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0화
1075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검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시간이 지나서인지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드와 함께 들어서는 황녀를 보고는 그런 마음을 저 멀리 날려 버린 듯 얼굴 가득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황녀.”
“할마마마!”
얼마나 그립던 모습인가. 벅차오른 감정에 황녀의 눈물샘이 터졌다.
정신없이 달려가 검후에게 안긴 황녀가 어린아이처럼 울자 검후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드는 감동의 재회 중인 두 사람을 지나쳐 검후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평소 서재나 그의 방에 모이던 얼굴들. 그중 일리나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늦어서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중간에 조금 사건이 있었어요.”
이드가 좀 있다 자세히 말해 주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가 아직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신기해했다.
“누가 보면 조손지간이 아니라 모녀지간인 줄 알겠어요. 검후가 황녀를 정말 많이 아끼나 봐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저 모습을 보면 누구든 그런 사실을 모를 수가 없을 거다.
그렇게 이드 일행이 지켜보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이 겨우 떨어졌다.
그러고도 부족하다는 듯 요리조리 황녀의 얼굴을 돌려보던 검후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황녀의 모습이 왜 이렇습니까? 눈은 퀭하고, 머리는 땀에 젖어 흐트러지고. 거기에 이 희미하게 시큼한 냄새는 또 뭡니까?”
“어머나, 내, 냄새가 아직 나나요?”
후다닥 두 걸음 물러선 황녀의 얼굴이 뒤늦게 붉어졌다.
이드는 약속대로 부담되지 않는 속도로 이동했다. 그사이 황녀는 옷과 머리를 정리하고 이드가 부른 물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입도 헹궜다.
하지만 구토 후 특유의 그 신 냄새는 쉽게 가시지 않았고, 결국 예민한 검후의 감각에 걸리고 만 것이다.
“설마 토했나요?”
“히잉~ 할마마마.”
단번에 냄새의 정체를 짚어 내는 검후에 황녀가 콧소리를 내며 안기려 했다.
턱.
하지만 그 시도는 이마를 밀어내는 검후에 의해 막혔다. 게다가 무엇보다 포근하던 미소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설명부터 하세요. 황녀. 오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요?”
황녀의 구토라니, 이건 도착이 늦은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검후는 엄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물론 그래 봤자 손주를 어르는 할머니의 톤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애초에 이드의 잘못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무려 자신의 부탁으로 마중을 나갔던 그가 아니었던가.
재촉하는 눈빛에 황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관련되어 있지만,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이드를 통해 다 밝혀질 터. 차라리 스스로 밝히고 말지, 그런 치욕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은,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할마마마.”
가장 좋아하는 검후 앞이라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얼굴을 붉힌 황녀가 사실을 밝혔다.
탈 없이 황궁을 빠져나와 발견한 침입자들. 그들의 모습과 이어진 이드의 활약과 생포 직전에 녹아 사라지던 침입자들의 마지막 모습까지.
교묘하게 자신이 토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만 생략한 황녀는 거짓을 말한 건 아니라며 혼자 위안했다.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더니. 쭛.”
본인의 일을 포함해, 제국에 왜 이런 분란이 연이어지는 것인가. 분노보다는 속상함이 더 큰 검후였다.
“감히 어떤 무도한 자들인지 반드시 밝혀 철저히 죄를 물어야 합니다. 저희 은색 기사단이 앞장서겠습니다.”
“참아요, 단장, 우린 지금 여기 숨어 있는 처지라고요.’
그런 검후를 대신해 분노하는 쉴라와 꼼꼼하게 딴죽을 거는 스폴도 있었다.
다만 그런 이들과 달리, 이드 일가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에게 검후와 제국에 대한 인연은 같은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드는 조금 귀찮게 되었다 싶기는 했다. 이렇게 내부가 복잡해지면 검후를 통해 제국의 힘을 빌리는 일도 쉽지 않을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뭐, 그것도 전날 세레니아가 남긴 정보를 얻은 덕분에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 한숨을 쉬던 검후가 황녀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래서, 황녀가 토한 것도 결국 침입자들과의 전투 때문이라는 거지요? 어디 또 다친 곳은 없나요? 이드 님이 잘 지켜 주셨을 것 같긴 하지만. …..”
“아니요. 할마마마. 그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이드의 이름까지 나왔다.
황녀는 이쪽을 바라보는 이드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해 보이고는 결국 구토의 이유를 말하고 말았다.
‘부・・・・・・ 부끄러워!’
또 한 편으로는 죄송하기도 했다. 무려 검후에게 직접 무공을 배운 자신이, 겨우 움직이는 속도에 멀미를 했다니.
황녀는 혹시나 검후가 자신의 미숙함에 실망하시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과연. 그런 이유라면 그럴 수 있지요. 그게 부끄러우셨던 거군요. 귀여우셔라.”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검후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할마마마?”
“괜찮아요. 황녀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그보다 높은 경지에서 보면 아직 미숙할 뿐이랍니다. 내공과 실전 능력은 물론이고, 속도도 말이에요. 황녀가 이드 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자상한 설명에 황녀는 역시 할마마마라며 마음을 놓았고, 검후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다만 멀미가 온 것과 구토를 참지 못한 것은 정신력의 문제. 그 부분은 좀 더 단련할 필요가 있으니, 내가 고쳐 드리도록 하지요.”
“……가, 감사합니다?”
황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후에게 수련받는 것은 무인으로서, 또 손녀로서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무공 수련을 시작하면 피도 눈물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하면서도 슬펐다.
“일단 간단히 씻고, 정리를 좀 하자꾸나. 이대로는 황궁에 돌아가서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검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쉴라와 스폴이 나섰다. 옷은 라미아가 나서 클린과 어레인지로 간단히 해결했다.
그 사이, 이드는 에단과 에린을 마주했다.
아무래도 침입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거나 수집하려면 두 사람이 나서 줘야 했기 때문인데, 마침 보고를 위해 저택에 와 있던 참이라 따로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부우우-
이드의 기억을 받은 라미아가 침입자들의 형태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에단과 에린이 그 모습을 그리려 하자 친절하게 종이에 인쇄해 주기까지 했다.
이드는 그 옆에서 자신이 침입자들에 대해 느낀 점을 설명했다. 사실 큰 특징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그들 사이에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목소리를 들은 것도 그중 대장이라고 여겨지는 자가 다였다. 물론 에린은 그 행동 자체가 하나의 특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대신 저들이 입고 있던 옷과 물품을 챙겨 왔으니 가져가서 살펴보도록 해. 그리고, 이건 내 느낌인데…….”
잠시 말을 멈춘 이드가 검후를 바라보았다.
하필 지금?
좋지 않은 예감에 검후의 미간에 주름이 만들어지고, 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저들에게서 묘하게 청색 기사단의 기색을 느꼈어.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지만.”
그러나 다름 아닌 이드의 ‘느낌’이다.
그걸 있는 그대로 가볍게 생각해 넘기는 사람은 없었다. 검후를 선두로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드 님은 저들이 페시딘이 키운 자들이라고 여기시는 건가요?”
검후가 입술을 질끈 물며 물었다.
정말 그게 맞는다면 저들은 검후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제국에도 확실히 등을 돌린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감히 황궁에 침입하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드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분명 청색 기사단의 기색이 읽히긴 했지만, 그와 반대로 초인이 무공을 익힌 것 같은 인상도 받았습니다.”
침입자들이 마지막 발버둥처럼 이드에게 달려들 때 무공을 이용한 자들도 있지만, 그보다 초인기에 몸을 맡긴 자들이 더 많았다.
그건 심리적으로 초인기를 더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였다. 소드 마스터급으로 무공을 뼈에 새겼다면 차라리 둘 다 사용했으면 했지, 한쪽으로 치우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 초인파가 무리해서 황궁에 침입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아니, 이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쓸데없는 사건으로 존 워스에 대한 주목도가 흐려지는 걸 누구보다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드 팰러스와 미완의 마탑이 가장 의심되는데요.’
에단이 볼을 긁적였다.
자신이 속했던 곳이고, 현재도 절반 정도는 속해 있는 소드 팰러스를 의심해야 한다고 말하려니 겸연쩍은 것이다.
그것도 검후 앞에서 말이다.
그에 반해 이드는 그런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모습을 보였다.
“정신의 관에서의 모습을 보면 그 둘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무시 못 하니까 신경 쓰도록 하고. 특히! 혼돈의 파편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으니까, 알아볼 때 신중하도록.’
“네.”
쉐어 가든에서 봤던 메르시오의 모습이 생생한 두 사람은 혼돈의 파편이 언급되자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때마침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황녀가 서재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저들이 황궁에 침입하려 한 목적이 뭘까요?”
“흐음…….”
그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문제의 사안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누가 주도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목적을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누가 주도한 것인지를 밝히더라도 그 목적을 단번에 추려내긴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는 중에 스폴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목적도 목적이지만, 가장 아까운 건 이 문제를 밝힐 수 없다는 겁니다. 이만한 사건이니 밝히기만 하면 황실의 힘으로 어디든 다 뒤져 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겸사겸사 소드 팰러스가 숨긴 것도 보고요.”
끄응~
순간 여기저기서 아쉬움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스폴의 말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 그대로, 밝히고 싶어도 밝힐 수가 없다.
검후가 구출되어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은색 기사단과 이드가 그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두 비밀이었다.
“휴우~”
특히 검후의 마음이 심란해 보였다. 그녀가 결심만 한다면 황제를 만나 사실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직 황제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풀리지 않았는데.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황녀가 검후의 옆에 앉아 밝게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그런데요, 할마마마. 쉴라 단장님께 들으니 여기서도 수련을 하신다면서요. 저도 할마마마의 수련장을 보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오늘치 수련 양도 채우지 못했으니까. 오랜만에 네 실력도 보고.
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드의 손을 잡아당겼다.
“엥? 설마 저까지요?”
황녀의 방문으로 오늘은 쉬는 줄 알았던 이드는 어어 하며 끌려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