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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7화


514화

그레엄 자작은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제국에서 최고의 기사단을 논할 때 꼭 들어가는 것이 소드 팰러스의 기사단이다. 자연 그들의 자존심도 제국 최고급이다.

그들은 절대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벤든 후작의 명령을 거부한 일은 유명하지.’

그레엄은 과거 유명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며 물었다.

“적색 기사단을 무릎 꿇린 자가 누구냐?”

“그것이…….”

보고를 위해 달려왔던 기사가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레엄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보고하지 않고 뭐하나? 자네의 임무는 보고 들은 대로 내게 보고하는 일이야. 자네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레엄의 호통에 슬그머니 앞으로 숙여지던 기사의 고개가 다시 뻣뻣이 섰다. 그레엄의 말에서 자신의 실수를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충! 시정하겠습니다. 적색 기사단의 라발 단장님께서는 젊은 검사에게 모든 검사의 스승이시며, 위대한 기사의 찬란하고 영광된 이름을 계승한 이드 님이라고 불렀으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그레엄은 놀랐다. 기사의 실수로 찡그리고 있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질 정도로 놀랐다.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 아니라도 그 이름이 주는 영향력은 대륙을 흔든다. 그런데 그 이름의 후예가 나타났다.

“과연 그렇다면 적색 기사단을 무릎 꿇릴 만하다.”

그레엄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며칠 전 적색 기사단이 갑자기 자신이 다스리는 곳에 나타나서 머물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놀랐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실이 보고된 것이다.

“마인드 마스터.”

그레엄의 목소리가 깊게 흔들렸다. 그 역시 마인드 로드를 익히고 있는 한 명의 검사로서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에 놀라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이었다면 이 보고를 받는 순간 당장에 달려 나가 후예의 손을 잡아 보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귀족이라는 자리는 그 순수한 흥분조차 쉽게 인정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지금 제국은 초인과 기사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져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레엄은 기사임에도 초인파에 속해 있었다.

기사 수업 중이던 그의 아들이 초인으로 각성한 때문이었다. 이미 적색 기사단의 출현도 아들을 통해서 초인파에 알린 후였다. 이런 정보의 제공으로 아들의 자리를 좀 더 다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설마 적색 기사단이 기다리던 사람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일 줄이야.’

그레엄은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기사로서 살아오며 수련한 마인드 로드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초인파로 줄을 서면서 한번 끝났던 고민이기 때문이었다.

‘리들리!’

그레엄은 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했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다. 내가 직접 나가서 얼굴을 봐야겠다. 너는 즉시 기사단을 준비시켜라. 그리고 문 앞에 있는 마법사에게 일러 리들리를 부르라고 전해라!”

“충!”


리들리가 바쁜 걸음으로 걷다가 어떤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복장을 점검하고 문을 두드렸다.

“3번대 리들리 그레엄, 보고 사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들어와라.”

거친 목소리가 출입을 허락했다.

리들리는 다시 한 번 복장과 머리를 점검하고는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방은 크지 않았다. 황궁에 있는 여느 집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방 안에 가득한 흙냄새였다. 흙은 고사하고 먼지 한 점 없는 방에서 마치 깊은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흙냄새가 진하게 났다.

이 독특한 향기가 가득한 방의 주인은 검은 옷을 입은 사십 대의 남자였다.

그는 무언가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듯 계속해서 펜을 놀리고 있었다.

“보고해.”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았지만 리들리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국경의 아버님으로부터 적색 기사단과 관련하여 급보입니다. 적색 기사단이 국경을 넘은 젊은 검사를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툭!

뭔가를 적어 가던 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우묵한 눈동자가 리들리를 향했다.

“그 외 다른 내용은?”

리들리는 순간 말을 우물거리고 말았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의 출연이었다. 그는 이 소식을 그레엄 자작으로부터 듣고는 기절할 듯 놀랐다. 정말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자신의 상관은 반응은 했지만 전혀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아이언 마스크!’

리들리는 그들 사이에서 불리는 상관의 별명이 정말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상관의 말에 대답해야 할 때였다. 리들리는 그레엄 자작을 통해서 그가 전해 들었던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다.

“이후 아버님께서 직접 마인드 마스터를 확인한 후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연락이 다시 전해지는 대로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리들리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같은 거물의 출현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이번 일로 아이언 마스크에게 확실히 얼굴 도장을 찍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자의 대답은 리들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필요 없다. 이후 특별한 사건이 추가되지 않는 한 오지 않아도 좋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펜을 움직였다.

리들리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마인드 마스터에 관련된 사항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귀관은 우리가 그런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의 출현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접수된 상태다. 그저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자네를 통해 좀 더 빠르게 올라왔을 뿐이다.”

“……아…….”

뒷북이구나 싶었다. 리들리는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자신감도 함께 빠져나갔다.

“자네가 어디 있는지 잊지 말도록. 그만 나가 봐.”

“명심하겠습니다. 충!”

리들리는 크게 소리친 후 집무실을 나섰다.

‘그래, 여긴 황궁이지. 제국의 중심. 제국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

리들리는 국경에 있는 아버지의 소식에 들뜨고 자신만만해했던 자신이 어쩐지 우습게 느껴졌다.

남자는 리들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펜을 내려놓더니 한쪽에 장식처럼 놓여 있는 검은 구슬을 잡고 돌렸다. 검은 구슬이 아래위로 열리며 묵직한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금으로 만들어 둔 황금안黃金眼) 같았다.

“그레엄 자작의 연락이다. 그가 국경을 넘었다.”

리들리와 이야기할 때와 같은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황금안에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색 기사단이 움직였다는 소식에 혹시했더니 역시.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이는 게 좋겠군. 이제 너도 슬슬 바빠지겠네. 아무튼 빠른 소식 고마워.” 

남자와의 친분이 느껴지는 가벼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황금안에서 손을 뗐다. 황금안은 다시 검은 구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다시 펜을 잡아 몇 자를 적다가 펜을 손에서 놓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재밌어지겠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자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얼굴의 다른 부분은 그대로인데 입술만 움직이는 이상한 미소였다.


게일 인테그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방금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소드 팰러스의 소식을 전해 듣고 나오는 길이었다.

상관은 그를 급히 찾기에 그는 무언가 다급한 사건이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집무실에서 접한 소식은 적색 기사단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무사히 접촉했다는 소식이었다.

상관은 그것에 크게 기뻐했고, 안도했다.

그와 함께 소식을 전해 들었던 동료 기사들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 자리에 있을 때는 함께 기뻐하고 환호했다.

‘그게 내 진심일 줄 알았다.’

게일은 스스로를 향해 쓰게 웃었다. 정말 그때의 마음은 가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헌데 이후에 상관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집무실을 나와 혼자가 된 후에 드는 감정은 그것이 아니었다. 기쁨과는 정반대에 있는 칙칙하고 검은 것이었다.

그것은 질투라는 이름과 닮아 있는 모습이라고 게일은 생각했다.

“하하. 내가 겨우 이 정도의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게일은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검공자 게일. 소드 팰러스의 왕자. 검후의 유일한 제자.

게일은 그렇게 불렸다.

하나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검후의 유일한 제자. 검후란 시르피 태대공녀를 검사들이 존경하며 붙인 칭호였다.

시르피에게서 검을 배운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녀의 수련법은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지 말이다.

하지만 소드 팰러스의 사람들은 게일을 검후의 유일한 제자라고 말한다.

검후에게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침을 받은 것은 게일이 유일했다.

검후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만큼 그의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천재였다.

검후는 게일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는데, 이 모습을 주변에 감추지 않았다. 자연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관심을 특별하게 생각했고, 게일을 그녀의 후계자 위치에 올려 놓게 되었다. 그때부터 게일은 검공자로 불렸다.

그의 실력이 더 높아지고, 검후의 결심이 있다면 그녀의 뒤를 이어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자연 그런 이야기는 게일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도록 만들었다.

소드 팰러스의 검사들에게 지위와 권력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존경하는 검후가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라는 타이틀은 소드 팰러스의 검사들이 게일을 특별하게 보도록 만들었다.

거기에 게일이라는 젊은 검사의 품성도 나쁘지 않았다. 검후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천재로서 만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사람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이 더욱 그를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 선순환이 좋은 결과들로 이어졌다. 그에 대한 호감은 그의 아버지에게 미치고, 결국은 게일의 아버지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검후의 가르침 속에서 벽을 만났을 때는 잠시 숨을 돌리라는 뜻으로 소드 팰러스의 이름으로 제국의 심장인 황궁에 보내어지기도 했다. 황궁에서도 검후의 유일한 제자라는 타이틀은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황궁의 어린 기사들은 게일을 질투하면서도 가까워지고자 했고, 부러워했다. 각 가문의 레이디들은 소문의 검공자를 만나기 위해 열심히 치장하고 그 앞에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태양인 황제의 관심도 받았다.

그의 허락 아래 공주와도 자주 만났다. 황제는 차기 소드 팰러스의 주인과 정치적인 혈연 관계를 원하는 듯했다.

사실 이쯤 되면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누구나 부러워할 위치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검후가 실종된 후 게일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막상 비상 상황이 온다면 게일이 검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 버린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게일의 마음속에 야망이라는 것이 싹텄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에는 모두가 환호했으며,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게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가지고 있던 관심과 사랑과 명성이 모두 이름도 알지 못하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일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접촉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이드라는 이름이 분명해지는 순간, 게일은 이드라는 이름처럼 분명해진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실제 검후의 뒤를 이어 그가 소드 팰러스를 책임질 것 같았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드에게로 넘어가 버리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엔 이드를 마중하기 위해서 적색 기사단 전체가 움직였다.

게일은 한 번도 소드 팰러스의 기사단의 호위를 받은 적이 없었다. 공공연히 검후의 제자이자 소드 팰러스의 왕자라고 불릴 때도 말이다.

그런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이드를 위해 적색 기사단이 움직인 것이다.

오직 검후를 위해서만 움직이던 소드 팰러스의 기사단이 말이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게일은 애써 피하고 있던 마음속의 검은 그림자를 분명히 인지해 버렸다. 그것은 자신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것은 그동안 무럭무럭 커 온 자신감과 오만과 욕망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후우. 스승님.”

게일은 실종된 검후 시르피 태대공녀가 유난히도 보고 싶고 그리웠다.


그날 황궁에 있는 두 세력은 한 가지 소식으로 시끄러웠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적색 기사단이 직접 마중을 나선 겁니까?”

복잡한 국경 관문을 급히 빠져나온 이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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