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90화
1026화
부우- 부우우-
방의 중앙에 있는 장치가 끊임없이 진동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잠든 맹수의 숨소리처럼 움츠러들게 만드는 기묘한 울림이다.
이곳에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뻔한 일이지만, 이 장치의 제조원은 바벨이다. 개발자가 붙인 이름은 ‘바론의 서른두 번째 발소리지만, 쓸데없이 긴 이름에 라울이 ‘바론밤’으로 부른 후부터 바벨에선 바론밤으로 불린다.
그 때문에 개발자가 한때 우울증에 빠졌다던가?
바론밤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하지만, 핵심만 간단히 추리자면 특정 조건에서 초인력을 압축, 폭발시키는 강력한 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드는 이 바론밤이란 물건을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어떤 물건인지를 알아 버렸다.
완전히 기감이 차단된 상태라면 이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간 단련한 초인기를 통해 방 안을 살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바론밤의 대략적인 구조와 형태를 알았다. 무엇보다 바론밤에 고도로 응축되어 반물질화하고 있는 초인력을 확인한 순간, 그의 직관력이 바론밤의 기능을 꿰뚫어 본 것이다.
사실 조금만 앞뒤를 따져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쉐어 가든에서 타란 백작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탑에, 검후 대신 놓여 있는 장치라니. 당연히 함정을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만 저들도 이드가 먼저 이곳에 도착한다든가, 심지어 문을 열지도 않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든가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검후는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일까? 애초에 함정을 준비해 둔 거였나? 그럼 검후는 어디에 있는가?
이드는 그런 의문을 품고 좀 더 안쪽을 살폈다.
스르르르.
문을 이루고 있는 금속이 실처럼 풀어지며 방 안의 정보를 전해왔다. 그러자 바론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곳의 모습도 알 수 있었다. 한곳으로 대충 모아 놓은 단출한 가구들과 침대, 탁자, 찻잔 등 모두 일인 기준으로 맞춰진 도구들. 특히, 깨진 찻잔에선 지금도 다 마르지 않은
찻물이 고여 있었다.
“여기 있기는 있었던 모양인데.”
순간 퍼뜩 드는 생각 하나. 어쩌면 이 장치의 존재를 대부분의 초인 기사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는 것.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살살 고개를 흔드는 이드의 눈에 순간 반짝이는 벽이 비쳐 보였다. 동시에 거기에 반사되는 빛줄기의 모습.
‘기감이 막힌 건 저 거울 같은 것 때문이려나? 아니, 장치에서 나온 빛이 끊임없이 반사되는 걸 보면 기감만 막고 있는 건 아니고・・・・・・ 증폭?’
바론밤에서 빛이 뿜어질 때마다 거울로 변한 벽에 반사되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빛이 뿜어져 더해졌다. 이런 현상을 보고 중첩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이상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이드는 문에서 손을 뗐다. 물론 그 전에 기감을 차단한 것으로 보이는 거울의 일부를 아주 조금 떼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석은 라미아에게 맡기면 된다. 일거리지만 분명 재밌어할 거다. 거기에 일꾼을 자청할 비올라도 있고.
“그나저나, 급하게 어디로 옮겼을까? 공간 이동이 막혔으니 멀리는 못 갔을 텐데.”
뿐인가. 타란 백작과 기사단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으니,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을 거다. 결국 좋든 싫든 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졌을 때…………….
“두 번째 탑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그나저나 생각 이상으로 대담한 인물이 아닌가.
이드는 브리더 자작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탑에 설치된 폭탄도 그렇고, 검후를 두 번째 탑으로 옮긴 것도 그렇고, 타란 백작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순간 검후도 빼앗기고, 함정도 무용지물이 될 모험과 같은 일을 벌이다니.
‘어쩌면 통로를 막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초인 기사들을 밀어붙인 이유도 이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네.’
물론 그 정확한 속사정이야 알 길이 없고, 굳이 알아볼 생각도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검후와 랜달의 확보다.
이드는 처음 발을 디딘 난간에 섰다. 고개를 숙이니 바닥이 손톱만큼 작게 보인다. 아직 여기까지 밀리지 않은 듯 사람도,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확실히 전투의 소음이 커진 게, 탑에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이드는 탑의 벽을 바라보다 훌쩍 뛰어내렸다.
벽을 부수고 나가면 빠르겠지만, 이미 탑의 벽에도 초인기와 마법을 이용한 방비가 되어 있음을 라미아가 확인해 주었다.
특히 지금은 탑에 폭탄이 설치된 만큼, 기존의 것 이상으로 무언가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써 만든 함정을 어처구니없이 날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조금 돌아가면 될 것을 그거 좀 빠르자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슈르르륵.
다시 부운귀령보의 공능을 빌린 이드의 모습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중에 사라졌다. 이드는 그 상태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통로를 잠깐 되돌아가자 초인 기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착실히 밀리고 있는, 아니, 밀려 주고 있는 모습이다.
전투의 양상도 확실히 타란 백작과 기사단에 기울어 있는 모습이다. 때문일까. 기세를 탄 기사들이 성난 황소처럼 앞만 보며 돌진 중이다. 과연 저들 중 돌진의 끝에 자신들을 몽땅 날려 버릴 폭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무심히 그들을 지난 이드는 순식간에 갈림길에 이르러 두 번째 탑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브리더 자작이 포기한 걸 보여 주듯 통로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통로에 찍힌 어지러운 발자국은 브리더 자작의 의도가 완벽히 들어맞은 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대략…… 50명 정도인가?”
발자국을 통해 타란 백작이 보낸 기사의 숫자를 정확히 읽어 낸 이드는 혀를 찼다.
50명의 기사. 분명 적지 않은 수다. 작은 영지의 기사단 이상이니까. 거기에 개개인의 무력 수준을 생각한다면 백작가에 비견될 정도로 기세 좋은 자작가의 기사단 급이다.
하지만 그 숫자로 검후를 지키고 있을 초인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폭탄을 설치하고 유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지만, 검후를 홀로 두지는 않았을 테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전력을 배치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탑의 입구에 도착했다.
두 번째 탑은 세 번째 탑과 그 구조가 조금 달랐다. 세 번째 탑이 속이 빈 상태로 꼭대기에 하나의 방이 있는 것과 달리, 두 번째는 전형적인 탑형 건축물로 그 중앙에 층층이 나누어진 방이 있는 형태였다.
“세 번째 탑보다는 뭔가를 숨기기 좋기는 하겠어.”
아무래도 각 방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봐야 할 테니 말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일 때 그렇다는 거고, 이드는 다르다.
별 고민 없이 계단을 오른 이드는 첫 번째 방 앞에 이르러 벽에 손을 대어 보더니, 곧 문을 열어 그 안을 확인하고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랄까. 조금 더 확인할 필요는 있지만, 이 탑의 방에는 기감을 막는 조치가 되어 있지 않았는지, 기감으로 내부를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얻은 정보가 실제 확인한 방과 차이도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방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하나하나 확인하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드는 미끄러지듯 계단을 올라 가볍게 벽을 터치하며 탑을 올랐다. 그렇게 점점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이드의 모습이 달라진 건 탑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다.
이번에도 스윽 하고 벽을 스치고 지나려던 이드의 손이 멈칫하더니, 벽에 찰싹 달라붙는다.
씨익.
그와 함께 이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리고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계단을 오른다. 그렇게 이드가 위로 사라진 후.
털썩.
닫힌 문 너머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문틈을 비집고 무겁게 흘러나왔다.
그런 경우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드의 손이 벽에 온전히 대어졌다 떨어지면 여지없이 혈향이 넘쳤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은밀히 방에 숨어 있다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이드의 격공장에 절명한 그들은 브리더 자작이 검후를 지키기 위해 고르고 골라 배치한 초인 기사들이었다. 또한 타란 백작의 명령에 이드보다 먼저 이 탑을 올랐던 50명의 기사들의 목숨을 거둬 간 자들이기도 했다.
이드는 기감을 통해 살핀 방에서 숨어 있는 초인 기사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았다. 이드와 같은 기감이 없는 기사들이 하나하나 방을 살피는 과정에서 습격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위로 올라갈수록 숨어 있는 초인 기사의 실력은 조금씩 더 좋아졌다. 방 안에만 숨어 있지 않고 문 앞이나 계단에 숨어 있거나, 짝을 이뤄 기습을 준비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드의 존재를 알지 못해 대비할 수 없었다. 임무가 임무인 만큼 서로 신호를 보낼 방법을 가진 듯하지만, 그럼 뭐하나.
일격필살에 신호를 보낼 시도는커녕 자신의 죽음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죽고 마는데 말이다.
그렇게 서른 명 정도에게 고통 없는 편한 죽음을 선물해 주고 나자 이드는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위에서 느껴지는 다수의 기척 때문이었다. 숫자는 셋.
세 번째 탑에서 문을 지키던 다섯보다 작은 수다. 그러나 절제된 숨소리와 일체의 기척이 지워진 것을 보면 숫자 이상의 뛰어난 실력자들인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초인 기사가 아니라 브리더 자작과 두 남작이 직접 지키고 있어도 이드를 막을 수 없는데, 아무리 실력이 좋아 봐야 결국 기사 레벨이 이드를 막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드는 세 번째 탑의 기사들을 처리했던 방법 그대로 푸르게 물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조금 다른 방법을 써 볼까.’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한 듯 내력을 회수하고는 사방의 벽을 살핀 후 탑의 내벽에 손을 댔다. 탑의 재질은 대부분 돌이다. 그러나 온전히 돌만으로 탑을 올릴 수는 없는 일. 나무도 들어가고, 흙도 들어가고, 강철도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요소를 마법이 한데 묶는다.
이드는 그 요소 중 금속에 초인기를 사용했다. 손이 벽의 돌을 부수고 들어가 강철 뼈대에 직접 닿았다. 아직 무공에 비하면 미숙하기만 한 초인기를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다.
피잉-
금속이라는 고속도로에 오른 초인기가 달렸다. 처음부터 목적이 있는 만큼 탑의 뼈대를 조종할 생각은 없었다. 탑에 촘촘하게 뻗어 있는 금속 뼈대를 타고 달린 초인기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이드의 두 눈에 각각 다른 모습이 비쳤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못한, 조금은 뿌연 시야에 비친 광경.
그중 하나의 모습에 이드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하하. 확실히 많이 컸네. 드디어 네 얼굴을 보는구나. 시르피.”
아무것도 없이 휑한 방안에 덜렁 놓인 의자. 거기에 앉은 여인과 그 뒤에 서 있는 남자.
남자는 몰라도 여인의 얼굴은 기억에 있었다. 옛날의 모습도 조금은 남았지만, 소드 팰러스와 황궁에 있는 그림을 통해 보았던 얼굴.
바로 시르피의 모습이었다.
“그럼 넌 좀 이따 보기로 하고.”
잠시 그녀를 살피던 이드가 반대쪽 시야에 집중했다. 그러자 환한 통로를 바라보며 등을 보이고 있는 건장한 세 남성의 뒷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건 다름 아닌 위에서 이드는 기다리고 있는 초인 기사들이었다. 쉬지 않고 통로를 경계하는 모습이 이드의 침입을 알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검후를 지키라는 브리더 자작의 명령에 충실할 뿐이었다.
이드는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미리 생각하고 있던 방법을 실행했다.
슈르르르.
강철로 된 문의 일부가 흐물거리며 뾰족하게 날이 섰다. 그 날은 각각 세 사람의 뒤통수를 향하고 있었다.
‘무형극’
그리고 이드가 무형검강결의 한 초식을 떠올리는 순간.
핏-
세 개의 날카로운 금속 침은 이미 세 사람의 머리를 관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