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68화
1004화
막 자정이 넘은 늦은 밤. 기익.
은밀하게 찾아든 발걸음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침대에 기대앉아 서류를 살피던 발터가 태연하게 고개를 들어 이 예의 없는 침입자에게 말했다.
“기본예절도 모르나? 노크 정도는 배워라, 라울 자작.”
“・・・・・・ 예의 타령을 하는 걸 보니 큰 부상은 없는 것 같구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남자는 바로 라울이었다.
하긴 그가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발터의 방에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설 수 있을까.
토벌대 안에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던 놈이 진지한 얼굴이라니. 그만해라. 안 어울린다.”
“죽을래? 그게 볼 때마다 무게감 있게 행동하라고 노래를 부르던 놈이 할 말이냐?”
불만스럽게 말하는 라울.
그러나 말과는 반대로 표정은 한결 풀어져 있다.
퉁명스러운 발터의 저 말투가, 그가 진짜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지한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지. 그보다, 네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당연히 직접 와야지.”
털썩.
의자 하나를 침대 옆으로 끌어와 앉은 라울이 말을 이었다.
“이런 초대형 사건에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 움직이란 말이야?”
“분명 규모가 크긴 하지.”
순간 던전 안에서의 일들이 머리를 스친 발터는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내려두곤 돌아앉았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라울이 물었다.
“그럼 설명해 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이 왜 필요하지? 중요한 정보는 이미 바벨에 알렸다. 너도 그걸 들었으니 급히 달려온 것 아니냐?”
“흥, 짧은 보고서 몇 장으로 뭘 알 수 있는데? 난 진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밟혀야 할 마탑이 발목을 물었고, 손잡기로 했던 소드 팰러스 놈들은 부리던 마탑과 손잡고 배신을 때렸다고”
“훗, 소드 팰러스 놈들의 배신이야 특이할 것도 없잖아. 놈들이 매번 하던 짓이니까. 오히려 못 믿을 놈들을 믿고 경계하지 않은 게 잘못이지.”
발터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 비난과 질책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래, 둘 다 너무 만만히 본 우리 실수다.”
“우리?”
발터가 노려본다.
“……아니, 내 실수. 됐냐?”
똥 씹은 얼굴로 말을 바꾸는 라울이지만 내심 억울했다.
소드 팰러스와 마탑이 손잡는 일은 바벨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마탑은 소드 팰러스와 바벨의 지원을 받아 운영된다. 그러다 보니 마탑은 두 세력의 부하 아닌 부하 같은 포지션에 있었다.
마탑의 꿍꿍이를 포착하고 토벌을 통한 징계를 결정한 것도 이런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드 팰러스와 마탑은 이걸 뒤집고 손을 잡았다. 왕과 신하가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벨에서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런 건 모두 부질없는 변명일 뿐이다. 결국 모든 건 방심이 불러온 참사일 뿐인 거다.
“으득. 필요할 때만 기사도를 들먹이는 개자식들. 아무리 그래도 철벽의 검왕까지 나설 줄이야. 그 인간, 직접 상대해 보니 어땠어?”
“강해. 공격이 약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상대적으로 방어가 너무 단단해서일 뿐이야. 중간에 명예 후작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지금 이렇게 너와 마주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다.”
자존심도 내려둔 솔직 담백한 감상이다.
라울은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토벌전이 있기 전, 이드와 부딪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예 후작이라. 적으로 둬야 할지, 아군으로 끌어와야 할지. 애매해 심정 복잡하구만.”
덕분에 발터와 함께 토벌에 참여한 많은 초인 기사들이 살았으니, 큰 도움을 받은 건 맞다.
‘그렇다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이드와 은색 기사단으로 인해 입은 피해가 없더라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검후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납치범과 납치범의 가족쯤 된다고 해야 할까?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건 네가 고민할 일이지. 미리 말해 두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면 난 빠질 거다.”
“은혜 갚기냐?”
“그보단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보고서 봤으면 알 텐데? 메르시오라는 괴물과 싸울 때 확인된 명예 후작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설마 저 발터가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할 줄이야.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에 라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쩡해 보이더니, 사실은 머리를 다친 거였냐?”
“……”
“알았어. 노려보지 마라. 그 정도로 강한 거냐?”
“강하다.”
“젠장. 골치 아픈 게 한둘이 아닌데. 뭐,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 명예 후작은 일단 뒤로 두고. 메르시오라는 게 그놈이지? ‘크리쳐’.”
“나는 확신한다.”
어떤 일도 대충 하는 법이 없는 발터의 대답이다. ‘나는’이라고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혔지만, 그를 강하게 신뢰하고 있는 라울에겐 사실이나 다름없이 들렸다.
무엇보다 크리쳐에 관한 문제다.
폭주 현상이 발생한 초기, 아무도 그 원인을 몰랐다. 한번 폭주 사태가 발생하면 생존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물게 생존자가 있더라도 대부분 당시의 기억이 없거나, 희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차례 폭주 현상을 겪으며 단편적이지만 정보가 쌓여 원인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바벨에서는 그것을 크리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 부르게 된 이유는, 원인이 된 존재를 하나로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처럼 웨어 울프일 때도 있지만, 사람일 때도 있었고, 그 형태가 불분명한 유령 같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확인된 정보를 토대로 크리쳐에 대해 파고들어도 봤지만, 얻은 것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 보기에는 아직 정보가 너무 적었던 탓이다.
가까이 있을 경우 초인들이 폭주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크리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바벨은 폭주의 원인인 크리쳐를 뒤로하고 폭주 그 자체를 막는 방법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한데 오랜 시간 알 수 없는 천재지변 정도로 취급되던 그 크리쳐의 이름과 정체가 너무도 쉽게 밝혀지고 말았다. 다름 아닌 이드가 황녀를 통해 꺼내 놓은 정보에 의해서 말이다.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론 어이없군. 크리쳐의 정체가 백 년 전 과거의 괴물이었다니. 세상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야. 황당하다.
황당해.”
라울은 황당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만큼 머리가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당연했다.
버서커라는, 초인의 가장 큰 난제의 원인에 대한 정체가 밝혀졌다.
그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일 것이다.
다만 발터에겐 그저 정신 사나운 모습일 뿐이었다.
“시끄러우니 적당히 좀 닥쳐라. 그리고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돌아가.”
“빌어먹을 아이언 마스크! 크리쳐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아무런 감상도 없어? 까딱 잘못했으면 버서커가 될 뻔했으면서!”
“흥분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잘났다. 빌어먹을.
남 이야기하듯 덤덤한 대답에 라울은 가슴을 두드렸다.
친구로는 나쁘지 않지만, 대화 상대로는 영 좋지 않았다.
“볼일 끝났으면 돌아가라.”
거기에 말끝마다 돌아가라고 하니, 섭섭할 정도다. 발터는 이미 고개까지 돌려 옆에 뒀던 서류를 보는 상태.
“볼일 끝나면 가라고 안 해도 갈 테니, 등 떠밀지 마라.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
“제일 급한 건 제국이 보관하고 있다는 혼돈의 파편에 대한 기록이다. 그걸 확보해야 해. 그 후에는 명예 후작의 행방을 알아봐 줘.”
그 말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벨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반드시 라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벨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제국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는 대륙에 살아가는 초인들을 위해 바벨에 협력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도 없다.
“기록은 문제없다. 다만 명예 후작의 행방을 쫓긴 어려워. 제국에 충성하는 사람도 아니니 행적을 알리지도 않을 거고.’
“알아. 하지만 은색 기사단과 함께 있고, 황녀를 통해서 메르시오의 정체를 밝힌 걸 보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야. 명예 후작이 크리쳐를 쫓아간 이상 그의 행적은 꼭 확인해야 해. 크리쳐를 잡을 절호의 기회야. 절대 놓칠 수 없지. 절대로.”
수십 년 바벨의 염원 때문인가. 메르시오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라울이었다.
발터 역시 초인으로서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봤다.
“크리쳐도 중요하지만, 소드 팰러스와 마탑의 문제도 잊으면 곤란해.”
“걱정 마. 벌써 경계 레벨을 올려 두었으니까. 거기에 네가 복귀한 후 존 워스의 문제를 꺼내면 소드 팰러스도 대응하느라 한동안 정신없을 거야. 정신의 관이 붕괴된 마탑은 두말할 것도 없고.”
걱정도 사서 한다며 건성으로 손을 젓는 라울.
크리쳐에 비하면 소드 팰러스와 마탑의 중요도는 한 단계 아래가 될 수밖에 없고, 검후는 또 그보다 한두 단계 더 아래가 된다.
버서커를 해결할 또 다른 단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라울의 장담과 달리 같은 시각, 마스에서는 타란 백작이 쉐어 가든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달리고 있었다. 바벨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관계자는 모두 감금하고, 그 외의 초인들은 이 일을 알 수 없도록 조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평소의 라울이나 그의 비서진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람이 한둘 움직인 것도 아니고, 곳곳에 포진해 있는 초인들과 거미줄처럼 이어진 바벨의 라인은 이런 이상 흐름을 놓칠 정도로 어리숙하지도 않았으니까.
문제는 정작 그런 문제를 잡아내야 할 라울과 비서진의 정신이 온통 크리쳐에 가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태양에 가린 달빛처럼.
이번에야말로 발터에게 제대로 멱살을 잡힐 만한 실책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발터와 라울 두 사람 모두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이 짧은 인사로 헤어질 뿐이다.
비올라를 지하실 방에 박아 두고 올라온 이드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하지 못했다. 은색 기사들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전부 예민한 상태네. 날 선 기세가 저택 밖으로까지 흐르겠어.”
“실제 숫돌로 검날을 세우는 기사분도 한둘이 아닙니다.”
“……”
“아니, 그냥 가볍게 농담한 거 가지고 왜 그렇게들 보세요?”
싸늘하다 못해 경멸스러운 눈길에 에단이 쭈그러들고, 마침 선배들의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던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이드를 발견하고는 급히 다가왔다.
“내려오셨어요, 조장님!”
“토벌이 끝났으니, 더 이상 조장은 아니야.”
“그럼 마스터!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선배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요.”
“스폴 경과 쉴라 단장님께 무슨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저래요.”
구원을 요청하는 케마란의 말에 네리베르가 보충했다.
그에 이드는 쉴라와 스폴 두 사람이 검후에 대한 일단의 정보를 기사단에 알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지금 같이 온 기사들은 모두 믿을 만하다는 거겠지.’
케마란과 네리베르에게 알리지 않은 건 둘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 분위기는 곤란했다.
저렇게 기세가 날카로워서야 이후 어떤 일에 나서도 눈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보자…………… 밥은 먹었니?”
잠시 궁리하던 이드의 뜬금없는 질문에 해법을 기다리던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고개가 기울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