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631화


1066화

대전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두 사람이 민감한 대화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차단했다고 여겼다. 하나 이는 반만 맞는 소리였다. 사실은 둘의 첨예한 대립이 낳은 결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시작은 두 사람이 가진 심상 권역의 부딪힘이었다.

즈즈즈즉.

심상 권역은 쉽게 말해 기감이 닿는 범위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의지에 따라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영역과 같아지게 된다. 검왕과 발터의 경우 벌써 이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신경을 집중하자 자연히 힘이 흘렀고, 각자의 영역이 부딪혀 기파가 일어났다.

이게 음파가 차단되는 효과로 나타나 귀족들의 복장을 뒤집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중 뛰어난 실력으로 정확한 속사정을 알아본 사람들도 어이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바늘 위에 계란을 세우는 것처럼 우연히 일어난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두 사람이 태연한 얼굴로 유지 중이니 말이다. 거기에 은근히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이, 먼저 이 바늘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패배하는 경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백작 덕분에 고생 좀 했소.”

“들었습니다. 밤중에 헛걸음을 하셨다고.”

“보기 좋게 말이오. 원하던 꼴이 아니었소? 이번 일, 라울이 주도한 거요?”

“그에게 조언을 좀 구하긴 했지요. 이런 일보다 중요한 용무가 많아서요. 워낙 바쁜 사람이지 않습니까.”

“하긴, 초인들 수십의 목숨쯤이야.”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후. 서로 길게 이야기할 기분은 아닌 듯하니, 내 짧게 말하겠소.”

터벅.

페시딘이 한발 다가섰다.

그러자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 중이던 그의 심상 권역이 순식간에 발터의 영역까지 잡아먹으며 확장되었다.

그 기분 나쁜 감각에 발터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 확장되던 심상 권역이 차음을 위한 진짜 기막으로 변했다.

“백작이 오늘 존과 관련하여 제기할 문제를 취소하시오. 그렇게 해 준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소드 팰러스에서 충분히 치르겠소.”

“대가라…….”

“같은 제국인으로서 무엇이 진정 국익을 위한 것인지 헤아려 주길 바라오. 무엇보다 우리는 한때 같이 일을 도모했던 동지가 아니오? 듣기로 바벨에서 감금 중이던 검후를 놓쳤다고 하던데.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함께 노력해야지 않겠소?”

“함께 노력이라.”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발터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일 전의 밤, 검후를 만나던 순간이 떠오른 탓이다.

혹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검후가 침묵하지 않겠다고 부탁을 거절했다면 지금 페시딘의 말에 흔들렸을까?

바벨의 반응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에겐 헛소리일 뿐이다. 당연히 검후의 침묵을 약속받은 지금은 더욱더! 냉정히 돌아선 발터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순간 지면에서 솟아오른 끈끈하고 무거운 기운에 페시딘의 기막이 단번에 소멸되었다.

“노력은 우리보다 그쪽 문제일 것 같군요. 만약 황색 기사단 전원과 존 워스의 팔 하나. 그걸 대가로 준다면 받아들이지요.” 

흘리듯 말을 남긴 발터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전을 향해 걸었다.

사실상 답은 이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황색 기사단 전원과 존 워스의 팔이라니. 이건 차라리 싸우니만 못한 결과였고, 그만큼 과한 요구였다.

즉, 페시딘의 말에 대해 비웃음을 담은 거절이었다.

“후후후. 과연 그렇게 나오는가.”

조금 전까지 발터가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는 페시딘이 문득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곤 그 역시 대전을 향해 돌아섰다.

퍼석.

그 뒤로 발터가 서 있던 자리의 돌이 마치 검에 잘린 듯 소리 없이 갈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전 안으로 사라지자 조용히 침묵하던 귀족들도 황급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리까지 차단하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혹시나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꽝!

“으흐흐. 분위기부터 살벌한 게, 생각보다 크게 터지겠는걸.”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

양측 파벌에 속하지 않은 귀족들은 은근히 신이 났다.

두 거대 집단이 피를 흘리며 싸움을 시작하면 그 사이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귀족이 대전으로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쿠웅!

발터는 결국 대전에서 존 워스라는 폭탄을 화려하게 터트렸다. 그리고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한 페시딘은 즉시 혀 속의 검을 뽑아 반격을 시작했다. 축제로 제국이 뒤집힌 바로 다음 날. 나쁜 의미로 다시 한번 제국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해가 다 지기도 전에 수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전에 있던 황제가 비밀로 할 것을 명령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토벌대에서부터 대전까지, 발터가 가진 폭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그간은 발터가 나서기 전에 자신의 입에서 먼저 얘기가 나올 경우 소드 팰러스의 보복이 있을 것이 두려워 침묵했지만, 폭탄이 터진 지금은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입이 여럿이니 황궁 밖으로 정보가 새는 것도, 소문이 도는 것도 빨랐다.

당장 에린이 황궁의 소식을 들고 이드를 찾아온 것만 봐도 그렇다.

마침 저녁 시간이 가까워 은색 기사단의 훈련을 끝낸 검후가 이드를 찾아온 때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청나게 빠르네.”

존 워스에 대한 문제를 아는 건 귀족들과 일부 기사들뿐일 텐데, 평민들에게까지 잘도 퍼진 것이다.

이드가 신기해하며 말하자 에린이 씁쓸하게 말했다.

“본래 자극적인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죠. 특히 소드 팰러스처럼 존경받던 대상의 추락은 더더욱이요. 그런 것들은 언제나 흥미를 유발하는 법이니까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 검후가 상관없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물었다.

“황제의 반응은 어땠는가?”

“문제가 공식화된 만큼, 사실 확인을 이유로 당분간 이 문제에 대한 거론을 금지하셨습니다. 이후 따로 발터 백작과 검왕을 대면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제도 적당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한 모양이군.”

혀를 차는 검후의 얼굴에 짧은 순간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누구에 대한 감정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분명 서운함도 있고, 의혹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핏줄은 핏줄이라고, 지금쯤 머리를 싸매고 있을 황제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발터 단장이 작정한 이상, 아무리 황제라도 쉽게 마무리하지 못하는 거지요. 명분으로 보나, 희생자의 수로 보나.”

차라리 후자뿐이라면 권력으로 어떻게든 덮을 수 있지만, 전자 때문에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라.

그에 쉴라가 검후를 위로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는 에린에게 기사와 초인들의 분위기, 귀족들의 동향, 외국에는 얼마나 알려졌는지 등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하나하나 답을 들은 후에는 현재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에 대해 다시 물었다.

“소드 팰러스에는 이 소식이 언제쯤 전해질 것 같나?”

“늦어도 이틀 뒤면 충분히 닿을 것 같습니다.”

역시 소문의 빠르기란. 그 정도 전파력이면 거의 쉬지 않고 달린 말 이상이다.

“그사이 페시딘이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지?”

“예, 특별한 사건이 없다면요. 당장 오늘만 해도 황궁을 나서자마자 소드 팰러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초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예상대로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가 소문을 좀 옮겨 주자고.”

“네. 수련생과 거주민들을 통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번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유능하다는 게 이런 걸까. 어떤 요구에도 막힘이 없는 에린에 이드가 요구 조건을 한 가지 더했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정신없도록 부탁하지.”

“・・・・・ 소문에 조금 양념을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원래 소문이란 게 퍼져 나갈 때마다 살을 더하는 거니까요.”라고 말하는 에린의 표정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이드였지만, 어떤 양념을 추가할지까지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당장 검후와 쉴라들이 나서서 반대하고 나설 것 같은,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그사이 수도를 한 바퀴 돈 소문은 조용하고 빠르게 수도 밖으로 번져 갔다.

당연히 수도에 머물고 있던 대사들을 통해 타국에도 존 워스의 사건이 알려졌다.

황제도 형체 없이 퍼지는 소문은 포기한 듯했다. 다만 대신들과 귀족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며 경거망동을 막았다.

“계획대로 소문은 빠르고 은밀하게 퍼졌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소드 팰러스에서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자는 귀머거리 외에는 없게 될 겁니다.” 

에린은 딱 만으로 하루가 되는 시간에 다시 찾아와 이드가 명령한 일에 대한 결과를 보고했다.

“그럼 수련생이나 기사들도?”

“그들은 이미 혼란한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검왕이 자리를 비운 게 컸습니다.”

“그래도 황색 기사단과 마르텔이 있으니, 안정시키기 위해 나서겠군.”

“네, 하지만 검왕만큼의 효과는 없을 겁니다. 그들이 당장 움직일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그거면 충분하다.

이드는 에린을 물리고 검후를 불렀다.

어제와 달리 본인의 방에서 쉬고 있던 검후는 바로 서재를 찾아왔다. 그녀에게 자리를 권한 이드는 에린이 가져온 소식을 전한 뒤, 그에 더해 말했다.

“그래서 오늘 소드 팰러스에 가서 로드가 남겨 놓은 걸 찾아올 생각인데, 어때?”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카일란과 클라인도 한번 봐야 하니까요. 그래도 괜찮죠?”

“문제없지. 저쪽은 지금 한창 정신없을 테니까. 그런데, 라발 단장은 만나 보지 않아도 괜찮아? 마침 안티로스에 있는데, 나중에 알면 섭섭해할거야.”

이드가 곧게 뻗은 나무 같은 라발을 떠올리며 묻자 검후가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요. 라발 경은 확실히 믿을 수 있지만, 거짓말이 서툴고 임기응변에 약하거든요. 운 나쁘게 페시딘, 혹은 존과 만난다면 저들이 눈치챌 수도 있어요.”

오히려 너무 곧아서 만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잔인하리만치 이성적인 검후의 평에 이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곤란했다. 정직해서 문제라니. 어찌 되었든 검후의 동의를 얻어 낸 이드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차피 라미아의 마법을 이용할 거라서 복잡한 준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소드 팰러스에 다녀올 인원은 단출했다. 이드와 검후, 그리고 공간 이동을 위해 라미아까지. 이렇게 셋이었다. 스폴이 시중을 자처하며 동행을 요청하려 했으나, 쉴라에게 끌려나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들은 밤이 오길 기다렸다. 아무렴 은밀히 무언가를 하기에는 낮보다 밤이 유리하니까.

그렇게 완전히 해가 지고, 달이 높게 떠올랐을 때.

화아아악-

강하게 빛났다 사라지는 마법광과 함께 세 사람이 지하실에서 사라졌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