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76화
1111화
성벽을 넘은 남작은 빠르게 외성 영역을 벗어났다.
그 후 북쪽으로 다시 20분을 달렸다.
이드는 뒤늦게 주변 지형이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의아했다.
“이쪽이면 사냥 숲이 있는 곳인데.
“거긴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의문을 표하긴 라미아도 마찬가지.
해당 장소는 이미 두 사람이 철저히 조사를 마친 뒤였다. 혹시 자신들이 뭔가 놓친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남작이 다시 방향을 바꿨다. 이번엔 남서쪽.
“별장?”
그런데 근처도 안 간다. 15분 후엔 다시 북동쪽.
“이번엔 창고 쪽?”
그 후 다시 북서쪽으로 향하는 모습에는 기어이 말이 나오고 말았다.
“……추적이 붙은 걸 아는 거 아닐까요?”
그 뒤로도 남작은 몇 번이나 더 방향을 틀었다.
정말이지, 남작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이동 시간이 일정하게 감소 중이라는 데 더불어 삼각 나선 형태의 동선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추적이 아니라 습격으로 목적이 바뀔 뻔했다.
그런 고비를 넘어 남작이 멈춰서기까지 총 한 시간 십오 분.
다만 나선을 그리고 이동해서인지 속도와 시간에 비해 영주 성에서 그리 멀리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달려 남작이 도착한 곳은 바로 들판 한가운데였다.
“저 새끼,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심이 다시 솟으려는 찰나였다.
이드가 손을 들어 모든 의문을 틀어막았다.
“잠시만. 지금 남작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과 남작 사이의 간격은 약 삼 킬로미터.
아무리 탁 트인 들판이라고 해도 밤이라 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삼킬로미터면 대낮이라도 일반인 기준이면 사람이 모래알처럼 보일 정도의 거리였지만, 여기 모여 있는 이들 중 밤눈이 어두운 이는 아무도 없다.
정보원에게 밝은 눈은 기본. 특히 감지계 초인기를 보유한 초인들은 이드만큼이나 남작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즉,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작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모습을 보았다는 뜻이다.
“기도?”
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뜬금없이 기도라니?
하지만 그에 대해 뭐라 말을 할 사이도 없이 남작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가는가 싶더니 돌연 사라졌다.
“톰!”
남작의 행동을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대충 몸을 숙였다 일어난 남작이 갑자기 사라지는 건 목격했다.
그에 마리가 급히 상황을 물었다.
하지만 앞의 경우와 달리 톰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놓쳤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완전히 사라졌어요.”
“빌리, 샘.”
마리가 나머지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도 톰과 같은 감지계 초인으로, 각각 빛과 파동에 관련한 초인기를 가졌다.
“저도 놓쳤습니다.”
“미묘한 파동을 감지했습니다. 이동 마법의 파동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고개를 젓기는 마찬가지.
오히려 기막힌 소리까지 더한다.
피터는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야. 그걸 사용할 것 같으면 굳이 여기까지 달려올 이유가 뭐야.”
하지만 그에 대해 뭐라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한발 옆으로 물러선 이드만 빼고서 말이다.
이드는 당황한 피터와 추적조의 모습에서 남작이 사라진 허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남작이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달랐다.
무릎 꿇은 남작이 두 손을 모은 직후 희미한 형태를 띤 채 나타난 문.
그건 검은색에 가까운 회녹색을 하고 있었는데, 제국 황성의 문보다 컸다.
오죽하면 윗부분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남작은 그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즉, 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드는 다른 게 보인 거죠?”
그는 작게 속삭이는 라미아에게 자신이 본 것을 심상으로 전달했다.
“봤어?”
“아뇨. 그런데 디자인 참 고약하네요.”
“취향인가 보지. 그럼 나만 봤다는 거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가 뭘까?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본인은 그레센 토박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데 이드가 그에 관해 길게 고민하기도 전에, 피터와 마리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하긴, 저들과 달리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다.
“손님께 자꾸 손을 벌리는 건 면목이 없습니다만, 단서가 있다면 알려 주시겠습니까?”
작게 한숨을 쉰 피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드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일이기에 남작이 사라진 곳을 향해 이동하며 말했다.
“저도 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매우 희미한 형태로 문 같은 것이 나타난 걸 봤습니다.”
“그렇군요. 문이라.”
곧이어 남작이 서 있던 자리에 도착한 피터는 추적조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사라진 남작의 발자국, 대지에 남은 기억. 그리고 마법의 흔적까지.
하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저을 뿐.
그 가운데서 무언가를 찾은 사람은 라미아가 유일했다.
반짝이는 마법과 함께 신기한 도구들을 사용한 그녀는 남작이 사라진 위치에서 팔을 벌렸다.
“공간에 균열이 생긴 흔적을 발견했어요. 크기는 이 정도?”
“맞아. 남작이 통과할 때 문이 흔들리던 넓이가 딱 그만했어.”
“좋아요. 일단 여러분들은 조금만 뒤로 물러나세요. 이드는 괜찮아요.’
사람들을 물린 라미아는 은색 가루를 두 손 가득 꺼내 들었다.
“진공에 가득한 어둠은 당신의 축복에 별과 달이 시원인 우주의 대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 것이니, 심원의 문지기여 나는 당신께 고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도문 같이 들리는 고대어.
하지만 저건 분명 마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중얼거림과 함께 라미아의 손에서 피어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은은한 빛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빛은 곧 은색 가루로 번졌고, 가루는 바람에 붙잡힌 꽃가루처럼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스으으으-
“설마 저거 다 미스릴일까? 그럼 돈이 얼마야?”
순간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들리는 목소리.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도 돈 이야기라니. 어지간히 메마른 감성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뒤에서 들리는 이야길 듣고 미스릴 따위로는 공간에 간섭하기 어렵다며 맘속으로 콧방귀를 날리는 라미아 때문이었다.
당장 저 가루의 정체가 미스릴이 아닌 오리하르콘이라고 알려 주면 그 반응이 썩 볼만할 터였다.
하나 라미아의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이, 둘 다 훌륭한 마법 재료로서 한 손에 꼽히는 귀물이지만 그 가치의 차이는 한 손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라미아가 속으로는 쫑알쫑알 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대어 마법은 쉼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결국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벌에게 달라붙는 꽃가루처럼, 오리하르콘 가루가 허공 속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달라붙은 덕에 그 무언가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문?”
순간 뒤에 물러나 있던 피터와 추적조가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는 은색 펜으로 그린 듯 커다란 문의 일부가 드러나 보였다.
‘일부’인 이유는 간단했다. 문의 높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과연. 남작이 이 안으로 들어간 거로군요. 저희도 가능할까요?”
“문을 현계로 드러나게 하는 것과 열고 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라서요. 열려면 좀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탁탁 손을 털어 낸 라미아가 문에 손을 댔다.
단단한 무언가를 만지는 듯하더니, 곧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저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임을 하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마리가 따라해 보려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허공을 저을 뿐이다. 심지어 오리하르콘조차 만져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그 모습에 혀를 찬 피터가 물었다.
그러나 라미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드가 그녀에게 눈짓을 하며 살짝 거리를 벌린 탓이다.
‘뭔데요? 들어가지 마요?’
‘당연히 들어가야지. 저렇게까지 해 놓은 걸 보면 안쪽에 꽤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은데, 포기할 수야 있나.’
‘그런데 대답을 막은 이유는?
‘문 말이야, 어쩌면 좀 더 빨리 열 수 있을 것 같아서. 한데 그 방법을 쓰기도 전에 네가 대답해 버리면 좀 그렇잖아.’ 그와 함께 척 하고 왼팔을 라미아 앞으로 내미는 이드.
이심전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다 안다는 듯 라미아가 이드의 팔목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우우움
그건 단순히 촉각이라는 감각 너머로 전해지는 울림이자 진동이었다.
‘알람?’
이드는 그 느낌을 한 단어로 줄여 버리는 라미아의 능력에 겨우 웃음을 참았다.
‘문이 나타난 후부터 시작했어. 어지간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던 놈이 지금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열 수 있을 것 같아?’
‘차원의 인에 관련한 부분에선 내 의견보다 이드의 느낌이 중요하죠. 하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긴 해요. 존 워스가 저 공간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혼돈의 파편도 저런 걸 만들어서 들어앉을 때를 대비하긴 해야 하지 않았겠어요?’
혼돈의 파편과 차원의 인은 물고 물리는 관계다. 이는 대우주의 순환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었다.
‘그럼 바로 시도해 볼 테니까, 문은 네가 여는 걸로 하자.’
“알았어요. 라울의 귀에 쓸데없는 소리가 들어가는 걸 피하자는 거죠?’
혼돈의 파편과 초인의 관련성의 연장선으로, 혼돈의 파편과 이드의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관심이 큰 라울이지 않던가.
라미아가 돌아서며 말했다.
“어쩌면 지금 바로 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안 될 수도 있지만 일단 시도해 볼 테니, 여러분들도 준비하고 있으세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녀의 말에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손님께 손을 벌린 상황에 의심까지 더하는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해서 피터와 추적조는 아무 말 없이 만약을 대비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만큼, 문이 열리면 무엇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라미아가 문에 손을 댔다.
치르르륵.
치르르륵.
고대어 마법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빛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실 복잡한 도형과 룬어가 가득 들어차 눈을 부시게 만드는 마법진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말 그대로 눈속임용이었다. 그런 화려한 빛무리 속 라미아 옆에 딱 붙은 이드가 문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우움.
그와 함께 언제 그랬냐는 듯 알람이, 아니, 울림이 멈췄다.
촤르르륵.
대신 이드의 손을 중심으로 문에 금이 갔다.
그리고 중심에서 회오리가 일어나더니, 부서진 문이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타난 회오리의 크기는 약 사 미터.
문의 크기에 비하면 매우 작은 출입구였다.
직후 라미아가 빙글 돌아섰다.
“휴~ 다행히 잘 통한 것 같네요. 들어갈까요?”
매우 자연스러운 말투.
그녀는 연기에도 제법 재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