 싸우고 있는 이드였다. 비록 정신이 없는 상태지만, 이드가 메르시오를 잡으려 한다는 것은 그간의 싸움을 통해 충분히 깨달은 탑주였다.

그건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일.

“설마 공간 분쇄를 탈출용으로 쓰게 될 줄이야.”

입술을 질끈 깨문 탑주는 짧은 욕을 뱉어 내고는 정해진 주문을 외웠다.

굳이 그가 던전을 부상시킨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이드와 메르시오의 탈출을 막고, 바이트 타블렛을 빼앗기 위해서다.

그 방법으로 궁리하고 있던 것이 차원 분쇄다.

현재 전 대륙의 마법사들을 괴롭히고 있는 차원진을 증폭시키고, 시공을 상쇄시킬 경우 반응이 일어난 공간은 그대로 무너지며 시공간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이때 그 안에 있던 존재 역시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함은 물론이고, 소유하고 있는 공간 계열의 아티팩트가 있다면 그 역시 숨기고 있는 공간이 연쇄 붕괴를 일으켜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쏟아 내게 되어 있었다.

탑주는 바로 이걸 노리고 있었다.

이드나 메르시오가 아공간에 바이트 타블렛을 숨기고 있다면 강제로 토해 내게 만드는 것 말이다.

물론, 이제는 그 방법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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