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00화
1135화
아니나 다를까.
“엘라임이…….”
이드가 최대한 담담하게 소식을 전달했음에도 검후의 얼굴에는 비통한 기색이 짙게 드러났다.
그녀의 길고 긴 인생에 지인의 죽음을 한두 번 겪은 것은 아니나, 가까운 이와의 이별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토대로, 슬픔 속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과연 물기가 비치던 눈가에 어느새 퍼런 냉기가 흘렀다.
“타살이란 말씀이시죠?”
“응. 라미아가 활약했지. 사용된 마법까지 밝혀서 예비 백작과 백작가의 사람들에게도 확인시켜 줬어. 하지만 그 외 흔적이 없으니, 범인을 잡는 일에 큰 도움은 못 될 거야.”
“혹시 혼돈의 파편이나 무도 쪽과 관련된 건 아닐까요?”
역시 비슷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란 비슷할 수밖에 없나 보다. 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현재 아는 건 백작이 디케이의 저주에 죽었다는 것뿐이니까. 다만 현장에서 혼돈의 파편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어.”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검후는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리곤 곧 이십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입에 올렸다.
그것들을 이유 없이 뱉는 건 아닐 터. 이드는 그 전부를 그대로 머리에 담고는 물었다.
“이게 다 누군데?”
“엘라임 백작과 평소 친분이 있었거나, 비슷한 성향을 가진 귀족들이에요. 제국에서 꽤 목소리를 내는 편이죠. 그들을 찾아보세요.”
“친분과 성향이라. 그래서 두 개 그룹으로 나눠서 불러 준 거군. 이들도 전부 소드 팰러스 출신?”
“절반 정도는요. 어쨌든 엘라임 백작을 죽일 만한 자들이라면 그 목적이 결코 가볍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는 건, 이게 끝이 아닐 확률도 매우 높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긴, 어지간히 큰 목표가 있지 않고서야 카논 제국 황실의 피를 이은 백작을 죽이는 대담한 짓을 벌이긴 어렵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가령 개인적인 원한이라든가. 하지만 이 역시 검후가 입에 올린 사람들을 조사하다 보면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긴긴 세월 동안 허투루 경험을 쌓은 건 아닌지, 슬픔 속에서도 검후의 혜안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피터 씨가 돌아오는 대로 바벨에 요청하도록 할게.”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곧장 다시 나가야 하는 만큼 분명 피곤할 터였다. 하나 이드는 자신을 두고 당당히 도망가던 피터의 뒷모습이 떠올라 전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쪽 문제는 이렇게 정리하고. 거긴 어때? 별다른 일은 없지?”
“아쉽게도 별다른 일이 있네요. 적들을 추적하다가 마스 왕국과 제국 간에 충돌이 발생했나 봐요. 황녀 말로는, 토벌보다 전쟁이 먼저 일어날 수도 있겠다더군요.’
“처음엔 국경도 열어 주고 나름 협조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충돌이라. 고의인 거지?”
“황제와 대신들은 마탑과 마스 사이에 어떤 변화가 발생한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이유 없는 변화는 없는 법이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다만 그 변화의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이 답답했다. 묻는다고 마스가 친절히 말해 줄 것도 아니고,
“그럼, 추적은 실패?”
“아슬아슬하게 따라가고 있어요. 실패했다면 진짜 큰 싸움이 났겠죠..
“그게 아마도 전쟁의 시작이 됐겠지. 대책은 있대?”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에요. 마스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똥개도 자기 집 마당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제국의 힘이 강력하긴 하지만, 타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허락 없이 무작정 밀고 들어간다면, 정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농후했다. 마스는 결코 싸움을 피하는 나라가 아니니까.
“그렇다는 말이지. 흐음.”
또르륵 눈을 굴린 이드가 턱을 슬슬 쓸었다.
검후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좋은 의견이라도 있어요?”
“좋은 의견인지는 모르겠고, 그 문제, 검왕에게 해결하도록 하면 어떨까 싶거든.”
“검왕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드는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나타내는 검후를 못 본 척하고는 말을 이었다.
“위험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어쨌든 지금 검왕은 토벌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입장이잖아. 협상을 하든, 협박을 하든 어떻게든 일을 풀어내지 않을까? 더구나 그렇게 하면 검왕, 마탑, 마스를 한 번에 엿 먹일 수 있다고.”
누가 뭐래도 이들 셋은 검후를 납치, 감금하는 일에 참여했던 적이지 않던가.
“그건 마음에 들긴 하네요. 알았어요. 황녀가 오면 전달해 볼게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잡다한 의견은 더하지 않았다. 검후와 황제라면 검왕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 이미 계산이 섰으리라.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일리나는 내일 봐요.”
이드는 얼굴만 비치고 있는 일리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연락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직전.
“이드 님…….”
“음?”
“혹시 돌아오시기 전에 엘라임을 살해한 자를 찾게 된다면 꼭 그 목을 잘라 백작의 무덤 앞에 뿌려 주세요.”
섬뜩한 부탁이지만 이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이 완전히 끊어진 후, 라미아가 수정구 위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깝네요. 아무래도 최소 몇 년간은 백작과의 썸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기 어렵겠어요.”
검후를 가지고 놀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게 정말 아까운 모양이다.
“놀리는 대신, 조용히 말을 꺼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슬퍼하지 않을까요?”
“슬프겠지.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함께한 추억을 되돌아보는 것도 추모 방법 중 하나니까. 혼자 맘에 담아 두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고.”
초상집에 괜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말이다.
대화를 마친 이드는 종이를 꺼내 검후가 내뱉은 이름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피터가 돌아오면 그를 통해 바벨에 전달할 예정이었다.
“이걸 검후님께서・・・・・・ 역시 굉장한 분이로군요.”
두 시간 후, 돌아온 피터에게 종이를 건네주자 그는 감탄성을 숨기지 않았다. 사건을 엘라임 백작에 한정하지 않고 제국 전체로 넓히는 시야는 물론, 엘라임 백작과 검후가 불러 준 인물들 간의 관련성에 대한 정확도도 굉장했기 때문이다.
“검후께서 카논의 사정에 이렇게 밝으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세히 모르는 분도 있지만, 그 외는 확실히 엘라임 백작님과 비슷한 성향입니다.”
“그러니 잘 부탁해요. 단발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아무 일이 없더라도 길게 지켜봐야 할 겁니다.”
“장기 임무에 특화된 요원들이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종이를 곱게 접어 품속 깊이 집어넣는 피터를 본 이드는 다시 물었다.
“그럼, 결과는 발라파루에서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중간중간 지부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확인이 가능합니다. 백작급 영지에는 대부분 지부가 있으니까요.”
그에 더해 피터는 해당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일정 구간 내의 중요도에 따라 그 아래 등급에서도 지부가 설치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치고는 바벨이 손을 뻗은 곳이 많군요.”
“하하하. 초인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 바벨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초인이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인가. 개방 같네.’
무림 최대 방파라고 할 수 있는 개방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정보력을 뽐낼 때 하는 말이 바로 거지가 없는 곳이 없다라는 말이다.
피터의 말은 오랜만에 개방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잠시 후 피터가 다시 방을 나섰다.
이드는 문이 닫히는 걸 보고는 창밖을 보았다. 캄캄한 밤이지만 백작 성은 모든 빛을 밝혀 환하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을 터인 데다,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다시 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이드는 그런 준비가 쓸모없다고 보았다.
“놈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그것도 직감이에요?”
어깨 너머로 쏘옥 얼굴을 내밀며 이드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라미아다.
“아니. 범인의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야. 다른 목표가 있었다면 다 끝내고 갔을걸.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번거롭게 두 번이나 올 이유가 없지.”
이드의 말대로 그날 밤 백작 성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을 잘 쉬고 난 다음 날.
화려한 아침까지 대접받은 후 피터가 디저트로 나온 젤리를 쩝쩝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엘라임 백작님의 도움은 포기해야겠지요?”
당사자가 죽어 버린 이상, 사정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닌 거다.
이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피터가 입으로 가져가던 젤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출발은 언제…….”
“길게 끌 이유가 있습니까. 오늘 나가죠.”
괜히 이 이상 머물러 봤자 백작의 죽음으로 정신없는 백작성을 복잡하게만 만들 뿐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관계없는 사람은 최대한 빨리 빠져 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 그럼 혹시 발라파투로 갈 때는 어떤 방법으로……?”
“날아서?”
“끄응. 역시나. 그러지 말고 마차를 이용하시죠. 제가 책임지고 최고로 빠른 팔두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알겠지만, 중간에 검후께서 언급해 주신 분의 영지가 두 개나 있습니다. 하니 직접 들러 확인도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하늘을 날았던 기억이 강렬한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다. 지도까지 펼쳐서 경로를 설명하는 모습이 퍽이나 필사적이었다.
이드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피터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남자답게 포기해요. 우리 좌우명은 최대한 빠르게, 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때 다시 움직이면 됩니다.”
“아아!!!!!”
이드는 절규하는 피터는 버려 두고서 하인을 불러 예비 백작에게 떠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자 예비 백작을 비롯한 백작 성의 주요 인사들이 즉시 나타났다. 그들은 떠나겠다는 이드의 말에 매우 아쉬워했다.
“검후님을 대신해 방문해 주시고, 사인을 밝히는 도움까지 주셨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떠나 보내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대신이라고 하긴 부족하지만, 아버님께 요청하려 하신 부탁을 제가 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이드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백작이 살해당한 상황에 파티를 열겠다는 말인가?
물론 그건 아니었다.
“수도에 있는 저택에 빈소를 설치하고, 자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많은 귀족 분들이 찾으실 테니 파티을 열 때보다 더 많은 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런 거라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예비 백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다시 만날 때는 이 부탁의 이유와 손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웃어 보이는 예비 백작과 달리, 뒤에 선 이들 중에는 얼굴을 찡그린 이들이 있었다.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 자신들을 위해 빈소를 여는 데에 분명 반대도 있었으리라. 저들은 아마 그중 하나일 테고, 예비 백작은 그걸 무시하고 도움을 준 것이다.
검후가 말한 엘라임 백작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은 예비 백작에 이드도 미소로 답했다.
“약속하죠. 다음번엔 검후님과 함께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검후도 기꺼이 백작성에 방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