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0화
517화
“단장님, 뒤에 후배들이 붙었습니다.”
말을 달리던 기사가 라발에게 소리쳤다.
라발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소드 팰러스다. 그리고 따라오는 녀석들은 기사의 말대로 그의 후배와 같은 자들이었다.
“그냥 두어라. 아무래도 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때문이겠지. 바쁘게 말을 달린 우리보다 소문이 더 빠르게 퍼진 모양이다. 하하하.”
상황을 짐작한 라발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일행은 빠르게 말을 달려 중앙의 성 앞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렸다. 뒤에 따라오는 수련생들을 기다려 주는 모습은 일절 없었다.
성문 앞에는 일단의 인물들이 나와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그리고 모습도 가지각색인 인물들이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 상당한 강자라는 것이고, 대부분이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법사로 보이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검 외의 다른 무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는 자들답다. 어떻게 보면 무림의 문파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가 말에서 내리자 도열해 있던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깔끔히 정돈된 옷을 입고 있는 삼십 대의 남자였다. 그 역시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단정한 외모나 눈에 띄는 옷이 마치 집사처럼 보였다.
“이드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이드 님께서 소드 팰러스에서 머무시는 동안 옆에서 모시게 될, 소드 팰러스 검궁(宮)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러셀 메타손이라고 합니다.”
‘집사 맞구나.’
이드는 보이는 그대로의 소개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런데 과연 소드 팰러스라고 할 만하다 싶었다. 어떻게 된 것이 집사와 같은 위치의 인물조차 상당한 실력의 검사이지 않은가.
‘기대 되는데.’
이드는 얼마 동안 소드 팰러스에서 머물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겪게 될 이곳에서의 생활이 기대되었다. 동시에 이런 소드 팰러스에서 시르피를 납치했다고 짐작되는 실력자들의 등장에도 마음이 쓰였다.
혹시나 혼돈의 파편과 연관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시르피를 소리 소문 없이 납치해 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그들이 뜬금없이 시르피를 납치할 이유가 없지.’
이드가 그레센에 돌아와 일리나와 같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존재들이긴 하지만, 또 그들의 힘을 잘 알기 때문에 시르피의 일에는 연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드는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고 러셀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드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소드 팰러스 같은 멋진 성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기 언덕에서 봤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특히 이곳은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하하하. 잘 보셨습니다. 이곳이 바로 소드 팰러스의 중심이자 검후께서 머무르시는 검궁입니다. 소드 팰러스의 심장인 동시에 머리와 같은 곳이지요.”
과연 집사의 피가 흐르는 사람인가. 그가 관리하고 있는 검궁을 칭찬하는 이드의 말에 이드를 향한 러셀의 시선에 진한 호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보게, 러셀, 계속 여기 서 있을 생각인가?”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라발이 말했다.
그러자 러셀이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이런 제가 잠시 흥분했군요. 많은 분들이 이드 님을 뵙기 위해 직접 나오셨고, 검궁 안에서 이드 님을 기다리시는 분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러셀의 말대로 어느새 적색 기사단을 따라 잡은 수련 기사들이 씩씩거리면서 그들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잡아먹을 것 같은 뜨거운 눈으로 이드와 일리나, 그리고 에단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에단이 소드 팰러스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수련 기사들을 못 본 척하고는 돌아서서 같이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들과 인사를 하는 것보다 검궁 안에서 이드를
기다리는 더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중 몇 명은 러셀도 그냥 다음에 얼굴을 보라며 돌려보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이드는 러셀의 소개로 몇몇 인물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인테그란 후작도 끼어 있었다. 그는 호방하고 호탕한 웃음으로 이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을 어색하게 느낀 여성이 있었다.
[어쩐지 별로인 사람이에요.]
인테그란 후작에 대한 라미아의 가벼운 평가였다. 하지만 그 가벼운 평가를 이드도, 일리나도, 심지어 라미아 본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인테그란 후작에 대한 라미아의 첫 인상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검궁이라고 불리는 소드 팰러스 중앙의 성은 밖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도 화려했다.
조잡한 화려함이 아니라 고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었다. 색체는 대체로 밝은 색이 사용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걸린 그림과 조각도 대부분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사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이 여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것도 없었다.
“황제께서는 일찍 홀로 되신 검후께서 검궁에서 위로받기를 바란다고 말씀하면서 이렇게 꾸미셨습니다.”
이드를 안내하면서 러셀이 꺼낸 말이었다.
확실히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하기는 했다.
러셀은 검궁을 이리저리 돌아 커다란 문 앞까지 이드를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다른 일행 분들은 따로 편히 쉴 곳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러셀은 그들의 뒤를 따르던 하인들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서로 믿음을 줄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 것도 아닌데, 뭘 믿고 일리나와 떨어진단 말인가. 라미아와 함께 있으면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애초에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함께 보도록 하죠. 그녀는 제 가족입니다.”
러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드가 아직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이라도 힘없는 여자를 이 중요한 자리에 함께하겠다고 말하다니, 아직 젊어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드 님, 접견실 안에 계시는 분들은 소드 팰러스의 보물과 같은 분들이십니다. 또 안에 들어가시면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잠시 편한 곳에서 쉬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차근차근 은근히 분위기를 풍기며 말하는 러셀의 말이었다.
이드는 그런 러셀의 속을 짐작하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러셀은 갑작스러운 이드의 웃음에 움찔했다. 순간 지금 상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드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에 러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에게는 가족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녀와 함께하지 못할 일이라면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름다운 검궁을 직접 봤으니 여행의 대가로는 충분하네요.”
‘진짜다!’
러셀은 이드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안 된다고 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릴 것이다. 검궁을 관리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본 러셀은 확신했다.
그 순간 러셀의 귓가에 묵직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같이 들이게.
오러텅으로 전해진 목소리는 러셀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페시딘 님.’
러셀은 바로 그의 뜻을 알고는 이드에게 방문을 열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안으로 드시지요.”
‘전음이군.’
이드는 미세하게 흔들린 마나의 흐름에 러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가볍게 미소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드는 그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일리나와 에단 그리고 라발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러셀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구도 가까이 들이지 말고 철저하게 지켜라!”
“옛!”
순간 단순한 하인처럼 보이던 네 명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흐르며 문이 닫혔다.
접견실은 넓었다. 그 중앙에는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길고 거대한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제일 상석에는 네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일곱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라발은 그중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잘 보니 라발과 비슷한 복장에 색깔만 달랐다. 앞서 들었던 소드 팰러스 오색 기사단의 단장들인 듯 보였다.
[그런데 한 명이 비네요. 색깔로 따지면 은색 기사단의 단장이 없네요.]
‘그러게.’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드 팰러스에 대한 에단의 설명을 떠올리며 나머지 인물들을 살폈다.
‘보자. 그럼 제일 상석에 있는 영감님들이 삼검왕(三劍王)인 것 같은데, 한 사람이 더 있네? 실력도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누구지?’
이드는 처음부터 에단이 전해 준 정보와는 다른 모습에 슬쩍 에단을 한 번 째려보고는 나머지를 살폈다.
‘그 밑으로 실질적으로 소드 팰러스를 운영하는 스미스 클라인 백작이 있고 그 밑으로 크게 네 개의 부서가 있다고 했지. 대신 기사부의 대표는 한 명이 아니라 오색 기사단의 다섯 단장이라고 했으니까, 은색 기사단장을 빼고 저 일곱이면 대충 다 모였다고 보면 되겠어.’
소드 팰러스는 검후를 중심으로 그녀를 대신해서 소드 팰러스의 중요 결정을 하는 삼검왕과 실질적인 업무를 진행하는 검은 여우로 불리는 클라인 백작. 그리고 그 백작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4부와 12과로 나뉘어 있다고 했다.
이드가 그들을 살피는 중에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들 중 한 사람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이 이드라고 했던가. 환영하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여.”
그 말을 들은 이드의 눈썹이 미묘하게 휘었다. 말을 하는 노인은 여전히 앉아 있고, 이드와 일리나는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채였다.
이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예의가 아니었다. 이것은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양이었다.
‘호오. 처음 보는 자리에서 기를 죽이시겠다?”
사람을 청해 놓고 할 짓은 아니었다. 첫 만남에서 나오기에는 치졸한 수였다.
‘검왕이라는 이름이 울겠다.”
이드는 소드 팰러스라는 곳이 다시 보였다.
“…………이드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단은 삐딱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이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는 얼굴을 구겼다.
‘아아…………… 제기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