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화
513화
수면향의 효과가 사라진 후 야영지는 한동안 시끄러웠다.
호위들이 한데 뭉쳐 버린 사람들이 무게와 통증에 신음하며 깨어난 것이다. 그들은 곳곳에 뿌려진 피와 타르코지를 포함한 모지 상단이 제압당한 모습에 놀라고 두려워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이드 일행을 강도처럼 바라보았다.
대륙 역사상 최초로 엘프가 낀 강도단이 될 뻔했다.
그나마 산적 같았던 호위들의 시신을 땅에 묻어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들의 시신까지 널려 있었다면 사람들은 정말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내어놓고 목숨만 살려달려고 빌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 에단이 나서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결국 코시를 끌어내서 이야기를 하고서야 겨우 미덥지 못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의 인간성이나 악질적인 행동과는 다르게 의외로 상인으로서의 신용은 제대로 쌓아 둔 모지 상단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날이 밝았다.
먹는 듯 마는 듯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빠르게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상인들도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덕분에 상행은 해가 지기 전에 아나크렌의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와주시오. 저기 모지 상단의 상단주가 잡혀 있소!”
끝까지 이드들을 믿지 못한 몇몇 상인들 덕분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실, 나서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의심을 하고 있어서 꽤나 곤란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경 검문소 안에서 일리나가 정체를 밝히면서 오해는 쉽게 풀 수 있었다.
국경에서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대하던 기사와 관리들도 지금까지 엘프가 끼어 있는 강도단에 대해서는 듣도 보도 못한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거짓말하고, 강도질하는 엘프라니, 그럴 리가 없을뿐더러 실제 존재하더라도 보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비록 슬쩍 찔러 주는 돈을 받고 밀거래를 눈감아 주는 그들이라도 지키고 싶은 동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아나크렌이구나!”
이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삼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저 지도 위에 그어진 선 하나를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선 하나가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컸다. 그 선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싸우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드의 머릿속에 이전 아나크렌에서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이드는 에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일정이 어떻게 되지?”
에단이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돌아보다 말했다.
“제가 미리 연락을 해 뒀기 때문에 소드 팰러스에서 마중을 나올 겁니다.”
이드는 그 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는 국경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에단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드의 눈을 피했다.
이드가 설마하는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아며 말했다.
“설마, 약속 장소를 정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언제쯤 국경을 넘을 것 같다고 말하니까, 알았다고 대답하기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어이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국경에서 어떻게 사람을 찾아!”
이드는 생각지 않은 실수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에단이 잘못한 것인지, 소드 팰러스에서 잘못한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다.
에단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 적당한 곳에서 좀 쉬시죠. 제가 다시 한 번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쯧, 별수 없지.”
또 기다려야 하지만 정말 별수 없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중에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때 이드의 머리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던 라미아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저기 봐요.]
그녀의 말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드가 지나온 관문으로 향하는 대로였다. 그 끝에서 수십의 화려한 인마(人馬)가 등장했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그들의 등장에 시끄럽던 대로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오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소드 팰러스의 적색 기사단이다!”
누군가 그들을 알아보고 신음하듯 소리쳤다.
이드가 그 소리를 듣고 에단의 옆구리를 찔렀다.
“설마 마중이 저 기사단을 말하는 거야?”
“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에단도 적잖이 놀란 듯 어벙하게 대답하고는 기사단의 가장 앞에선 기사가 들고 있는 깃발을 가리켜 보였다.
붉은색 깃발에는 옥좌에 세워진 검과 그 검 위에 걸린 왕관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저게 소드 팰러스의 문장입니다. 소드 팰러스에는 적, 청, 흑, 백, 은의 오대 기사단이 있는데, 모두 같은 문장에 색깔만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마, 적색 기사단 전체가 마스터의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괜히 요란하게…………”
에단의 설명을 들은 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드는 이렇게 요란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소드 팰러스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기사단이 곧장 이드들을 향해 다가오자 그 앞에 있던 사람들이 길 양옆으로 흩어졌다. 대신 그들 사이에서 네 명의 인물이 조용히 걸어 나와 이드의 사방을 지키고 섰다.
다각다각다각.
이드 앞에 말이 멈춰 섰다.
진한 갈색의 털을 가진 오십 마리의 말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명마였다.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멈춰 선 말은 거친 숨소리도, 투레질도 없이 조용했다.
가장 앞선 기수가 옆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비켜서고 앞으로 늘어트리고 있던 깃발을 바로 세웠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 말에서 내려 이드 앞으로 걸어왔다.
화려한 붉은 망토를 걸친 오십 대의 호한이었다. 붉은색의 파츠 아머가 양어깨와 왼쪽 가슴 그리고 양쪽 허벅지만을 가리고 있었다. 정말 필수적인 최소한의 파츠 아머만을 장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장착한 장갑(裝甲)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일 것이다.
“끄응…… 적색 기사단 라발 트레인 단장입니다, 마스터.”
옆에서 에단이 작게 신음하면서 호한의 정체를 밝혔다.
라발은 에단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데도 에단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이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단단해 보이는 눈에는 어떤 감동이 흐르고 있었다.
“… …”
그는 이드 앞에 서서 잠시 이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냐, 이 남자!’
이드는 뜻 모를 그의 행동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눈빛이 이상해요. 설마, 이드에게 반하거나 한 건 아니겠죠? 크큭.]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이드가 라미아의 농담에 치를 떨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라발이 주먹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순간 사방에서 놀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당연했다. 라발의 행동은 기사가 자신의 충성을 맹세한 주군과 제국의 주인에게만 바치는 예(禮)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저 청년이 누구이기에!’
평생에 한 번 보기 어려운 대단한 기사들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의문을 가지고 이드에게 모여들었다.
그때 라발의 뒤를 이어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라발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라발의 입이 열리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적색 기사 라발 트레인이 모든 검사의 스승이시며, 위대한 기사의 찬란하고 영광된 이름을 계승하신 이드님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라발을 따라 기사단의 목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그들의 절도 있는 예와 박력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굽혔다.
[에헴!]
이드의 머리 위에 있던 라미아가 괜히 으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쯧, 사람들이 말이에요, 진작에 좀 알아볼 것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와도 말을 놓던 사람을 알아보는 게 늦어도 너무 늦… 킥!] 이드는 헛소리를 하는 라미아를 잡아서 일리나의 손에 쥐여 주고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그만 일어나시죠. 저는 이런 인사를 받을 사람은 아닙니다.”
라발이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충분히 받으실 만하십니다. 대륙 모든 검사의 존경과 흠모를 받으시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십니다. 저희 검사들에게는 감히 제국의 황태자님과 같으신 분이시지요. 저는 살아생전 마인드 마스터께 꼭 기사로서 최고의 예를 바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마인드 마스터는 아니라도 그 후예께서 나타나셨으니 어떻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오히려 저와 적색 기사단 모두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드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라발의 말에 머리카락 끝이 돌돌 말리는 것 같았다. 이런 순수한 호의는 정말 처음이다 싶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드라고 불러 주세요.”
“라발 트레인입니다. 라발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떠억!
막 기사에게 끌려가던 타르코지의 입이 주먹 하나가 쉽게 들어갈 만큼 크게 벌어졌다.
갑자기 등장한 적색 기사단의 모습에 잠시 멈춰 섰다가 생각도 하지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도대체 저자는 누구란 말이냐!’
타르코지는 머리가 웅웅 울리고 심장이 쿵덕쿵덕 뛰는 것을 느꼈다.
죽을 위기에서 타르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제국 기사에게 넘겨지며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다. 돈이야 제법 들겠지만 살아날 수만 있다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지 상단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돈만 잘 쓰면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아나기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자들을 찾아내서 죽이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대에게 난데없이 소드 팰러스의 적색 기사단이 나타나서 고개를 숙였다. 소드 팰러스의 기사단이 어떤 존재던가.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검을 바치는 존재는 오직 소드 팰러스의 주인과 제국의 주인뿐이다.
다섯 기사단의 단장은 모두 제국에서 이름 높은 위대한 기사이거나 작위를 자식에게 물려준 전대 귀족들이다.
그렇다면 저 이드라는 남자가 그들과 같은 존재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반대로 한 가지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죽었구나.’
바로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연줄을 만들어 놓은 자들은 절대 소드 팰러스의 기사단보다 윗줄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드 팰러스의 눈치를 보는 존재들이었다.
꽈아악!
조금 전 타르코지와 기사 간의 사이처럼 느슨하던 포승줄이 꽉 조여지며 타르코지의 목을 조여 왔다. 슬쩍 돌아본 기사의 눈이 섬뜩하다.
타르코지를 묶은 포승줄을 마치 제 목숨줄처럼 잡고 있다.
그도 이제 타르코지가 절대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 소드 팰러스의 기사단은 모든 기사가 한 번쯤 꿈꾸는 곳이었다.
그런 곳의 기사단이 예를 표한 사람이 넘긴 죄인을 허술히 할 만큼 그의 간이 크지는 않았다.
털썩!
타르코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기사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직 이드와 적색 기사단이 자리를 뜨지 않은 때문이었다.
“뭐라! 적색 기사단이 무릎을 꿇어?”
국경 요새를 책임지고 있던 그레엄 자작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