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95화
1330화
붉었다가, 검었다가, 다시 밝아진다.
벽면에 비치는 영상이 휙휙 바뀐다.
그때마다 그걸 보는 영혼의 관 마법사들은 단체로 호흡 곤란을 경험해야 했다.
“느허억…….”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목이 졸리는 기분에 옷자락을 잡아 당겨보지만 효과는 없다.
“마법이…… 우리 마법이…… 저렇게 무너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질문도 뭣도 아니었다. 억울한 신세 한탄이라고 할까. 마치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영상에 비치는 내용은 마법사인 그에게는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돌팔매질 따위에 차원진이 발생한다고?
백색 검강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공간 중첩 소환진이 소멸한다고?
이런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한정된 공간 안에서 발생한 소규모 차원진이라도, 한낱 돌팔매질에 차원진이 발생할 수는 없다.
검강이 아무리 대단해도 차원을 자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이건 한 명의 마법사로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화산폭발 속에서 멀쩡했던 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으니, 심적 충격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 말씀들 좀 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냐고요!”
“뭘 따지나! 당연히 거짓이지! 가짜야! 속임수라고!”
“・・・・냉정하게. 그렇게 소리친다고 사실이 바뀌지 않아.”
“명예 후작이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소환진 정도의 대규모 마법진을 파괴할 정도였다니…… 섬뜩합니다.”
“지금 적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요? 당장 저 괴물 같은 놈을 어떻게든 해야 할 게 아니오!”
의심하고, 부정하고, 분노했다.
그만큼 이드가 일 검에 공간 중첩 소환진을 소멸시킨 일은 그들에겐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단순히 검기를 휘둘러 공격 마법을 막아 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공간 중첩 소환진이 고작 검에 의해 파괴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들이라고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드가 1층에서 무차원 공간을 체험하며 그 구성과 취약점을 신안으로 꿰뚫어 보고 머리에 담았을 줄 말이다.
수많은 변수를 예상하고 대비하는 마법사들이지만, 그와 같은 능력은 그들의 계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
마법사들이 알고 있는 최고의 기사는 검후였고, 알려지기로 검후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변수 이상의 특이점.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마법사들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부관주는 이런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복잡미묘했다.
“생각보다 제가 나설 시간이 빨라졌군요.”
운이 좋으면 엘로자의 활약으로 침입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
발목을 잡기는커녕 제대로 된 공격 마법 하나 못 쓰고 당해 버렸다.
과연 이 결과는 이드가 강해서일까, 아니면 엘로자의 실력이 형편없어서일까?
부관주는 문득 그를 플로어 마스터로 임명한 자신의 결정에 회의감이 들었다.
“부관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끝난 이야기지 않습니까. 제가 가서 엘로자 마법사를 보낼 테니, 장로께서는 부상이나 잘 살펴 주세요.”
부관주는 차분한 모습으로 장로의 불안을 달랬다.
하지만 장로의 마음은 그 정도로 달래질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영상 너머로 전해지는 이드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다.
“지금 문제는 엘로자가 아닙니다. 저걸 보고도 진정 저자와 싸우셔야겠습니까.”
“네. 그것이 부관주로서의 제 역할이니까요.”
“그게 어찌 부관주의 일입니까. 그보다는..
장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몫이 아니다. 목 아래까지 칼을 찔러 들어온 침입자들. 강력한 적에 맞서 가장 앞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야 할 사람은 바로 탑주다. 혹시 탑주가 부관주에게 침입자에 대한 대응을 맡겼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건 아닐까.
장로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혼란만 일어난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부관주를 제외하고 침입자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고 자신이 달려가 탑주를 끌어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 외에는 남은 마법 전력을 모두 쏟아 내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그러기엔 영혼의 관에 속한 마법사들의 전투 경험이 너무 떨어졌다. 과연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초인기와 심장을 향해 찔러 오는 검 앞에 물러서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마법사들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그렇게 해서 침입자들을 막는다고 해도 그 후가 문제다.
그렇게 해서 생겨날 사상자들.
그들 하나하나가 초인 마법의 중요한 연구자들이다. 그들이 사라지면 초인 마법의 완성이 몇 배로 느려진다.
지금을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장로로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였다.
그렇게 방법이 없는 중에도 부관주를 다시 한번 막아섰다. 이대로 보냈다가는 그녀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침입자를 막아 낼 완벽한 방법이 없는 이상, 부관주의 결정은 막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
이런 장로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부관주 이더비히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장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장로만이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목소리를 전했다.
“검후와 명예 후작은 분명 강력한 적입니다. 그렇다 해도 제가 쉽게 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믿어주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부관주.”
“대신, 만에 하나.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도 침입자의 전력이 강력하다면……… 탑주님을 부탁합니다. 장로께서 저 대신 탑주님을 챙겨 주세요.”
“…..”
“믿겠습니다.”
조용한 부탁에 장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부관주의 저 부탁이 마치 유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에 답하는 순간 부관주의 죽음이 기정사실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관주는 그런 장로의 모습에 살포시 웃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관주는 재차 장로의 손을 꼬옥 잡아 주고는 돌아섰다.
이제 미완의 마탑을 위해, 탑주를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훅.”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미는 두려움과 걱정을 단숨에 뱉어 낸 부관주가 6층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로 그때였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다오.
탑주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탑주님?’
기대하지 않았던 탑주의 목소리에 부관주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탑주는 기다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기대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탑주의 대응을 포기하고 있었다. 다만 탑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그런 시점에 탑주의 목소리가 전해진 것이다.
정말 방법이 있는 걸까?
한 시간 후면 어떤 준비가 끝난다는 말인가. 당장이라도 그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이어지는 탑주의 말에 모두 녹아내리고 말았다.
-내 딸아.
“아아…….”
언제부터였을까. 단 한 번이라도 탑주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
딸이라는 그 말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이야. 부관주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눈물이 되어 흐르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물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적을 앞에 두고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일.
“네. 아버님.”
지금은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마음에 거슬리는 것들이 사라진 덕분일까. 그녀는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플레타의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6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로자에 있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 이상 영혼의 관에 속한 마법사를 괴롭히는 일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또각또각.
경고와 함께 선명하게 들리는 구두 소리.
그와 함께 계단에서 나타나는 부관주의 모습에 플레타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그 작은 행동에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뒤틀렸는지가 잘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부하들에게 그만한 피해를 입힌 죽일 놈을 이제 겨우 좀 괴롭히려 할 때 방해를 받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호오~ 드디어 높으신 양반이 행차하신 모양인데. 그게 이렇게 젊은 여자일 줄이야.”
“내가 여자인 것이 불만인가요. 바벨의 초인.”
“그럴 리가. 오히려 눈요기가 돼서 좋지. 그런데 말이오. 첫인사가 생긴 것답지 않게 너무 거칠어.”
마치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자존심 싸움을 시작한 것 같은 말투.
하지만 그런 중에 플레타의 눈이 날카롭게 부관주와 엘로자의 거리를 쟀다. 비록 갑작스러운 기습에 물러나긴 했지만, 엘로자를 이대로 넘겨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
그러나 부관주의 행동은 이런 플레타보다 빨랐다.
파팟.
계단이 시작되는 입구에 서 있던 부관주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곳이 바로 엘로자의 옆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비된 상태인 엘로자는 부관주를 돌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와 향기를 통해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라도 했는지.
주루루륵-
깜빡이지도 못하는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고통에 의해 쥐어짜인 눈물이 아닌, 감사와 기쁨에서 흐르는 눈물.
“고생했습니다. 엘로자 플로어 마스터. 여기는 이제 제게 맡기고, 상처부터 치료하세요.”
“누구 마음대로!”
“이곳은 영혼의 관. 모든 일은 제 결정에 따라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