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93화
1029화
오늘 내성의 벽이 녹아내리기 전까지 쉐어 가든은 불침의 상징이었고, 완벽한 은신처였다.
무력 사용을 즐기며 적이라면 지옥까지 쫓아가는 마스의 땅에 있었고, 언제나 마스의 고위 귀족의 영지로 내려지던 성이었다.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고선 손댈 수 없는 절벽 위의 꽃이 바로 쉐어 가든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절벽 위의 꽃을 더 탐내는 자도 있고, 그중에서도 실력이 좋아 그 꽃을 쉽게 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쉐어 가든이란 꽃은 단단해도 보통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검은 돌과 같이 마스의 눈을 피할 자신이 있는 정보 길드, 혹은 암살자들이 쉐어 가든 안에 숨은 목표를 노렸으나 지금까지 성공한 적이 없었다. 성안에 발을 들이긴커녕 안의 구조조차 알아내지 못했을 정도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할까? 이드의 기감도 뚫지 못한 성벽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불침의 명성이 오늘 무너지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의 주인의 협력을 받은 마스의 정예 기사단에 의해 크게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내부의 적이지만, 어찌 되었든 뚫린 것은 사실
덕분에 그 구멍을 통해 이드도 침입을 하지 않았나. 그러니…….
턱!
거기까지 들은 이드가 손을 들어 검후의 말을 막았다. 고집을 부릴 줄은 알았지만 무슨 이유를 대려고 이렇게 말이 요란한지.
‘그나저나 내가 듣기로는 이렇게 수다스러운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꼬꼬마 시절 사건만 아니면 가짜가 아닌지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쉴라나 스폴, 황녀 등을 통해 듣던 이미지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 오랜만에 맘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진짜 모습이 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설명은 됐고, 핵심이 뭐야?”
“그거 아세요? 지난 수십 년 동안 제 말을 끊은 사람이 없다는 거?”
“어쩌라고?”
“………성에 구멍이 뚫렸으니, 완벽하던 방비에도 허점이 생겼을 거란 거죠. 그건 이드 님이 들어왔듯 랜달이라는 그 마법사도 이 안을 살펴볼 수 있다는 건데, 그때 제가 없다면 그가 나타나겠어요?”
“흐음. 일리 있는 말이야.”
이드는 턱을 쓸었다.
헛소리를 하면 바로 탑에서 던져 버리려고 했더니, 충분히 옳은 말을 한다. 세상일 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피 보기 딱 좋다.
매사 내가 할 수 있다면 남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당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랜달은 무시할 수 없는 자다.
비올라가 틈만 나면 매도하고 욕을 하지만, 랜달은 엄연히 생명의 관 부관주로 있던 인물이다.
아무리 못해도 마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것이니, 어떤 기상천외한 초인 마법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거다.
아니, 초인 마법이 아니라도 그렇다. 당장 성벽에 구멍이 저렇게 크게 뚫렸으니, 그리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 페밀리어를 밀어 넣기라도 하면 이 정신없는 와중에 누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럼 제가 남는 건 납득하신 거죠?”
곰곰이 생각에 빠진 이드의 눈치를 살피며 검후가 물었다.
그와 동시에 검후는 스스로의 모습에 내심 웃음이 났다.
감금되었을 때조차 늘 당당했던 자신이, 재회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눈치를 보며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
하긴 이드가 아니라면 아무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왔다 해도 이런 태도를 보이진 않았으리라.
그런 검후의 생각은 고개를 흔드는 이드에 의해 끊어졌다.
“아니, 그건 따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니까. 잠깐 기다려 봐. 라미아!”
“라미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신가요?”
이드와 함께 튀어나온 옛 기억 속 이름에 이드의 등허리를 살피는 검후다. 그녀가 기억하는 라미아는 항상 이드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그런 검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라미아가 네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굉장히 다르게 변했거든. 보면 놀랄 거다. 잠깐, 기다려 봐.”
말과 함께 이드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시르피는 찾았어요?’
‘찾았어. 듣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 많아서 가짜가 아닌가 싶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가짜는 아닌가 봐.’
말과 함께 떠올린 검후의 모습을 본 것일까. 웃음을 터트리는 라미아다.
‘꺄하하하. 귀여워라. 그나저나 랜달 때문에 부른 거였네요. 바로 갈게요.’
‘그래.’
그렇게 말을 마친 라미아지만 바로 이동해 오진 않았다. 평소라면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옆에 나타났을 그녀인데 말이다.
대신 잠시 후 나타난 라미아는 한 사람을 동행하고 있었다. 바로 쉴라다.
“이야기를 듣더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야겠다고 해서요.”
어쩔 수 없었다는 라미아의 뒤로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쉴라가 있었다.
그간의 감정이 폭발했기 때문일까. 입술을 깨문 쉴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길 잠깐. 그녀는 곧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어 검후의 몸을 가렸다.
그때까지 검후는 팔다리와 배가 훤하게 드러나는, 짧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경험이 있는 이드는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지만, 쉴라에겐 민망하다 못해 참혹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검후의 몸을 가린 쉴라는 그 앞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주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은색 기사단의 못난 단장, 쉴라 이마큘리가 늦고 늦은 지금에서야 검후께 인사 드림을 용서하십시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단단하던 쉴라가 검후를 본 순간 눈물을 보인 것이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검후의 두 손이 감쌌다.
자신에게 망토를 두르던 쉴라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눈가도 어느새 살짝 젖어 있다.
다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쉴라와 달리 검후의 눈에는 온화한 그리움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숨겼던 잠깐의 즐거움이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구나. 미안하다, 내 딸아.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날 찾아 주어 고맙구나.”
설마하니 ‘딸’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나 보다.
“……”
울컥 치밀어 오른 울음이 신음처럼 흘러나오며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혹은 부끄러운 건지 급히 눈물을 지우고 호흡을 정리한 쉴라가 그제야 눈치를 본다.
그에 이드와 라미아가 못 본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줬다. 그간 쌓아 온 의리랄까?
‘그래도 보기 좋은 모습이네.’
‘정말 그래요. 그나저나 딸처럼 생각하는 사이일 줄이야. 생각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끈끈한가 봐요.’
그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주변을 살피는 척하며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감동의 상봉 중인 두 사람은 따로 두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라미아가 보긴 어때? 마법으로 내부를 살필 수 있을 것 같아?”
“네. 내성, 특히 탑을 중심으로 한 방어 마법과 마법 저항이 여전히 강하긴 해도, 확실히 구멍이 뚫리기 전보단 약해진 게 사실이니까요. 그게 아니라도 저렇게 큰 구멍이 난 시점에서 이미 완벽한 은폐는 끝났다고 봐야죠. 다시 수선해도. 예전만 못할 거라고 봐요.”
시니컬한 목소리로 불침의 쉐어 가든이라는 명성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라미아다.
성의 주인인 파라켈 후작이 이 사실을 알면 꽤 슬퍼하지 않을까 싶다.
자랑도 자랑이지만, 고위 귀족의 은신처로 공간을 내어 주며 얻은 이익이 제법 쏠쏠했을 텐데 말이다.
비단 그게 아니라도, 안전 지대가 사라졌으니 이제 하루하루 불안에 떨게 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바벨을 배신하고 사실을 밝혔을 뿐 아니라, 마스가 검후를 탈취하는 일에 정보를 제공했다.
자고로 배신자는 그냥 두지 않는 법. 바벨이 배신자 하나 처리할 힘이 없는 곳도 아니고,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성 주인이 슬퍼하겠지만, 다 자업자득이지. 그럼 랜달의 눈을 가리는 일은 가능한 거지?”
“기능이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고, 그쯤이야 쉬운 일이죠. 옥타곤 베일.”
이드의 질문에 대답과 동시에 마법을 사용한 라미아다.
그러자 가슴 앞에 펼친 양손 사이에서 팔각형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테두리를 따라 빛이 폭포처럼 흐르더니, 이내 바닥을 뚫고 내려가 순식간에 탑의 1층까지 닿았다.
직후 팔각의 빛의 기둥이 회전하며 크기를 키우더니 이드 일행이 있는 방의 벽이자, 탑의 내벽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끝났어요. 이제 이 안이 궁금하면 랜달이 직접 오는 수밖에 없을 거예요.”
탁탁하고 손을 터는 라미아다.
거기에 그녀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탑의 외벽은 그대로 두고 내벽만 강화함으로써 랜달이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신경 쓰기까지 했다.
“정말.. 뭐라고 해야할지. 굉장하네요.”
검후가 말했다. 감동의 재회를 마친 듯 한층 편해진 표정이다. 그 뒤로는 쉴라가 제 자리를 찾은 듯 담담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라미아가? 아니면 라미아의 실력이?”
“양쪽 다요. 아니, 라미아의 변한 모습이 좀 더 놀랍네요. 생기가 없는 걸 보면 아직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정확히는 아직이 아니라 인간이었다가 아니게 된 쪽이야. 그래도 이드가 힘쓰고 있으니, 곧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을 테고, 오랜만이야, 시르피.”
이드 대신 답한 라미아가 손을 내밀자 검후가 그 손을 잡았다.
“날 기억하는구나?”
“물론이지. 내 기억력은 드래곤 급이라고. 사소한 것도 잊지 않지.”
그 말에 뭔가를 느낀 듯 절레절레 힘없이 고개를 흔드는 검후다.
“제발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아 줘. 이미 이드 님께 시달렸단 말이야.”
“아하하하하. 그렇게 사정한다면 알았어.”
깔깔 웃는 라미아의 모습에 검후는 쉴라를 향해 물었다.
“이드 님은 진짜 정체를 감추고 있다고 하셨는데, 넌 알고 있었던 거니?” 딸이라고 부른 말이 진심이었을까.
쉴라를 향한 말투가 전보다 더 친근해져 마치 진짜 딸에게 묻는 것 같다.
“네. 검후님의 실종에 대해 공유하고 얼마 후 저희를 믿고 밝혀 주셨습니다.
“많이 놀랐겠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존경하던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니.”
“소드 팰러스의 기사 중에 마인드 마스터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말에 고소를 머금는 쉴라다.
다시 돌아봐도 그때의 놀라움은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도 기절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마음뿐인 그녀다.
그녀의 말처럼, 마인드 마스터를 존경하지 않는 기사가 존재할 수나 있을까?
불가능한 이야기다.
아, 혹시 모르겠다.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고집하다 힘에서 밀리고 쇠퇴해 버린 바보가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하고. 그만 안전한 곳으로 나가 있어.”
“아니요. 전 이곳에 있겠어요.”
“왜? 라미아가 조치도 취해서 네가 없다는 걸 들킬 일도 없는데. 힘도 봉인 당한 시점에서 위험하기만 하다니까. 쉴라 단장과 함께 얌전히 나가 있어. 쉴라 단장, 시르피를 부탁하죠.”
“……하하…….”
두 사람 사이에 껴 있던 쉴라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란 사실은 알고 있지만, 검후를 거침없이 대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너무 어색하게만 보였던 것.
그렇게 서로 고집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라미아와 쉴라가 둘 중 어느 쪽 편을 들어 말을 꺼내려는 찰나.
콰콰쾅!
폭음과 함께 탑이 흔들릴 정도의 커다란 충격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