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화
515화
라발은 이드와 나란히 말을 몰고 있었다.
이드의 반대쪽에 일리나가 말을 몰고 있었고, 에단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적색 기사단이 이드 일행이 이용할 말을 비롯해서 예비로 여섯 마리의 말을 준비한 덕분에 이드도 그들과 같은 커다란 전마를 타고 있었다.
이드는 앞서가는 적색 기사단의 깃발을 든 기사와 그 뒤를 따르는 네 명의 기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에단이 은밀하게 이야기를 전해 주길래 소드 팰러스에서 조용히 움직여 주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라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드를 마중 나오기 전에 에단에 대한 이야기와 에단의 간단한 보고는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자네는 타국에 있었지 않나. 여러 나라에서 자네를 원하는 상황이었고, 당당하게 자네를 찾아다닐 수는 없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소드 팰러스와 관계가 좋지 못한 초인파에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서 좋을 것도 없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고 말이야. 사실, 에단이 자네를 만난 것도 운이지. 실제로 에단이 자네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
라발은 어색한 표정으로 뒤따라오는 에단을 슬쩍 바라보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자네가 주변의 관심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저거 아마 그레센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요.]
이드는 라미아가 전해 오는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때는 복잡하게 얽히는 게 싫어서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으니까.’
무엇보다 그때 최우선 순위는 일리나였다. 그때 이드를 알아보고 쫓아오던 사람들을 상대했다간 일리나를 언제 찾을 수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때는 최우선 순위가 따로 있었으니까요. 더구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는 없었으니까요.”
“잘했네. 그게 현명한 행동이지. 상대를 어느 정도 알고 만나야 손해도 보지 않거든. 그리고 덕분에 자네를 이렇게 아나크렌으로 모시고 올 수 있지 않았겠나.”
장난스러운 마지막 말에 이드는 가볍게 웃었다.
라발은 묵직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말도 잘하고 가벼운 농담도 던질 줄 아는 남자였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럼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조심하다가 갑자기 적색 기사단이 움직인 건 제가 제국령 안으로 들어온 것 때문인가요? 아니면, 앞서 말씀하신 초인파 때문인가요?”
“하하. 자네 말이 모두 이유가 되겠지.”
라발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의 움직임에 흐트러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의 말이 다시 이어질 듯 보이자 일리나와 라미아가 좀 더 이드의 곁으로 말을 몰았다. 두 사람도 적색 기사단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인 때문이었다.
라발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네도 에단에게 들어 알겠지만 검후께서 실종되셨네.”
이드는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검후?”
“아, 태대공녀님을 우리들은 검후라고 부르네. 그분이 검으로 왕과 같은 경지에 오르셨기 때문이지.”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대로 시르피가 벽을 넘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하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검후는 단순히 제국의 어른을 뜻하는 태대공녀보다 그녀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는 칭호였다.
“우리는 자네를 찾았다는 보고에 기뻐했네. 그리고 동시에 자네의 안전에 대해서 고민했지. 우선 자네가 일리나스에 있었기 때문에 일리나스의 방해 없이 무사히 제국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문제였어.”
“…..일리나스는 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던데요?”
이드는 조금 섭섭하고, 또 조금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말했다.
제국이 이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데 일리나스는 이드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제국과 왕국이 가지는 정보력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하하하.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그리고 우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일리나스도 자네를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어. 한발 늦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래요? 무슨 준비를 했는데요.”
“자네가 제국에 들어와서 이미 끝난 일인데 궁금할 게 뭔가. 그보다 이야기를 계속하지. 그렇게 걱정하던 중에 우리는 에단에게 보고를 받았네.
자네가 곧 국경을 넘을 거라는 소식이었네. 우리는 기뻐할 일이지만 초인파 입장에서는 좋아하지 않을 일이지. 특히 타국과는 다르게 제국은 저들의 영역이야. 알게 모르게 자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네. 물론, 우리도 제국에서의 영향력은 초인파에 뒤지지 않아. 하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모든 경우의 수를 우리가 막아 낼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 더구나 자네의 움직임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도 아니거든. 중간에 사라진다고 해서 누가 따지거나 공식적으로 조사가 들어올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거지. 우리는 그것을 큰 문제라고 판단했네. 그들이 정말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자네가 위험하다고 말이야.”
잠시 말을 끊은 라발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빛 또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드는 그의 말 속에서 그들이 초인파의 힘을 상당히 크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에단에게 들었던 말과는 다른데.’
이드는 말 위에서 한 손에 들고 있는 물수건을 탈탈 털어 대고 있는 에단을 슬쩍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라미아에게 전해졌고, 그대로 라미아를 통해 일리나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게요. 분명히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이드의 생각을 들은 라미아와 일리나의 말이었다.
‘일리나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게 맞겠죠. 정확한 건 직접 확인해 볼 수밖에 없겠네요.’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하. 전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어요. 누가 절 공격한다고 순순히 당해 줄 성격은 아니에요.”
“…………하지만 검후께서 실종되셨네. 우린 자네까지 잃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네.”
라발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
이드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라미아를 통한 일리나의 목소리가 이드의 머리를 두드렸다. ‘이드, 아무래도 저쪽에선 시르피의 실종을 납치로 단정 짓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이드의 실력을 시르피 밑에 놓고 있는 그들의 생각도 들어 있었다. 검후도 납치를 당했는데, 너라고 별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 안에서 판단한다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런 논리다.
1. 검후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
2. 그, 혹은 그들은 검후를 흔적도 없이 납치할 만한 실력을 가졌다.
3.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등장했다.
4. 그는 검후보다 어리다. 당연히 검후보다 실력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5. 검후를 납치한 그, 혹은 그들이라면 이드도 납치하거나 죽여 버릴 수 있다.
라미아가 말했다.
[만약 그런 세력이 있다면, 적색 기사단이 지킨다고 해도 별수 없을 텐데요.]
이드는 앞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중에 적색 기사단이 무릎을 꿇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아마,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쇼였을 테지.’
이드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상태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도 손을 쉽게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 그것이 소드 팰러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드는 소드 팰러스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에단에게 한 가지를 확인했다.
—에단, 소드 팰러스에 나에 대해서 보고 안 했지.
흠칫.
―옛! 마스터. 함부로 흘릴 이야기가 아니라서 아직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에단은 갑작스러운 전음에 놀라서 급하게 대답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인드 마스터. 그런 특급 정보를 용병 길드 같은 데서 함부로 언급할 수는 없지.’
용병 길드의 신용이 아무리 믿을 만하다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보는 따로 챙기고 있을 것이다. 살짝 귀만 기울이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그냥 버릴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용병 길드는 그런 곳의 안방 같은 곳에서 마인드 마스터에 대한 보고라니.
에단은 괜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나저나 계속 거슬리네. 저거 그냥 저렇게 놔둬도 되나?”
에단은 다시 대화를 이어 가는 이드와 라발을 바라보며 속으로 끙끙 알았다.
몇 마디 간단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한 후, 이드의 요청으로 라발은 이드에게 말을 놓았다. 이드는 라발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대신 라발은 이드에게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했다. 이드에게 단장이라고 불리기는 부담스럽다나?
‘부담이 아니라, 말을 놓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이 양반아!’
뒤에서 듣고 있던 에단은 속으로 악을 썼다.
그 뒤로 라발이 이드에게 자네라고 말하며 말을 놓을 때마다 에단은 속이 검게 타는 것 같았다.
‘이후에 저 양반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사실을 알게 된 라발이 원망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을지. 그 후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에단이었다.
사실, 중간에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냥 밑에 있는 일반 검사도 아니고, 명색이 소드 팰러스의 오대 기사단 중 적색 기사단의 단장이다.
소드 팰러스의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먼저 사실을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에단의 행동은 일리나에 의해서 막혀 버렸다.
—에단, 이드에 대해서 말하면 안 돼요.
[맞아요. 맞아. 아무래도 이드가 자신이 늙었다는 걸 실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ᅳ라미아! 허위 정보 뿌리지 마라! 그리고 시간 기준은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라고. 늙었다니!
-어머나, 이드. 그럼 지금까지 당신을 기다린 제 정성을 무시하는 거예요?
…..일리나 사랑해요!
잠시 세 가족의 코미디가 있기는 했지만, 에단에게 내려진 명령은 하나였다. 이드의 정보에 대한 침묵.
‘모든 것은 마스터의 명령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마스터의 명령이기 때문에.’
에단은 혹시라도 라발이 이후에 이 일에 대해서 따지고 들면 모든 책임을 이드에게 떠넘기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소드 팰러스에 도착해서도 마스터에 대한 정보를 함구해야 하나?’
에단은 이후에 틈이 나는 대로 이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색 기사단과 함께한 소드 팰러스까지의 여행은 한마디로 무사통과였다. 폭주였다.
감히 적색 기사단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 마음을 먹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적색 기사단은 그런 가능성을 피해서 경로를 계획했다.
국경 요새의 그레엄 자작도 그런 경우였다. 막 요새를 벗어나기 전에 나서기는 했지만 비키라는 라발의 말에 감히 접근하지조차 못했다.
“감히 네가 나 라발과 적색 기사단의 길을 막는단 말이냐. 비켜라!”
작위도 없는 기사단의 단장이 자작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소드 팰러스의 적색 기사단의 힘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영지에서는 적색 기사단이 지나갔다는 보고만 겨우 챙길 뿐. 그들이 다가올 시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드는 일리나스를 떠나며 겪은 사건 사고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소드 팰러스에 당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