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7화
1082화
스스슥.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진 정원.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유령처럼 나타난 인영 하나.
뚜벅 뚜벅.
흐릿하던 그림자는 금방 진해지고, 곧 발소리까지 난다.
밤중이라 더욱 크게 느껴지는 그 기척은 어지간히 멀리 떨어지지 않고서는 듣지 못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
그럼에도 정원에 숨은 사람 중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반응이 뭔가. 최선을 다해 못 본 척, 눈도 돌리지 않는 중이다. 오죽하면 돌을 던져도 반응이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안 잡나?”
재미없는 반응에 이드는 결국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그가 지나치고 나자 그제야 몇몇이 이드의 등을 향해 떨리는 시선을 던졌다.
‘어우~ 식은땀 나. 저게 그 유명한 명예 후작일 줄이야.’
‘시벌. 심장 떨려 뒈지는 줄 알았네. 내가 미쳤지, 저런 괴물의 발을 잡으려고 했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흙탕물 좀 먹으면 어때, 얼굴에 구멍 나는 것보단 낫다. 나아! 아무튼 저 인간이 돌아갈 때까지 난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다!’
‘나도! 그러니까 말 걸지 마라!’
날이 밝은 후 퍼블에게 연속 야근의 부당함을 따지러 갔다가 이드의 정체를 전해 들은 초인들. 그들은 이후 손에 손을 잡고 신전을 찾아 착하게 살기로 다짐했다.
그들도 바벨에 속한 초인이다.
그러니 당연히 검후의 숲에서, 쉐어 가든에서 이드가 어떤 짓을 했는지 충분히 들었을 수밖에 없다. 힘을 떠나, 명예직이라고 해도 무려 제국 후작의 면상을 흙탕물에 담그려 했다.
그에 비하면 야근 삼 일? 가히 신의 은총이 내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벼운 결과다. 초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사흘 야근을 받들어 모셨다. 그 결과로 인해 순식간에 투명 인간이 되어 버린 이드는 저택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어제와 마찬가지로 퍼블이 문을 열고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안면이 생겨서 그런지 한결 밝은 얼굴을 보인 그녀는 곧장 라울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빨리 오셨군요.”
라울이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이드는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안색이 말이 아닌데,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농담이 아니라 라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졌다.
눈 밑에 다크서클은 기본이고, 입술도 거칠어져 있다.
밤을 새도 그냥 샌 것이 아닌 것 같은 모습이다.
“일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이게 다 어제 명예 후작께서 다녀가신 덕분이지요.”
푸념을 늘어놓는 모습이,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침입자 따위 때문은 아닐 것이고, 혼돈의 파편과 초인 간의 관계가 문제였으리라.
침입자쯤이야 자신한 만큼 정보를 뒤지고, 조사에 나서면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건 그 당사자를 직접 마주하지 이상 답을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렇다고 충격적인 정보를 얻은 채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거다.
뿐인가. 당장 조사에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이 정보에 대해 바벨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알리고 논의하는 시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당장 떠오른 것만 이 정도다. 응당 밤을 새도 모자란 일이기는 했다.
“그리고, 그 일로 명예 후작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슬쩍 눈치를 보는 라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라울이 높여 부를 사람이 바벨에 누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바벨의 장에 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지?’
이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되었다.
“혹시 바벨의 총수?”
이드는 자신의 말에 씨익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답하는 라울을 보며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바벨은 그 규모에 비해 정보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핍박받던 초인들을 구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평민 중에는 바벨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자들이 더 많을 정도다.
하지만 기사 이상의 위치에 있는 이들 중 바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장 부하와 동료가 거기에 소속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동료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간부에 대한 건 매우 한정적이었고, 그중에서도 바벨이란 조직 꼭대기에 있는 총수에 대한 정보는 한 번도 외부로 흘러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기밀에 부쳐졌다.
건립된 지 거의 백 년에 가까움에도 지금까지 총수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바로 그런 총수에 대한 이야기가 바벨의 최고 간부인 라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드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바벨의 총수는 황제보다 만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명예 후작께서 전해 주신 정보가 그만큼 가치 있다는 것이지요.”
“좋습니다. 저도 만나고 싶군요.”
바벨의 총수는 과연 어떤 자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총수 자리에 있었을까. 어떤 초인기를 가졌을까.
‘결정적으로 얼마나 강할까. 혼돈의 파편을 보고 눈이 뒤집힐 정도만 아니면 좋겠는데.’
이드가 바벨에 기대하는 건 정말 별것 없었다.
오로지 그들이 초인이 된 이유에 충실해 주는 것. 그리고 이왕이면 그중 최고인 총수가 혼돈의 파편 하나 정도는 맡을 수 있을 만큼 강하기를 바랐다.
다만 그 방향이 단순히 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하면 뭐하나. 혼돈의 파편을 보고 눈이 뒤집혀서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면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니까.
“감사합니다.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음? 날짜가 잡힌 게 아니었습니까?”
“당장은 총수님이 시간을 낼 수 없으십니다.”
방금은 이드가 가져온 정보의 가치가 크다 말해 놓고, 이제는 총수의 일이 바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그에 라울을 살핀 이드는 그의 얼굴에 일순간 스치는 곤혹스러움을 발견했다.
‘…….혹시 총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총수가 비밀에 싸여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이드는 아무것도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날은 서로 조율해 보지요. 그런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바벨의 총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검후님만큼이나 대단한 분이십니다. 모든 초인이 존경하는 분이며, 그럼에도 욕심이 없으신 분이죠.”
말과 함께 라울의 눈에 떠오르는 은은한 열기.
이드는 다른 건 몰라도 총수에 대한 라울의 감정 하나 만은 진실임을 알았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바벨의 총수도 버서커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에 대해선 말씀드릴 게 없군요.”
노골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라울이다.
‘총수는 버서커를 경험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드는 오히려 라울의 그 모습에 확신했다.
버서커를 경험한 총수라. 한 번 경험했다니, 어쩌면 혼돈의 파편을 보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총수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곤란한 질문이 툭툭 튀어나왔기 때문인지, 라울이 화제를 돌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몇 장의 종이를 이드 앞으로 밀었다.
“전날 말씀하셨던 침입자들에 관한 조사 결과입니다.”
이드도 괜히 물고 늘어지는 대신 라울의 말에 응해 주었다.
“과연 바벨의 정보력은 대단하군요. 이틀도 빠르다 여겼는데, 하루 만에 결과가 나오다니요.”
“소드 팰러스를 범인으로 두고 있다는 말이 주요했습니다. 그에 따라 저희도 소드 팰러스 관련을 최우선으로 조사했더니, 결과가 나오더군요.”
라울은 또다른 몇 장의 서류를 이드 앞에 놓았다. 각각 엉망이 된 얼굴의 초상화와 멀쩡한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냥 보면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스테이 자작 가 소속 수석 기사 타타이라 판 호세?”
이드는 초상화 아래 적힌 소속과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스테이 자작가는 물론이고 타타이라 판 호세라는 기사의 이름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소드 팰러스 소속이 아닙니까?”
“보시는 대로 반반입니다. 자작 가에 소속된 기사로 삼 년 동안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머지 기사들 역시 비슷합니다.”
이드는 그 말에 서류를 뒤적이며 기사들의 내력을 살폈다.
과연 라울의 말대로였다. 하나같이 가문에서 먼저 기사로 서임을 받은 후 소드 팰러스로 보내져 수련했다.
사실 드문 경우는 아니다.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 중인 기사 수련생들의 경우 서류와 같은 형태거나, 아니면 재능을 인정받아 소드 팰러스에서 실력을 쌓은 후 그 실력을 보고 기사로 서임을 받는 두 가지 형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서류를 살피던 이드는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을 찾아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군요. 서류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이들이 기사로 서임 받은 날은 다를지언정 소드 팰러스로 수련을 받은 시기가 같네요?”
“역시 날카로우시군요.”
“이렇게 대놓고 굵은 글씨로 써 놨는데 모를 수가 없죠.”
어디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퉁명스러운 이드의 반응에도 라울은 연신 대단하다며 싱글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명예 후작께서 찾으신 대롭니다. 이번 사건이 없었다면 저희도 우연으로 넘겼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우연이 아니지요.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수련받은 시간이 고작 삼 년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초인으로 각성한 상태에서 수련을 받았다고 하지만, 삼 년 만에 소드 마스터라니. 대~단한 재능이지요?”
도저히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말 어미에 매단 라울.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이드도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을 잡고 삼 년 만에 검기를 뿜는 소드 마스터라니.
아, 당연히 뛰어난 무재를 가진 자 중에 그런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강호에서도 괜히 무에 대한 재능을 가진 제자를 탐내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제자를 얻는 것 자체를 기연이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 기연이 갑자기 발에 챌 정도로 무더기로 솟아났다니,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이드는 기사들의 각 가문에 관한 내용을 살피며 물었다.
“집안 쪽에서는 수상한 점이 없었습니까?”
“일단 기사들이 속한 가문들은 소드 팰러스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사파입니다. 자식들이 모두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만큼 서로 매우 친하죠. 오히려 기사들을 수련 보낸 것이 당연하게 보일 정도로요.”
“그럼 소드 팰러스의 명령으로 기사들을 움직였을 수도 있겠군요?”
이드의 말에 라울이 이마를 긁적였다.
“사실 그 부분이 조금 막힙니다. 아무리 같은 파벌에 속해 있고, 소드 팰러스의 명령이라고 해도 황궁에 대한 침입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니까요.”
“그렇기는 하지요.”
팔짱을 낀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침입자의 정체를 밝혔지만,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