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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96화


1131화

팔짱을 낀 이드가 무의식적으로 발끝을 까딱거렸다. 생각 중이라는 신호였다.

“흐음.”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요?”

그에 나란히 침대에 기대고 앉아 있던 라미아가 수정 중이던 새 공간 수식을 내려놓고는 물었다.

“피터 씨가 정말 의심스러운 정황을 찾아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영혼의 관 토벌에 늦을 수도 없잖아.”

“아이참~ 그게 왜 고민이에요? 바벨에 맡기고 가면 되지.”

“그러다 존 워스라도 튀어나오면?”

그건 그야말로 존 워스를 잡을 기회를 놓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바벨의 피해도 클 테고, 존 워스로 이어지는 라인도 끊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영혼의 관이죠. 혼돈의 파편 중 하나가 튀어나올 가능성도 크고, 그들이 초인 마법을 뜻대로 사용하려 할 때의 위험성도 이쪽이 더 높다고요.”

“그렇긴 한데. 모르겠다. 차라리 피터 씨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나 이런 이드의 바람은 밤늦게 찾아온 피터에 의해 깨졌다.

“역시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팀원들이 온종일 달려들어서 겨우 작은 흔적만 찾아냈습니다.”

“한나절 만에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왔네. 고생했어요. 남작과 이베인은 잘 넘겼고요?”

“회수조가 잘 포장해 갔으니, 내일 아침이면 카논 땅에서 두 사람을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빠르네~”

“회수조의 신조가 신속, 정확입니다. 공간진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죠.”

어딘가의 배달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토구나 싶을 때, 라미아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흔적은 뭔가요?”

“영주 성을 탈탈 턴 결과, 이번 일을 주도한 자가 남작의 보좌관 중 하나인 가이거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제는 가이거가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점이었죠.”

거기까지 말한 피터는 침을 한 번 삼키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더 파 봤더니, 역시나 외부와 이어진 라인의 단말이더군요. 더 놀라운 건 그게 모두 남작의 사전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심문에는 그런 내용이… 혹시 정신 조작이나 기억 조작?”

눈이 가늘어진 라미아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능성이 크죠. 그에 대해서도 보고했으니, 남작이 도착하면 바벨에서 확인에 들어갈 겁니다.”

“그럼 아직 누가 뒤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말이로군요.’

사실 한나절 만에 이만큼이나 밝혀냈다는 건 자랑스러울 만한 일이었지만, 피터는 그럴 수 없었다.

앞서 이드에게 못난 모습을 한두 번 보였어야지.

내심 이번에야말로, 하고 다짐했지만 그 결과는 반쪽짜리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던 관계로. 하지만, 저와 팀원들은 일단 이번 사건에 존 워스가 관련이 있다는 것에는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무슨 근거가 있는 거겠죠?”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피터를 향하자, 그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인데, 남작이 실종된 이후 지금까지 그 정보가 단 한 번도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가이거의 라인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움직였지요. 던전의 붕괴를 모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요.”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얘기만 들으면 단편적인 정보를 토대로 한 짐작에 가깝지만, 그 말처럼 존 워스라면 던전이 붕괴한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라미아와 달리, 이드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존 워스가 굳이 이 영지를 챙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작에 이베인, 그리고 이제는 던전까지 사라진 땅이잖아. 우리가 이틀 동안 뒤졌지만 달리 숨어 있는 던전도 없었고.”

그럼에도 존 워스가 관련이 있다면, 이 땅에 이드가 찾지 못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틀 동안 뛰어다닌 그의 입장에선 짜증 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 이틀이 아까워서 반대 의견을 내놓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다만 그 점에 있어서는 피터 역시 대답하기 어려웠다.

정말 모든 가치가 사라졌다면, 존 워스는 왜 라인을 가동해 가이거를 움직이는가.

“단순하게 보자면 공격받은 데 대한 반작용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일단은 좀 더 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합니까? 가이거라는 자와 이어진 라인 말고는 아무 흔적도 없다면서요.’

이드의 질문에 피터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 말입니다만. 아무래도 지시를 내린 인물이 사용하는 억양과 단어들을 봤을 때, 라인이 이어진 곳이 발라파루인 것 같습니다.”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외국어를 익혀야 한다는 고통에서 해방된 그레센에도 지역에 따른 억양이나 사투리는 있다.

특히 한 나라 안에서의 사투리라면 듣는 순간 어디라고 특정 지을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즉, 피터는 가이거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에서 그 특이점을 발견했다는 말이었다.

“발라파루. 하지만 그것만으론 정보가 너무 적잖습니까. 거기가 작은 도시도 아니고.” 

무려 카논 제국의 수도다.

한 나라의 수도라면 어디든 다 비슷할 테지만, 그곳 역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었다. 그 속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드도 사실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라미아에게 역추적이 가능한지를 물었지만, 그 역시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와 마리가 직접 발라파루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바벨에서도 당연히 지원이 있을 것이고요.” 이미 발로 뛸 각오를 다진 얼굴이다.

그런 비장한 태도에 이드는 슬쩍 엘라임 백작 이야길 꺼냈다.

“엘라임 백작님이 도와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죠. 카논에서 그분의 말씀을 무시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당장 이드의 손이라도 잡고 흔들 듯 기뻐하는 피터를 보니, 아무래도 엘라임 백작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럼 가능한 부분은 엘라임 백작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발라파루는 어떤 방식으로 뒤질 계획입니까?”

“우선 가장 쉬운 방법으로, 파티를 열 겁니다.”

“파티라. 그 인물이 귀족일 거라고 보는군요.”

귀족이라면 여기저기 열리는 파티에 한 번은 얼굴을 들이밀 게 분명했다.

만약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특이사항이 될 테고.

“엘라임 백작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니, 참석하지 않을 인간이 없을 겁니다. 최소한 현재 발라파루에 머무는 귀족이라면 모조리 볼 수 있을 거라는

뜻이지요.”

즉, 번거롭게 파티를 여러 번 열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꼭 가 봐야겠는데요?”

툭툭 옆구리를 치는 라미아의 말이었다. 겸사겸사 검후가 그렇게 자랑하는 잘난 백작님 얼굴도 보고 말이다.

그에 이드는 피터를 보았다.

“엘라임 백작을 찾아갈 때, 피터 씨도 함께 가는 건 어때요?”

“하하. 그래 주시면 필요한 사항을 미리 조율할 수 있고 좋지요.”

“그럼 내일부터 길 안내 잘 부탁합니다. 엘라임 백작이 현재 어딨는지도 함께 조사해 주세요. 어쩌다 보니 그가 지금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는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순간 신나있던 피터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에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뱅커올슨 영지로 올 때 고생한 것이 떠오른 모양이다.

하나 이러나저러나 결국은 이드와 함께 이동하게 될 터.

우선은 할 일이 정해졌으니, 일찍 쉬어야 했다.

“아, 내일 사용할 출입 허가서도 같이 부탁해요.”

방으로 들어가기 전 라미아의 마지막 당부였다. 과연 눈앞이 까매진 피터가 그 말을 잘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피터는 출입 허가서를 잊지 않았고, 덕분에 세 사람은 무사히 성을 나설 수 있었다.

“마리 씨가 안 보이는데요?”

“마리는 발라파루로 이미 출발했습니다.”

굳이 그녀까지 백작을 만나는 자리에 따라갈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다.

바벨의 정보망에 따르면, 현재 엘라임 백작은 그의 영지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원래 일 년의 절반을 수도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을 영지에서 보내는데, 딱 지금이 영지에 머무는 시즌이라고.

피터가 그런 설명과 함께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자, 이드는 대충 거리를 가늠해 봤다.

“하루 만에 도착할 정도로 가깝진 않네요.”

“우웁! 그때처럼 달렸다가는 도착하기 전에 제가 먼저 죽을지 모릅니다.”

엄살처럼 들릴지 몰라도, 피터로서는 나름 필사적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드의 말대로 엘라임 백작의 영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뿐인가.

엘라임 백작의 협력을 받아 낸 후 다시 발라파루까지 이동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이후 백작의 일행이 포함될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영지로의 이동에 시간을 절약하는 편이 좋았다.

“공간 수식을 수정할 시간이 며칠만 더 있었어도 한 방에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깝네요.”

“어차피 불가능한 건 생각할 필요 없고, 어떻게 할까? 달려도 최소 사흘은 걸릴 것 같은데.”

“뇌룡노도는 어때요? 일리나스에서처럼.”

이드는 턱을 쓸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이 되는 기분은 확실히 나쁘지 않다. 속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현재 그보다 빠른 방법은 공간 이동뿐이니까.

“좋은 방법이긴 한데, 견딜 수 있을까?”

이드는 아직도 비 맞은 강아지 같은 꼴을 한 피터를 눈짓해 보였다.

사실 뇌룡노도는 어디까지나 이드 홀로 이동하기 위해 개발한 방법이다. 이 인 이상이 되면 여러 가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달리는 건 싫다고 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본인보고 직접 선택하라고 하면 어때요? 달릴 건지 날아갈 건지.”

이미 말을 탄다는 일반적인 이동 방식 따위는 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의 양자택일이었다.

결국 이드는 피터를 불러 묻고 말았다.

“평범하게 가면 너무 느려서 방법을 택해야 할 거 같습니다. 대신 피터 씨가 직접 선택하세요. 달리는 게 좋아요. 나는 게 좋아요?”

“・・・ 아직까지 날개가 나지 않아서 날아 본 적이 없습니다만, 둘이 무슨 차이입니까?”

“고통이 길고 짧은 것의 차이랄까요? 달리는 쪽은 이미 경험이 있죠?”

“고통 없이는 안 될까요?”

이드는 울상을 한 그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렸다.

원래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하는 게 인생의 이치가 아니던가.

“어느 쪽도 고통스럽다면…… 최대한 짧은 쪽이 좋겠지요.”

두 눈을 질끈 감은 피터는 결국 선택하고 말았다. 그리고 뱅커올슨에서 멀어지고, 세 시간 후.

갑자기 웬 유성 하나가 맑은 하늘을 가로질렀다.

“이야기가 다르잖습니까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날 피터는 목소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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