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73화
1009화
기다리던 명령서를 받아들었기 때문인가. 야영지의 분위기가 변했다. 상관의 기분에 민감한 부하들이었는지, 타란 백작을 따라 기사들의 반응이 변한 것이다.
그로 인해 미열같이 은근하지만, 실체가 있는 흥분과 긴장감이 흘렀다.
이러한 분위기의 변화는 분명했으나, 눈치채기 쉽진 않았다.
그러나 감시의 전문가들이 볼 때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던 모양이다. 멀리서 감시 중이던 검은 돌의 요원은 그런 특이 사항들을 즉시 보고했다. 이십 분이 지나지 않아, 손에 들어온 보고서를 본 이드가 에린을 보며 말했다.
“이쪽에서 흘린 정보가 도움이 됐나 보군요.”
“좀 전 보고에 따르면 효과가 매우 강력했던 것 같습니다. 왕실에서 긴급 회의가 몇 번이나 열렸다고 하니까요.”
그러면서 지난 밤 마스 왕실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는 에린이다.
이드는 그 모습에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어째 정보가 한층 자세해진 것 같은데요?”
전날 보고가 외부에서 왕실을 지켜보고도 취합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오늘은 분명 내부에서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깊은 내용들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왕실에 사람을 넣을 정도로 검은 돌의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내부 정보력만으로 왕실의 정보를 얻기는 어려워 정보 길드에 미리 의뢰를 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급히 진행하다 보니 미리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에린이지만, 이드는 오히려 만족했다. 그는 일을 맡기면 그 실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권한을 주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부하가 바랄 만한 주군이랄까.
물론 부하의 능력이 주군을 뛰어넘거나, 선을 넘는 월권행위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누가 감히 이드의 권위에 도전할까.
이드는 그저 에린의 스마트한 일 처리에 만족할 뿐이었다. 오히려 이번 일 처리를 보고 검은 돌을 영입하려는 마음이 더 굳어지기까지 했다.
“원활한 일 처리를 위한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요. 오히려 잘했습니다. 그럼 회의 내용도 얻은 겁니까?”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을까. 이드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에린이 말을 이었다.
“회의 내용까지 손에 넣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파라켈 후작에 대한 감금이 풀린 듯하다는 보고입니다. 아무래도 검후님을 탈취하기 위해 타란 백작을 파견한 일에 협조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스를 택하기로 한 모양이군요.”
“후작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검후님이 관련되었으니까요.”
끝까지 협조를 거부한다면 마스의 이익보다 바벨을 우선한 것이 된다. 그건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다.
왕실에 감금된 상태로 그런 선택은 죽겠다는 것과 같으니, 살기 위해선 마스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파라켈 후작이 협조하기로 했다면 쉐어 가든에서 검후를 빼내는 일도 의외로 쉽게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일.
타란 백작도 더 이상의 변수가 있기 전에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 오늘 중으로는 분명 움직이겠군요.”
“마음이 급할 테니, 어쩌면 이미 출발했을지도 모르죠.”
옆에 앉아 있던 라미아가 말하자 에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기사들을 준비시킬까요?”
스폴이 말했다. 깨달음을 얻어 한 단계 성장한 영향으로 배부른 고양이처럼 여유를 부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번뜩였다.
과연 본래 성격이 그렇게 쉽게 변할 리가 있다.
당장 이드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비올라가 비웃고 나섰다.
“쯧쯧, 머리 좀 씁시다. 그거 뒀다 장식으로 쓸 거야? 오크처럼 성격만 급해서는.”
“어쭈~ 너 단장님하고 데이트 그만하고 싶어?”
스폴이 턱을 치켜들고 툭 던진 말에 비웃음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이 벌게진 비올라가 쉴라를 힐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이거 하고 무슨 상관이야!”
“흥, 반응을 보니 데이트는 다시 하고 싶은 모양이네. 그럼 헛소리 말고 얌전히 닥치고 있으시지?”
“으…..”
그러자 부들부들 떨면서도 입을 닫은 비올라다.
그 모습에 이드를 포함한 여럿이 흥미를 보였다.
청개구리처럼 모든 일에 퉁퉁거리던 비올라가 저런 말을 듣고서 얌전히 입을 닫을 줄이야.
순간 혹시 하는 생각을 떠올린 사람들이 쉴라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런 장난에 어울릴 생각이 없다는 듯 보고서만 뒤적이고 있을 뿐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을 따라 몰래 쉴라를 훔쳐본 비올라가 실망에 어깨를 떨어트릴까.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설마 저 비올라가 진짜 쉴라 경에게 호감을 가졌을 줄이야!’
거기에 스폴은 벌써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고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작 또 다른 당사자인 쉴라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갈 길이 구만리에 험해도 너무 험해 보인다. 비올라야’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올라를 향해 동정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스폴이 다시 은색 기사들의 준비에 대해 물었고, 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은색 기사단은 저택에 계속 대기야.”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후에 출발해서는 늦습니다. 지금 출발해서 주변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폴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저택에서 쉐어 가든까지는 절대 짧지 않다. 까딱 잘못하면 일이 끝난 후에 도착해서 손가락만 빨아야 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우리 말고도 어딘가에서 쉐어 가든을 지켜보고 있을 놈들이 있다는 거야. 은색 기사단이 쉐어 가든 주변에 가면 놈들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높아.”
이건 복장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얼마나 있을까. 또 있다고 해도 은색 기사단처럼 뛰어난 실력의 기사만 모은 기사단은 없을 것이다. 용병으로 위장해도 그건 마찬가지.
“그렇지만 그래서는 저희가 싸워야 할 때 싸울 수 없지 않습니까.”
스폴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자, 이드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라미아가 있는데 그게 무슨 걱정이야? 라미아가 우릴 마스로 옮겨 줬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아!”
순간 한 박자 느리게 손뼉을 치는 스폴이다.
이드의 말대로 제국에서 마스로 은색 기사단을 통째로 옮겨 온 라미아다. 그걸 생각하면 저택에서 쉐어 가든의 거리가 무슨 문제가 될까. 아니나 다를까. 이드의 말에 맞춰 라미아가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쉐어 가든 주변에 이동에 필요한 대응 마법진도 묻어 뒀죠. 언제든 말만 하면 바로 이동할 수 있어요.’
“도대체 언제 그런 작업을?”
“어제 쉐어 가든에 방문했을 때 처리했죠.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 금방 끝냈어요.”
“오~!”
짝짝짝.
“역시 대단하구나. 비올라 이 자식은 한나절 꼬박 땀을 뻘뻘 흘리고야 끝날 일인데.”
“닥쳐!”
박수 사이로 쓸데없는 잡음이 꼈지만, 당사자들 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대신 한마디도 하지 않던 쉴라가 입을 열었다.
“기사단의 이동을 라미아 님이 도와주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안 들리는 듯하더니,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비올라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을까 싶지만, 과연 그녀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이 자리에 없는 듯하다.
그런 용기가 없기는 이드 역시 마찬가지. 이드는 스톤과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전투는 은색 기사단에게 맡긴다고 해도, 쉐어 가든을 감시하는 일도 무시할 수는 없지. 그걸 검은 돌과 트와이스에서 맡아 줘야겠습니다.”
“어차피 하던 일이니, 문제없습니다.”
“저희 트와이스도 언제든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트와이스는 검은 돌의 지원을 받아서 쉐어 가든 내부를 살펴 주고, 인원이 많은 검은 돌은 쉐어 가든 밖을 살피도록 합시다. 에린 양의 예측이 옳다면 미완의 마탑이, 그게 아니라도 소드 팰러스나 혼돈의 파편 쪽에서 어부지리를 노리며 어디선가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꼭 찾아내야 하오.”
강조에 강조를 더하는 이드의 당부에 스톤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그가 정식 임무에 들어갈 때의 눈빛이었다.
“문제없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든, 있기만 하다면 저희 검은 돌이 찾아낼 것입니다.”
“검은 돌의 실력은 신뢰하고 있소. 그러나 만만한 놈들이 아니니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적을 찾기 전에 이쪽이 먼저 들키면 저들이 선수를 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진짜 최악은 따로 있다.
마스를 움직인 후에 숨어 있는 것이 혼돈의 파편일 경우다. 검은 돌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혼돈의 파편을 찾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혼돈의 파편에 보기 좋게 이용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나마 차원의 인이 조용한 걸 보면 쉐어 가든 주변에 혼돈의 파편은 없는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차원의 인의 신호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원의 인이 메르시오에게는 반응했지만, 혼돈의 파편 중 하나로 의심되는 존 워스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차원의 인에 걸리지 않는 혼돈의 파편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렇게 각자 할 일을 받고 난 뒤다.
평소라면 명령을 받은 즉시 실행에 나섰을 스톤과 에린이 나가지 않고 돌연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대강 짐작되는 것이 있는 이드는 놀라지 않고 이어질 두 사람의 말을 기다렸다.
“저희 검은 돌에서 명예 후작님께 한 가지 요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듣고 있소.”
“저희 검은 돌은 명예 후작님의 의뢰를 받은 후 일을 진행하면서 명예 후작님을 크게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비록 천한 일에 몸담고 있으나, 아이와 부녀자에 대한 부당한 의뢰는 받지 않은 것을 자랑삼아 부끄럽지만 명예 후작님께 요청드립니다. 부디 저희 검은 돌을 거두어 주십시오.”
“명예 후작님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다할 것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스톤과 에린이 번갈아 가며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과연 예상대로의 전개에 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새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다만 그간 함께한 정 때문일까. 검은 돌의 속내를 전했던 에단과 트와이스의 기사들이 이드가 그들을 받아 주었으면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어디까지나 이드가 결정할 일이라는 것을 아는지 뭐라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조용한 가운데 이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은 돌의 생각은 이미 에단을 통해 들은 바 있소.
“감히 명예 후작께 먼저 받아 달라 요청 드리기가 두려워 얕은 수작을 부렸습니다.”
“그건 상관없소. 그 전에 묻겠소. 내 적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오.”
꿀꺽.
순간 스톤과 에린의 목이 크게 울렁였다.
사실 오늘 이렇게 머리를 숙이기 전 가장 큰 고민이 이드의 적에 대한 문제였다.
소드 팰러스에, 미완의 마탑, 그리고 혼돈의 파편이라는 미지의 존재까지. 어느 하나 만만한 존재가 없었다. 개중 한 단체만 나서도 검은 돌은 순식간에 부서지고 말 그런 강력한 힘이 있는 단체였다.
그에 반대하는 의견도 당연히 나왔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제 눈앞의 그들로 인해 시끄러워질 대륙이다.
과연 이드 아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관계없이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에린의 질문에 반대 의견은 힘을 잃었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차라리 시끄러워질 대륙이라면 강력한 이드의 이름 아래 보호를 받자!”
“……”
반대 의견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