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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95화


1031화

바론 밤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드에게 폭발은 놀랄 일이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사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쩌면’ 하고 유심히 살핀 덕분에 랜달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속았음을 깨달은 기사단이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달려오고, 그 위에서 랜달이 날아오는 모습까지.

이드들은 그 일련의 장면을 탑 위에서 내려다봤다.

하계의 복잡한 인간사를 관조하는 신선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이드는 검후를 살폈다.

방금 전 폭발에 놀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 태도에서 무슨 말을 해도 여기 있겠다는 고집이 느껴진다.

“쯧, 그만해, 강제로 내보내진 않을 테니까.”

“호호호. 오랜만에 고집을 부렸더니 민망하네. 하지만 제 안전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알아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풀고는 능청스럽게 옆으로 다가선 검후.

하지만 민망하다는 말은 말뿐인 듯, 얼굴엔 맑은 웃음이 가득한 것이 딱 능구렁이 아줌마다.

그걸 본 이드는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나저나, 밖의 상황은 어때요? 혹시 제 아이들이 다치진 않았나요?”

“아이?”

“우리 귀염둥이들이요. 은색 기사단.”

살벌한 독사를 예쁘다고 말하며 키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에게 귀염둥이라니?

그럼 그 앞에만 서면 기를 펴지 못하는 숱한 기사들은 뭐가 되나?

이드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 피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은색 기사단이 있는 곳은 무사해.”

폭발의 강도를 생각하면 외부의 피해가 특히 적은 편인데, 이는 폭발이 속이 빈 탑 내부를 타고 대부분 아래로 내려간 덕분이었다. 그에 검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랜달이란 마법사만 잡으면 되는 건가요?”

아무래도 무공이 봉인당한 만큼 상황을 살필 수 없어 답답한 모양이다.

라미아는 검후가 다시 묻는 순간 일루전 마법을 사용해 밖의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여기 붉은 점이 랜달이고, 푸른 점이 기사들이야.”

간단한 설명에 검후는 붉고, 푸른 점을 살폈다.

둘이 같은 편은 아니지만, 자신을 노리는 건 마찬가지.

하지만 저 많은 인원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에도 위기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죽어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옆에 붙은 쉴라와, 은색 기사단이 가까이 위치했기 때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드 님과 라미아가 같이 있기 때문이지.’

그녀가 직접 이드의 힘을 경험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영상과 이야기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라면 이 모든 색의 점이 몰려와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나잇값 못하고 주책맞게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이유도 이드를 믿기 때문이다.

두 개의 점 중 탑에 먼저 닿은 것은 붉은 점. 랜달이었다.

출발은 늦었지만, 하늘을 나는 게 땅을 달리는 것보다 빠른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 뒤를 이어 푸른 점의 기사들도 곧 탑에 발을 들였다.

다만 두 개의 점이 탑에 발을 디디는 방법이 각각 달랐다.

기사들이 이드가 지나온 길을 따랐다면, 랜달은 탑을 부수고 진입한 것이다.

이미 사건은 커질 대로 커져 누구의 눈을 가릴 단계를 지났다.

때문에 조심할 이유도, 은밀할 필요도 없으니, 차라리 요란하더라도 속도를 높이는 것이 더 옳았다. 무엇보다 검후를 옮길 수 있는 공간 이동도 미리 막아 두었으니 거칠 게 없다는 거겠지.

다만, 그 이후 랜달의 행동이 조금 특이했다.

그는 바로 최상층으로 진입하지 않고, 탑의 저층으로 진입해서는 계단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계단을 이용할 필요가 있나?”

그들이 이상한 걸 눈치챈 건 그의 속도 때문이었다.

저층으로 진입해도 날아오면 최상층까지는 금방이다. 그런데 속도가 느렸다. 마치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처럼.

“무슨 생각이지?”

머리를 맞댄 사람들의 머리가 동시에 기울어졌다.


같은 시각.

피오 단장을 선두로 기사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휘관이 선두에 섰다가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어찌 주군을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는 앞에 세울 수 있겠는가. 피오 단장은 그렇게 앞을 향해 달렸다.

“여기 문이 있습니다!”

“부숴서 내부를 확인해!”

이드와 같이 문을 발견한 기사들이 문을 부쉈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열어 볼 필요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짜자작!

“……..토머스? 알? 빌어먹을. 죽었습니다. 상태를 봐선 여기 쉐어 가든의 기사에 당한 것 같습니다.”

급히 뛰어든 기사가 다른 기사단의 복식을 확인하곤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란 백작은 마음이 급해졌다.

쉐어 가든의 기사가 자신의 기사들을 죽였다면, 정작 저 쉐어 가든의 기사는 누가 죽인 것인가. 

“앞서간 자가 있다. 서두른다!”

다리에 힘을 더한 기사단은 곧 두 번째 방과 그 안의 시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방을 지나 계단을 타고 탑을 한 바퀴 돌았을 때다.

선두에 달리던 피오 단장이 황급히 멈춰 서고 말았다.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무슨 일…… 허허.”

당혹한 그 옆으로 다가서던 구른 단장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까.

두 사람 앞의 계단.

앞서 오른 누군가 정성 들여 부숴 놓은 계단은 이제 계단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그저 날카로운 돌을 깔아 놓은 언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 뿐이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경사가 급한 돌산 따위 한두 번 오른 게 아니니까.

진짜 문제는 묘한 악취를 풍기며 부서진 돌 더미 위에서 늘어져 있는 ‘저것’이었다. 갈색 점액질의 꿈틀거리는.

“늪지 슬라임?”

“제가 잘 못 본 게 아니군요.”

“왜 멈춰 선 건가.”

그런 두 사람에 타란 백작이 다가섰다.

따로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곧 늪지 슬라임을 본 그의 얼굴 역시 두 사람을 닮아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두 가지는 확실하군. 앞서 올라간 놈이 마법사라는 것. 그리고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

쉐어 가든이 아무리 특이해도 성 앞에서 늪지 슬라임을 키우고 있지는 않을 테니, 당연히 누군가 가져와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

늪지 슬라임은 보통 슬라임보다 끈끈하고 생명력이 질기며, 동시에 독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이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나 원소 계열의 능력을 가진 초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사단은 쉐어 가든을 치기 위해 초인을 모조리 제외했고, 마법 전력은 마탑에 온전히 기대 버렸다. 즉, 현재 마법사는 없다.

최소한의 필요를 위해 데려온 마법사가 둘 있지만, 한 명은 퇴로 확보를 위해 기사들과 함께 밖에서 대기 중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투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기사단의 상황을 알지 않고서야 하필 지금 상황에 기사들이 처리하기 가장 껄끄러운 늪지 슬라임을 이곳에 풀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강력한 적이라면 온 힘을 다해 싸우면 쉬운 일이겠지만.

어쩐지 악취를 풍기는 늪지 슬라임에서 지독한 조롱과 악의가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

“고작 슬라임에 막혀 포기하는 게 말이 되나. 길을 열게.”

상층을 노려보는 타란 백작의 말에 가슴을 두드린 두 기사단장이 검을 뽑아 들었다.

촤르르르륵.

콰르르르륵.

그 후 강력한 검강과 검기를 일으킨 두 사람은 농부의 마음으로 앞길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돌덩이와 늪지 슬라임을 한꺼번에 말이다.

기사단은 느리지만 착실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멈추진 못했나. 뭐, 시간을 끈 것으로 충분하지. 저들이 도착할 때면 나와 검후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계단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올라오는 폭음을 들으며 랜달이 바닥에 내려섰다.

동시에 늪지 슬라임을 토해 내고 있던 상자가 쪼그라들어 부서졌다.

그 모습에서 무심히 몸을 돌린 랜달은 앞선 세 번째 탑에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문 앞에 섰다.

다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앞서 조심한다고 조심한 후의 결과가 바론 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도 문을 지키는 놈은 아무도 없는 건가.”

랜달은 어쩌면 두 번째 탑에 아무도 없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서 철저히 위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가 생명 탐색이 아니라 기사들처럼 방문 하나하나를 열어 그 안의 시체를 확인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답게 마법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마인드를 가진 랜달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었다.

곧이어 그가 문에 손을 댔다.

“역시 안을 살필 수는 없군.”

치리이이잉-

예상했다는 듯 문에서 손을 뗀 랜달의 손바닥 위로 무거워 보이는 링이 나타났다.

그건 작아진 콘티에롬이었다.

랜달은 곧이어 콘티에롬을 눈앞에 대고 그 중앙을 통해 방을 살피고는 직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모았다.

“하나? 검후를 지키는 초인이 겨우 하나라고? 결계가 철저해서 콘티에롬으로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는 건가. 아니면 그 하나가 매우 강력하다는 건가.”

랜달이 바이트 타블렛을 보고 만들어 낸 콘티에롬에는 몇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초인을 탐지해 내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초인력을 탐지하는 것인데, 그는 지금까지 이 콘티에롬의 탐지 능력을 벗어난 초인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법이나 초인기로 넘지 못한 문 너머의 초인을 탐지해 냈지만, 그 숫자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점에 랜달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안에 누군가 있는 건 확실하니. 그것만으로도 나쁘진 않은가.”

최소한 바론 밤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바론 밤이 아니라면 어떤 초인이라도 제압할 자신이 있는 랜달이다.

빙글빙글.

손가락 끝으로 돌리던 콘티에롬을 잡아챈 랜달이 그대로 팔을 휘두르자, 콘티에롬에서 검기를 닮은 반월의 빛살이 펴져 나갔다. 서걱.

서거거걱.

그것은 곧 벽과 문을 섬뜩하게 오려 냈다. 그것들의 강도도 보통은 아니었지만, 빛은 마치 국에 들어가는 무처럼 숭덩숭덩 잘도 잘렸다. 그러다 결국엔 지지할 곳을 잃은 문이 와르르 무너지고 방의 모습이 나타났다.

방의 중앙, 의자에 앉은 검후, 그리고 그녀 뒤에 숨어 검후의 가슴 앞에 검을 세우고 있는 사내의 모습.

다만 가슴 앞에 선 검이 검후를 지키는 것인지 위협하는 것인지 언뜻 애매해 보이기도 한다.

랜달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생각보다 만나 뵙기가 힘들어 고생을 했습니다. 그 이름도 찬란하신 검후께 미천한 마법사가 인사드립니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그대의 눈과 목에는 존경을 찾을 수 없으니 그대는 무례한 자로군. 심드렁한 검후의 대답.

하지만 랜달의 눈은 이미 검후 너머 살기를 뿜고 있는 초인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름이 찬란해도 일개 포로에게 이 정도의 예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은 당신의 목숨을 쥔 뒤에 있는 분과 인사를 나누고 싶을 뿐이오. 그렇지 않소? 인사나 나눕시다. 쉐어 가든의 초인 기사여.”

터벅터벅.

그와 함께 마치 상대를 압박하려는 듯, 남의 집에 침입하는 강도처럼 방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오싹.

머리끝이 삐쭉 서는 느낌과 함께 목덜미에 닿는 서늘한 무언가.

“안녕.”

“……”

바라던 인사말이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랜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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