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96화
1032화
왜? 어떻게? 어째서?
온갖 질문이 뒤죽박죽 머리를 채운다.
개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은 당연히 자신이 어쩌다 은신한 자를 놓쳤나’ 하는 것이었다.
분면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는데, 문이 열린 순간 서치 마법으로 내부를 살필 때까지만 해도 걸리는 것이 없었는데!
하지만 그런 고민들은 머릿속에서만 돌아다닐 뿐, 정작 랜달은 눈도 깜작이지 못하고 있었다.
혼란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대체 누구냐. 이 느낌은.. 탑주 이상이야.’
등 뒤에 있는 자의 거대한 존재감이 전신을 옥죄는 듯했다. 마치 드래곤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사로잡히게 되면 그 결과야 뻔한 일.
움찔.
그런 마음의 흔들림에 팔의 근육이 살짝 움직이려는 순간이다.
주르륵.
베이는 감각도 없었다. 뜨거운 액체가 목과 턱을 타고 흐르고서야 랜달은 그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았다.
“안녕에 대한 답은 안녕이 적당한 것 같은데, 지금 하려는 짓 말고 말이오.”
“……안녕하시오.”
얌전히 돌아온 대답.
이드는 눈가를 파르르 떠는 랜달의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검 아래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다니. 어림없는 일이다.
그것도 검이 목에 닿은 상태로 말이다.
검이 부딪히고 떨어지는 찰나의 공방 속에서 적의 움직임과 그 속에 든 진의를 읽어 내는 것이 무인이다. 그 짧은 접촉에서도 그런데, 턱 하니 목에 올려진 검을 통하면 그 마음속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 마음은 몰라도, 최소한 랜달의 근섬유 하나의 움직임까지 읽어 내고 있는 이드였다.
그때 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도 말이 짧은 걸 보니, 무례할 뿐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한 모양이군.
“제발, 지금은 조심히 움직여 주십시오. 품위를 해치신다고요.”
그에 대충 여몄던 망토가 풀리자 검후 뒤에서 검을 들고 있던 쉴라가 서둘러 다시 조여 준다.
그와 함께 검후와 그녀 사이에서 쉴라의 몸을 가리고 있던 초인 기사의 시체가 힘없이 쓰러졌다.
꼼짝 못 하고 그 모습을 보던 랜달의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토벌을 통해 쉴라의 얼굴은 머리에 박일 정도로 익히지 않았던가.
“은색・・・・・・ 기사단장?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어째서라.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대와 같은 자들이 다시는 검후님께 무례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말과 함께 랜달을 통해 쏟아지는 분노와 노여움.
랜달은 이 순간, 문이 부서지자마자 검후의 뒤에서 뿜어진 살기를 납득했다.
충직한 기사가 겨우 찾아낸 주군을 다시 빼앗으러 온 자신에게 살의를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당연함이 싫은 랜달이었다.
쉴라가 눈앞에 있다면, 등 뒤의 사람도 그녀와 관계된 사람일 터.
그중 이런 존재감을 뿜을 수 있는 사람은?
순식간에 하나로 좁혀지는 인물에 랜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명예 후작이십니까.”
“딩동.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이드가 답하기도 전에 라미아가 앞으로 나섰다.
뒤의 인물에게서 직접 듣진 못했지만, 라미아가 있으니 더 무슨 확인이 필요할까. 순간 숨이 탁 막힌 느낌을 받던 랜달이 말했다.
“…… 제가 후작 부인을 뵌 적이 있었던가요?”
“이드와 전 일심동체랍니다. 그가 있는 곳엔 항상 제가 있죠.”
라미아가 빙긋이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역시나 랜달은 생명의 관에 이드가 침입했을 때 함께 하던 새가 현재의 라미아라는 사실을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두 분께서 이곳에 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감탄한 듯 말하는 랜달의 말엔 진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탑주도 그도 바벨이나 소드 팰러스는 예상했지만, 이드의 존재는 철저히 논외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랜달을 보며 이드가 말했다.
“고마운 일이지. 덕분에 이렇게 쉽게 당신을 사로잡았으니 말이오. 당신에게 듣고 싶은 게 참 많소.”
“이것 참. 제가 명예 후작의 질문에 다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니 당신이 걱정할 건 없고.”
투툭.
이드는 말과 함께 랜달의 척추를 따라 요혈을 두드렸다.
몸에 힘이 빠졌지만 랜달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법사는 몸을 움직여 먹고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셋, 넷, 다섯.
이드의 내력이 기혈을 막는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자체가 천지 사방 팔괘의 흐름을 막는 봉인이 되어 랜달의 심장과 함께 써클을 조였다.
“쿨럭…… 점혈로 마나도 봉인할 수 있단 말이오?”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에 기침을 참지 못한 랜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물며 붙잡힌 중에도 빛을 잃지 않던 눈빛도 죽어 있다.
그 대신인가.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도 되는 듯 콘티에롬을 더욱 꽉 쥐는 랜달이다.
“내공이나 마나나 그 근본은 하나. 내공을 제약하는데 마나를 제약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마법사가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 순순히 포기하고 딴생각 말라는 듯 랜달의 어깨를 치며 앞으로 돌아 나오는 이드다.
이드는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문 랜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린 이제 그만 빠지도록 하지. 검후도 찾았고, 여기 랜달 부관주도 얌전해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꼭 끝났다고 하면 새로운 일이 생기는 건 왜일까.
누가 그러자고 대답하기도 전이다.
크읍.
희미하게 들려온, 답답한 신음 소리.
비록 그 소리는 작았지만, 이 자리에 그걸 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끄럽고 다급하던, 기사단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도 갑자기 끊어졌다.
기사들이 검후를 포기한 것일까?
그럴 리가. 코앞에 다 와놓고 이렇게 쉽게 내려놓을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일을 이 정도로 크게 벌이지도 않았겠지.
내심 고개를 저은 이드가 말했다.
“라미아. 세 사람을 데리고 먼저 나가 있을래? 검후께선 라미아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랜달 때문이겠지만, 이드의 존대를 통해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모양이다. 이번에는 검후도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쉴라 옆에 섰다.
이어 두 사람이 라미아와 랜달을 향해 다가오려던 차였다.
“뒤로!”
계단 쪽을 바라보던 이드는 발아래서 미약하게 느껴지는 기감에 벼락처럼 소리치며 네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쩌억.
분뢰보에 이은 마각철황격.
근본부터 다른 두 무공이 이드의 발끝에서 하나로 피어나며 돌로 된 바닥을 내리찍었다. 유성이 떨어진 듯 바닥이 움푹 파이는 순간. 퍼드드득.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듯 깨지던 바닥에서 가시가 솟아올랐다. 그리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노렸지만.
“어딜!”
콰쾅!
빠르게 발을 구르는 이드의 진각에서 터진 파동에 가시는 목이 잘린 독사처럼 중간이 부러져 나갔다.
뒤이어 한 번 더 발을 구르자, 발을 디딘 구덩이가 더욱 깊이 파였다.
그 순간이었다.
돌연 그 속에서 날카로운 은색 손톱을 가진 손이 이드의 발을 막으며 튀어나왔다.
“이렇게 일찍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반갑네, 메르시오.”
비록 나타난 건 손뿐이지만 상대의 이름을 정확히 대는 이드다.
이 세상에 마각철황격의 진각을 막아 내는 은빛 털을 가진 손이 그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손이 아니라도 그렇다. 이드가 그의 기운을 잊을 리가 있는가.
그런 이드의 부름을 들은 것일까.
푸드득.
바닥의 일부가 마치 문을 열어 주듯 벗겨지더니, 남은 손 하나에 이어 날렵하게 생긴 늑대 대가리가 나타났다.
“흐흐흐.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그래도 보다 보니 제법 정이 든 것 같지 않나? 목표까지 같으니 특히 더 그런 듯한데.”
“그래? 난 벌써 질리는데,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심드렁한 이드의 목소리.
그러나 라미아에게 전하는 마음은 달랐다. 그 전달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라미아는 곧장 움직였다.
“윈드! 쉴라도 이리로!”
바람을 부려 랜달을 끌어온 라미아는 쉴라를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그에 검후를 안아 든 쉴라도 마주 몸을 날렸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메르시오가 어떤 존재인지 이미 이드에게 들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멀리서지만 토벌의 마지막에서 그 힘을 직접 두 눈으로 봤다.
판단은 그때 이미 끝나 있었다. 대적 불가.
쉴라는 물론이고 은색 기사단 전체가 달려들어도 대적할 수 없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완벽한 괴물.
이드와 마찬가지로 무인의 무력을 기준으로 나누어 놓은 등급 안에 넣을 수 없는 진정한 초월자였다.
기사로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울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주군인 검후의 안전을 챙기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자신들이 빠져 주는 것이 이드를 위해서도 좋다.
수 미터밖에 되지 않는 라미아와의 거리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쉴라는 전력을 다했고 무사히 라미아의 손을 잡았다.
뒤이어 랜달이 막 도착하려는 순간.
끼리리리링.
쇠를 긁는 소음과 함께 사방으로 내달린 충격파가 라미아의 바람을 잘라 내고, 랜달을 날려 버린다. 랜달을 넘기지 않겠다는 의미인 듯한데, 그 방법이 사뭇 과격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랜달을 날려 버린 충격파가 세 사람은 건들지 못했다는 것.
당연히 그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세 사람이 있는 방향을 막아선 이드 덕분이다.
일라이져를 다시 꺼내든 이드. 그 앞에는 어느새 전신을 드러낸 메르시오가 바닥을 디딘 채 양손을 뻗고 있었다.
그 손끝에는 아직 흩어지지 않은 은빛 기운이 언제든 다시 뛰쳐나갈 준비를 하며 너울거리는 중이다.
“사이좋게 나눠 가지자고.”
나눠 가지긴 뭘 나눠 가진단 말인가. 기막힌 소리에 이드가 대답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에 메르시오도 물러서지 않고 달려 나온다. 쩡!
두 사람의 격돌에 호수의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후, 탑의 한쪽이 칼로 베어진 듯 비스듬히 어긋나며 떨어져 나갔다. 단지 충돌에 의한 충격파에 말이다.
그 모습을 굳은 상태로 보는 랜달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로 잡힌 상황이 어째 더 꼬여 가는 듯해서이고, 두 초월자의 전투가 그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랜달을 차지하려고 상대를 막아서는 이드와 메르시오. 그나마 목표가 있는 덕분에 힘을 억제하는 중이었다.
둘이 충돌하고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탑의 최상층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하늘이 온전히 나타났다.
이드는 그 속에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랜달을 확보하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이야 서로 눈치를 보는 중이지만, 라미아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려 한다면 메르시오도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힘에이드와 라미아가 당하지는 않겠지만 쉴라, 그리고 내력을 봉인 당한 검후는 어떨까.
‘우선 두 사람부터 옮겨야겠어.’
검후의 안전이 확보된 후라면 랜달이 전력을 낸 이드와 메르시오의 전투에 말려들어도 상관이 없다.
물론 아쉽긴 할 테지만, 그를 대신할 진짜 월척인 메르시오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라미아도 반대하지 않았다.
‘일리나에게 맡기고 바로 올게요.’
팟.
반짝이는 빛과 함께 라미아와 쉴라, 검후가 사라진 직후.
“요즘은 기부 천사보단 욕심쟁이가 인기라지.”
화르르륵.
이드의 몸에서 검고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세 사람의 안전이 확보된 즉시 무극신기를 끌어 올려 12대식을 펼쳐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