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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70화


1006화

영문을 모르던 스폴은 곧 자신의 변화를 깨달았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치맛자락처럼 살랑거리는 검화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서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결국 스폴은 야식을 포기하고 수련장에 남았다.

아무리 야식이 맛있어도 지금은 새로 얻은 깨달음을 소화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과 함께.

옳은 말이었다.

무인에게 무공의 상승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무인과 기사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해도, 무력을 중요시하는 것은 다르지 않으니까. 그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드는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제일 맛있는 요리는 충분히 남겨 둘 테니까, 맘껏 수련하다 들어와요.’

“기대할게요~”

어느새 검후로 인한 분노도 잊어버렸는지, 평소처럼 명랑한 스폴의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대련장을 나와 그 소리가 멀어졌을 때, 이드는 기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쉴라를 볼 수 있었다.

“스폴 경이 깨달음을 얻어서 기분이 좋으신 것 같네요?”

“그녀의 성장은 곧 은색 기사단의 성장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전력이 상승했다는 건 기쁜 일이죠. 이게 다 명예 후작님 덕분입니다. 은색 기사단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쉴라 경의 말대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전력이 상승한 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 감사 인사는 접어 두세요. 어차피 검후를 구출할 때까지 은색 기사단과 우린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면서 주먹을 들어 보이는 이드.

쉴라는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혔다.

이번 스폴의 깨달음을 포함해, 그간 은색 기사단이 이드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 가벼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기사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고, 은색 기사단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검후에 관련된 일, 또는 소드 팰러스의 일이었다.

그 모든 도움을 계산해서 갚으려면 까마득할 정도다. 그런데 이드는 이걸 가족이란 말로 넘기려 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는 뜻과 같다.

쉴라는 그 행동이 정말 고마웠다. 그렇다고 정말 마음에 담지 않을 생각은 없다. 오히려 마음 깊이 담아, 갚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릴 생각이다.

‘이번에 검후님을 구출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니. 이런 생각은 말자.’

잠시 후 이드와 쉴라가 저택으로 들어섰다.

둘은 그러자마자 침샘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와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 중인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드는 귀에 익은 음악에 내심 라미아의 센스를 칭찬했다.

지구의 음악을 들려 줄 사람이 그녀 말고 누가 있겠는가.

“다들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해서 준비한 야식입니다. 약한 술도 준비했는데, 기사들을 나무라진 말아요.”

이드는 혹시나 쉴라가 기사들을 탓할까 싶어 말했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오히려 고마워하는 쉴라였다.

“당연한 말씀이세요. 오히려 저희들 대신 부하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물론 쉴라도 다 생각하고 하는 말이다.

문제 될 여지가 있는 술기운도 십 분 정도면 대부분 날려 버리는 것이 가능했고, 가장 큰 문제인 기습도 이드가 함께 있는 이상 별걱정 없을 것이라고 판단이 끝난 상태인 것이다.

“좋네요. 그럼 가서 우리가 가서 먹어 보죠. 여기 준비된 음식 중에는 그레센에 없는 것도 많거든요.”

“호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이드의 말에 적당히 기대하는 리액션을 보이는 쉴라.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영혼이 부족해 보이던 리액션과 달리, 기적 같은 음식들을 앞에 두고 드물게 식탐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술이 전혀 소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 술 대신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는 검은 음료에 홀딱 반한 상태였던 것!

라미아가 특별히 내놓은 지구산 탄산음료는 대호평을 받았다.

그와 함께 꺼내 놓은 건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새벽까지 검을 휘두르고 돌아온 스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몫으로 준비된 음료를 누군가 슬쩍 해 버린 탓이다.

“누군지 몰라도 잡히면 죽인다!!”

“・・・・・꺼어어억!”


모두 좀 더 편해진 마음으로 밤을 보낸 다음 날.

이드들은 다시 쉐어 가든을 향해 움직였다. 아침부터 한데 모여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이거다 싶은 안이 나오지 않아 결국 가까이서 쉐어 가든을 살펴보기로 한 것. 덕분에 애써 준비한 용병패를 다시 꺼내게 된 스톤은 제법 기뻐했다.

쉐어 가든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쉐어 가든은 일대에 유명한 관광지였기 때문이다.

처음 쉐어 가든을 내어 준 후작 부인을 기려 만들 때부터 정원처럼 가꾼 까닭도 물론 있지만, 세상 누가 봐도 특이한 내성 역시 확실한 볼거리였기 때문이다.

라미아는 이번에도 새의 형태를 하기로 했다. 라미아를 머리에 올리고 일리나와 함께 쉐어 가든을 둘러본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상한 곳은 내성뿐인가.”

“비밀 통로 같은 건 없는 것 같아요.

“비밀을 속삭이는 정령도 없어요.”

소곤거리는 세 사람의 대화에 호위인 척 뒤를 따르던 에단이 푹 하고 웃고 말았다.

“왜?”

“아닙니다. 그냥 분위기 좋아 보이는 연인이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의심받을 일을 한 건 없지만, 혹시라도 누가 듣게 되면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만한 내용들에 에단이 걱정을 하자 이드가 혀를 찼다.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뭐가 멀었단 말씀입니까?”

“당연히 듣지 못하게 조치했지. 지금 하는 이야기도 너만 들리도록 한 거고. 너만 아니었으면 굳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고. 벌써 돌아다닌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그걸 아직도 눈치 못 챈 네가 문제지.”

“그거야…… 세 분의 방법이 너무 절묘하다 보니?”

“우리 바로 옆으로 지나간 사람들이 한 둘이냐?”

“흠흠. 슬슬 약속한 시간입니다. 모이기로 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에단이지만, 시간이 된 것도 사실. 눈을 가늘게 뜨던 이드도 곧 발길을 돌렸다.

그렇다고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다.

“이번 일 끝나는 대로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수련에 합류해 같이 굴려 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애들하고 같이하는 건 좀.

에단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드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이다. 그도 무공을 익히고 있고, 더 강해지고 싶은 욕심도 있으니까. 하지만 케마란이나 네르베르와 함께 구르는 건 체면 문제다.

“뭐, 그게 싫으면 일대 일로 굴려 줄 수도 있고?”

순간, 고개를 끄덕이려던 에단은 오랜만에 뛰쳐나온 생존 본능의 격렬한 외침에 급히 입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소드 팰러스에 있을 때 이드의 가르침이 어떠했던가?

그걸 떠올린 에단은 나오려던 말을 삼키고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닙니다. 수련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맛이 나죠. 두 후배들과 함께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에단은 그 이상은 듣지 않겠다는 듯 척척 앞장서서 이드를 안내하기 시작했고, 이드와 일리나는 그 모습을 보곤 킥킥거리며 웃고 말았다 잠시 후 이드는 제법 비싸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셋으로 나뉜 일행이 다시 모이기로 한 장소로, 검은 돌에선 이 식당의 별채를 통째로 빌려 놓았다.

“다른 분들은 아직 오지 않으신 것 같네요. 일단 제가 가서 간단한 디저트라도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별채를 확인한 에단이 식당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항시 대기 중인 직원이 할 일이지만, 계약할 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을 걸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대신 그런 점만 제외하면 별채는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애초에 귀족이 아니면 이용하기 힘든 금액 때문인지, 모든 편의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고, 고급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빌리면 의심받는 거 아닐까 몰라요?”

“그럴 리가. 관광객이 한둘도 아니고, 별채를 빌린 사람이 어디 우리뿐이겠어?”

라미아의 걱정에 그럴 일 없다며 일축하는 이드다.

그게 아니라도 검은 돌과 에단이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곧이어 에단이 돌아왔다. 그 뒤에 쟁반을 든 직원들이 함께했는데, 쟁반 위에는 향이 진하지 않은 차와 쿠키 등의 디저트가 있었다. 디저트에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일리나였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쿠키를 바삭바삭 깨물어 먹었다.

채식에 소식을 할 거라는 이미지와 달리, 달콤한 디저트에 대한 식탐이 있는 모습이다.

이드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실로 훌륭한 팔불출의 정석이다.

잠시 침묵을 즐긴 뒤 이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성에 대한 공략법 말이야. 타초경사에 성동격서를 섞어 보면 어떨까?”

내성에 대해서는 전날 침입 루트가 없다고 결론이 난 상태였다. 그건 오늘 재차 확인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했다. 얼마나 철저한지 하나쯤 있을 만한 비밀 통로조차 없어 치를 떨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쪽이 아니라 저들이 움직이도록 하자.

이드의 말은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타초경사? 성동격서? 그게 뭔가요?”

마침 별채로 들어서던 쉴라도 그 말을 들은 듯 궁금해했다.

그 뒤로 용병패의 정보에 따라 복장을 바꾼 스폴과 스위트, 셰인이 따라 들어왔는데, 그녀들의 관심사는 쉴라와 조금 달랐다. 

“우와, 디저트, 맛있겠다!”

“여러분 것도 있으니까. 같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일리나의 말에 순식간에 그녀의 곁으로 모여드는 세 사람.

쉴라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부르르 떨어야 했다.

“너희들・・・・・”

이드는 그런 쉴라에 따뜻한 위로의 차를 건넸다.

“마셔요. 돌아본 건 어땠어요?”

“……감사합니다. 아깝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차 대신 냉수를 단숨에 비운 쉴라가 고개를 저었다.

눈이 빠질 정도로 쉐어 가든을 살폈지만, 은밀히 침입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나.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라미아와 일리나가 살핀 바로는 비밀 통로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이어 이드는 타초경사와 성동격서의 책략에 대해서 간단히 알려 주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즉, 마스의 전력을 미끼로 이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쉴라.

과연 은색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할까.

타초경사와 성동격서에 담긴 뜻을 설명한 것만으로 마스에서 검후를 빼앗기 위해 준비한 타란 백작을 이용하려는 것까지 추측해 내는 모습이다. 거기에 더해 비슷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고?

두 사람이 생각한 계획은 비슷했다.

세세한 부분은 달랐지만, 안에서 움직인다는 기본 뼈대는 같았다.

그에 이드는 두 계획을 수정하며 하나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틀이 잡힐 무렵,

“타란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별채로 들어선 스톤과 에린이 급하게 소식을 전해왔다.

이드는 아직 남은 해를 보며 물었다.

“벌써 말입니까?”

예상했던 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빠른 도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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