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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98화


1034화

참으로 미묘했다.

지금의 메르시오와 정신의 관에서 싸웠던 그는 분명 달랐다.

상대하는 이드도 느낄 만큼. 다만 설명할 수는 없는, 작고 미세한 차이였다. 직접 피부로 느끼기 전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고수의 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는데, 지금 메르시오와 이드 사이의 격차는 종이 한 장보다 크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그때 차원의 인이 그의 일부를 흡수해서이려나.’

메르시오가 달라진 원인에 대해 추리해 본 이드.

문득 생각해 본 것이지만, 떠올리고 보니 내심 그럴 확률이 생각보다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렴 차원의 인이 의미 없이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차원의 인의 완성을 위해 혼돈의 파편을 찾아야 한다는 게 지금 메르시오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찰나의 속삭임처럼 스치는 생각에 이드의 의식이 기울어지려는 순간이다.

콰르르르-

닿기도 전에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불꽃이 밀려들었다.

메르시오가 뿜어낸 화염이다. 분명 이전의 그와는 다르지만, 이 불길은 전혀 그 위력이 죽지 않았다.

푸쉬이이

봐라. 라미아가 특별히 신경 써 준 옷에서 김이 피어오르지 않나. 만약 평범한 의복이었다면 벌써 화염의 열기에 누렇게 변하거나, 타 버렸을 거다.

“이크,”

일라이져를 휘둘러 멸천붕의 날개바람으로 불길을 죽이고, 부운귀령보로 그 위를 타고 넘은 이드가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아무리 기세를 탔어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 싸움이었다. 오히려 그 기세를 몰아 확실히 밀고 들어가 승기를 잡고, 적의 목을 벨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싸움이고 전투인데. 아무리 차원의 인에 관한 일이라도 그 기본을 잊어버리다니 너무 방심했다.

“사과의 의미로 그 목 최대한 빨리 잘라 주마.”

“무슨 미친 소리냐!”

맥락 없는 소리에 메르시오가 이를 갈았다.

이미 알고 있던 3%의 손실.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이드와의 싸움에서 그 3%의 차이는 존 워스에게 화낸 것 이상으로 컸다. 덕분에 평소의 그답지 않게 좀 더 신중해야 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드야 그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럴 것 같으면 애초에 나타나질 말았어야 했다. 괜히 끼어들어서 일만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다.

이드는 직전 실수에 대한 반성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메르시오에 집중했다. 랜달의 존재는 잠시 버려 뒀다. 어차피 지금의 메르시오에게 랜달을 빼돌릴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이드가 마음을 먹는 순간, 메르시오를 베어 가는 일라이져 뒤로 멸천붕의 검은 발톱이 나타났다.

홀연히 나타난 발톱이 목을 노리자 메르시오가 한 박자 늦게 은의 발톱으로 공격을 막았다.

까라랑!

네 쌍의 발톱이 뒤엉키며 예기가 폭발했다.

그 충격에 메르시오의 목과 어깨가 검상을 연상케 하듯 쩍 벌어졌다. 남은 충격파는 아래위로 둥근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 내성의 일부와 함께 주변 주택들을 무너뜨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미 사람들이 내성의 전투를 확인하고 도망간 덕분에 인명 피해가 없다는 점일까.

이드는 그래도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메르시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멸천붕의 그림자가 진하게 실체화하고, 날갯짓이 거칠어짐에 따라 폭풍이 일어났다.

폭풍을 이루는 바람 역시 보통은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검기에 버금가는 검풍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드는 이 폭풍을 통해 메르시오를 쉐어 가든에서 밀어낼 생각이었다. 쉐어 가든의 영역을 벗어나면 마음 놓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으니까. 

“커허허헝!”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아는 것인지. 메르시오는 강렬한 하울링으로 폭풍을 뚫어 내고 견뎠다.

그러나 승기가 기울고 있음은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힐끗.

중간중간 마나를 더듬어 랜달을 찾는 메르시오다.

“그렇게 딴짓하는 걸 보면 아직 여유가 있으신가 본데. 그 여유, 싹 지워 주지.”

그 모습에 불끈한 이드가 일라이져를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날개가 메르시오를 감싸 압박하고, 연이어 그 위로 멸천붕의 붕명이 쏟아졌다. 끼루루루루-

사자후와는 다른 소리의 실체는 검명을 이용한 음공이었다.

듣기엔 신묘하지만 효과는 잔혹했다. 소리의 범위에 닿은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날개에 잡혀 꼼짝없이 두드려 맞은 메르시오도 눈과 귀에 피가 흘렀다.

그에 메르시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날개를 밀어내곤 멸천붕의 머리를 향해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그 작은 주둥이로 멸천붕의 머리를 물 수 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거리부터가 턱없이 모자라다 싶은 순간.

“커헝!”

일순간 붕명을 묻어 버리는 늑대 울음.

그와 함께 메르시오의 머리가 신랑의 그것으로 변해 집채만큼 커진 채로 멸천붕의 부리를 물어뜯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과연 혼돈의 파편이랄까. 상상도 못한 반격에 짧은 순간 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연 저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목이나 척추가 무사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좌우간 메르시오의 반격에 붕명이 멈췄지만, 이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의형강기의 일부가 무너져도 이드가 받는 충격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드는 오히려 메르시오가 멸천붕에 집중할 때 드러난 빈틈을 노렸다.

퍼억!

검은 날개 사이로 비집고 나온 일라이져가 하얀 번개가 되어 메르시오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웨어 울프의 덩치는 일반 성인의 두 배 이상이다. 그러나 남성 용병의 팔뚝 하나쯤 가볍게 들어갈 것 같은 구멍은 그 몸에도 결코 작지 않았다. 곧 그것을 통해 피와 내장의 일부가 울컥 밀려 나왔다.

파스스스.

그와 동시에 이드의 손목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려는 차원의 인.

그 모습이 마치 먹이의 냄새를 맡아 일어나는 강아지 같다고 하면, 기겁한 메르시오에게 실례일까?

“내 의지가 이리 선명한데, 떠오른다고? 내가 질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버럭 화를 낸 것과 달리, 자신을 가둔 날개를 물어뜯고 빠져나가는 메르시오의 행동은 매우 다급해 보였다.

그와 함께 가슴의 구멍이 빠르게 메워지자 차원의 인이 다시 잠잠해졌다.

이드는 그 모습이 신기했다.

이전의 메르시오를 포함해 혼돈의 파편의 피를 봤을 때는 조용했던 놈이, 오늘은 피 냄새만으로 깨어날 듯하지 않았던가.

“하긴, 아는 맛이 가장 무서운 거니까.”

도망치기 직전 메르시오의 일부를 흡수하던 차원의 인을 떠올린 이드. 그는 메르시오를 바라보며 차원의 인이 있는 손목을 쓰다듬었다.

“우리 아기가 배고픈 모양인데, 빨리 끝내자고.”

“그르릉. 어디 누가 먹힐지 보자. 차원의 미아 놈아!”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 메르시오가 달려들어 온다. 그 몸은 어느새 거대한 늑대로 변해 있다.

어지간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이젠 랜달에게도 신경을 끊은 듯 보였다.

그에 대응한 이드의 뒤로 다시 거대한 멸천붕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월자의 싸움은 단숨에 거조와 거랑의 괴수 대전으로 발전해 버렸다. 꽈과과광!


털썩.

“끄으으읍……!”

허공에서 이리저리 튕기다 끝내 바닥에 떨어진 랜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까닭에 조금의 충격도 줄이지 못하고 떨어졌다.

덕분에 내장이 곤죽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삐져나오려는 신음을 겨우겨우 삼켜 냈다.

지금 소리를 질렀다가는 두 괴물의 관심이 다시 자신을 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겨우 눈에서 멀어졌고, 이게 저 괴물들의 손에서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한데 겨우 비명 때문에 그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런 괴물이 있는데, 초인 마법이 무슨 소용이고, 선택받은 초인이 무슨 의미냐. 흐흐흐흐. 전부 빌어먹을 헛소리지.”

떨어진 방향이 반대라서 뭐가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피부를 간질이는 압도적인 마나의 흐름과 폭음만으로도 등 뒤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예상이 되었기에, 힘 빠진 웃음이 났다.

평소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렇게 행동해도 될 만큼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자신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무슨 짐짝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분노했고, 그래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깐의 충동이었다.

이드와 메르시오 사이에 끼어 그 힘을 생생히 목격한 랜달은 곧 그 충동이 봄눈 녹듯 사라짐을 깨달을 뿐이었다.

아무리 스스로의 힘에 자부심을 가진 그지만, 이드와 메르시오의 힘은 이미 그보다 몇 단계는 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아무리 실력을 더 쌓고 쌓는다 할지언정, 둘 중 하나도 감당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그토록 손에 넣고자 했던 초인 마법에 대한 허무감이 생길 뿐이었다.

바이트 타블렛을 온전히 복제한다고 해도, 초인 마법의 정수를 손에 쥔다고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미칠 듯한 무력감. 자연 마탑의 위대한 목표도, 초인들이 가진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도 이 순간만은 그렇게 하찮고 부질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의 랜달은 그저 모든 것에서 멀어져서 어딘가에 조용히 숨고만 싶었다.

일종의 현타에 빠진 상태라고나 할까.

랜달은 떨어지는 중에도 그런 마음을 담아 쥐고 있던 콘테이롬을 악착같이 손톱으로 긁어 댔다.

슈우우욱.

그러자 콘티에롬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그 비어 있는 중간에 랜달이 들어갔다.

“차라리 오늘 두 괴물 중 하나는 죽어 버렸으면 좋겠군. 가능하면 웨어울프 쪽으로.’

이드가 자신을 쫓는 건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메르시오 쪽은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두려운 랜달이었다. 

“가자, 콘티에롬. 너의 주인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라.”

행여 들릴세라 조용히 속삭인 랜달이 저 멀리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저 중간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간을 가두는 결계가 벽이 되어 막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벽은 자신의 앞을 막지 않을 터였다.

타란 백작에게 넘기기 전 마탑에서 가지고 나와, 자신은 막지 않도록 미리 손을 봐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 오로지 그 자신만 말이다.

마탑의 마법사들 모두를 대상으로 하면 그물에 구멍이 많아질 염려가 있으니 오로지 자신만을 예외로 한 것인데. 그때 준비한 것이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 준비가 지금 목숨을 살리는 구명줄이 되리라.

화아아앗.

곧 은은한 빛이 콘티에롬의 중앙에 들어찼고, 랜달이 그 안으로 가라앉았다.

이어 둘은 빛으로 변해 하늘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랜달의 마음을 담은 듯, 그 각도도 매우 가팔랐다.

그렇게 위로, 위로 향하던 빛이 검후를 막기 위해 설치한 결계에 접근했다.

삐리릭.

마나가 제압된 랜달을 대신해 콘티에롬이 약속된 패턴을 발신하고 결계에 접촉한 찰나였다.

투웅!

북을 치는 듯한 묵직한 소리와 함께, 힘차게 쏘아지던 빛 줄기가 결계에 막혀 땅을 향해 수직으로 처박혀 버렸다. 그 충격으로 랜달 역시 콘티에롬의 보호에서 떨어졌다.

그는 망연한 얼굴로 푸르게 모습을 드러낸 결계를 올려다보았다.

“왜 통과되지 않은 거지? 패턴은 분명히 맞았는데. 어째서?”

울 듯 말 듯 미묘한 표정.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면 딱 이런 표정이 아닐까.

아니면,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게 되어 버린 것에 대한 절망에서 온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편, 이유를 모르는 랜달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은 의아한 기색으로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서 손을 써 놨던 일이 이렇게 기막히게 들어맞을 줄 몰랐네요. 사람들이 왜 힘정을 파는지 이해가 가는걸요?”

“……”

그런 라미아의 모습에 옆에 있던 사람들은 얌전히 속도를 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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