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25화
1360화
라울에 구박받는 플레타.
현 상황에 어울리는 장면은 아니지만, 익숙하다. 너무나 익숙한 그 모습에 긴장이 풀린 부대원들의 어깨가 툭 하고 떨어졌다.
“내 저럴 줄 알았다. 우리 대장이 그럼 그렇지.”
“저런 인간이었지, 우리 대장은.”
“그런데・・・・・・ 여기사님들이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유독 부끄럽네.”
“젠장, 어쩔 거야. 내가 올린 호감도, 대장 때문에 다 날아가게 생겼잖아.”
“어이어이, 상황 끝난 거 아니라고. 정신 차려, 이 자식들아.”
긴장이 풀리다 못해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부대원들.
가벼워진 그들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사라졌던 여유를 엿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더 큰 소리로 플레타의 흉을 봤다. 그들의 긴장을 풀어 준 대장에 대한 나름의 애정 표시였다. 플레타는 이런 반응에 내심 만족했다.
“빌어먹을 자식들. 욕을 하려면 안 들리게 하든가. 나중에 두고 보자.”
“다 자업자득이다. 평소에 잘했어 봐. 부하들이 저런 소리를 하겠냐?”
마침 거기에 더해지는 라울의 잔소리에 플레타가 하얀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런 넌, 저만한 부하들이라도 있고? 내 부하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애냐?”
라울은 상대의 반응을 한심해했지만, 내심은 또 달랐다. 플레타와 그의 부대원들 간 서로를 향한 말속에 끈끈한 신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플레타의 친구로서, 동시에 바벨의 간부로서 참으로 보기에 흐뭇한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다만 여유롭게 그런 기분을 느끼기엔 장소가 좋지 못했다.
쿠콰콰쾅!!
지금까지와는 규모가 다른 묵직한 폭발이 발생했다.
발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땅의 진동은 지진 같고, 얼굴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는 마치 태양이 땅에 떨어진 듯하다.
동시에 높이 치솟는 하얀 버섯구름.
“어떻게 생각하냐?”
그와 함께 폭음을 뚫고 들려오는 플레타의 목소리.
힐끗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아마 자신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라울은 질문에 대한 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리고 답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젠장! 이 끔찍한 현실이 제발 꿈이었으면 싶다.”
목 저 깊은 곳에 붙은 가래를 뱉어 내듯 꺼내 놓은 라울의 대답에, 플레타가 언제 창백해졌냐는 듯 금세 낄낄거렸다.
“크하하하하! 역시 너라도 별수 없구나?”
“저게 머리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어림도 없지. 그딴 소리를 하는 놈이야말로 사기꾼이지. 애초에 저딴 걸 보고 제정신일 수가 있나.”
부하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는 플레타.
그 역시 눈앞의 전투에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서 흔들리는 부하들을 다그치던 말도 사실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거대한 힘을 보며 느껴지는 무력감,
플레타는 여태 자신이 강자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의 오만은 아니었다. 바벨은 그에게 부대를 맡겨 그의 힘을 인정했다.
바벨뿐 아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자가 바로 플레타였다.
그러나 저기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드와 존 워스에 비하면 어떤가.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플레타 역시 자신이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전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강자’라는 기준이 한없이 높아져만 갔다.
저들과 자신, 또 자신과 부하들.
과연 그중 어느 쪽의 간극이 더 큰가.
잠깐의 혼란은 있었지만, 플레타는 곧 이를 대범하게 넘겼다.
자존심은 상했으나 그는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상대와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은 임무를 위해 항상 하던 일. 그에겐 익숙했다.
그렇기에 인정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은 강자다. 동시에 저들에 비하면 약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나 그건 그리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플레타는 폭염 속을 꿰뚫어 보기 위해 안력을 높였다.
그 속에서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두 인형.
그가 신경 쓰는 것은 그중 덩치가 큰 쪽이었다.
존 워스.
동시에 라울이 언급했던 혼돈의 파편.
초인을 위해, 그리고 바벨을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암적인 존재.
진짜 골치 아픈 문제는 그런 존재가・・・・・・ 저와 같이 강력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명예 후작이 보여 주고 있는 힘?
그건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처음 시작은 좋지 못했지만, 현재는 함께 손을 맞잡은 협력 관계인 데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상대다.
더욱이 서로 죽고 죽여야 할 절대적 명분도 없다.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충분히 공존이 가능한 사람이 명예 후작이다.
특히나 그는 단체가 아닌 개인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개인이 이 대륙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에 반해 혼돈의 파편인 존 워스는 어떠한가.
그는 모든 면에서 명예 후작과 대척점에 서 있다.
라울은 그가 버서커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그것 하나로 그는 바벨과 공존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적어도 바벨의 초인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제거해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더욱이 그는 개인이 아니다.
검왕이라는 그의 이름 아래 모여들 기사들이 얼마이며, 검왕의 권위로 발표될 발언에 흔들릴 사람이 또 얼마이던가.
그렇기에 라울이 혼돈의 파편에 대해 말했을 때, 플레타는 그들의 제거를 결심했다.
혼돈의 파편이 무엇인지 몰라도, 존 워스 정도라면 플레타 부대로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철저한 오판이었다.
애초에 플레타 부대로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검왕’이 아닌, ‘혼돈의 파편’일 때의 검왕은 그 정도로 터무니없이 강력했다. 저런 것을 죽여야 한다니.
막막함을 느낀 플레타가 눈을 부라렸다.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저 괴물이 나올 걸 알았던 거 같은데, 겨우 이런 전력이라니. 설마 죽고 싶었던 거야?”
“……미안하다. 변명 같지만, 나도 혼돈의 파편이 저런 것인 줄은 몰랐다.”
“아무튼, 우리 선에선 감당 불가야. 저건 최소 간부급들이 나서야 할 상대라고.”
부하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팔짱을 낀 플레타는 이런 의지를 분명히 했다.
라울도 심히 공감하는 바였다. 저건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총수라면 가능할까? 네 생각은 어때?”
“흐음, 글쎄……”
‘총수’의 언급에 플레타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에게 있어 총수는 언제나 최강이었다. 세상이 검후를 가리켜 대륙 최강이라 칭송할 때도, 그는 총수를 최고로 꼽았다.
기회가 없었을 뿐, 총수라면 검후가 가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 때문에 흔들린다.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설마 플레타의 입에서 저런 대답이 나올 줄이야.
라울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네 말은, 총수가 나서야 한다는 거로군.”
“……그래. 간부만으로는 피해가 클 거야.”
피해가 큰 선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적까지 제대로 제거하지 못하면 자칫 바벨이 휘청일 수 있다.
“젠장, 일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는군.’
조금 전까지 바벨이 크게 도약할 기회를 얻어 기뻐했는데, 이제는 강적의 등장으로 바벨의 존망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게 생겼다.
“그럼 말이지…………..”
복잡한 마음에 급히 말을 이을 때였다.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하자. 저기, 명예 후작 부인이 널 부르신다.”
“뭐?”
플레타의 말에 급히 돌아본 곳에서는 라미아가 작게 손짓을 하고 있었는데.
그 뜻은 분명했다.
와라, 이제 갈 시간이다.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여기 일은 맡길 테니, 잘 부탁하네.”
“맡겨 둬.”
“자네가 아니라 오탄 부대장에게 한 말이야!”
“…….”
“여긴 맡겨 주십시오. 제가 대장을 잘 컨트롤, 아니, 보좌하겠습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들이……”
볼을 씰룩거리는 플레타를 대신해 오탄이 답했다.
그에 라울은 믿겠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달려 나갔다.
그곳에서는 라미아가 손가락 끝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마법진을 뽑아내고 있었다.
투둥!
타당!
각기 다른 악기의 합주곡처럼 이어지는 공방.
그 도도한 흐름 속에 빠져 있던 이드는 뇌리에 들어차는 선명한 라미아의 목소리에 흐름에서 빠져나왔다.
라미아가 전해 오는 말은 길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약속되어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때 자신은 한 가지 일을 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드는 저 뒤에 모여 있는 일행들과의 거리를 가늠한 후 손을 뻗었다.
착!
저 멀리서 현란한 공중전을 펼치고 있던 일라이져가 순간이동을 한 듯 이드의 손바닥 위에 나타났고, 곧이어 거대한 검형이 일어나 일대를 휩쓸었다.
그에 따라 초근접전을 이어 가던 존 워스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그 역시 검을 들어 경계했다. 갑자기 달라진 흐름을 감지한 것이다. 특히 존 워스는 검은 브레스를 막아 내는 성벽의 구조를 단단히 했다. 어검으로 이어지던 공중전이 멈췄으니, 그쪽으로 전력이 쏠릴 것으로 예상한 것.
이드는 그 모습에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판단이 틀린 건 아닌데, 정답도 아니야. 자, 이제 전장을 좀 넓혀 보자고.’
“무슨 소리냐?”
그에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존 워스.
“무슨 소리는 거울이 깨지는 소리지.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이드.
같은 순간이었다. 허공을 딛고 선 그의 발아래서 회색 빛줄기가 쭉 뻗어 올라오며 이드의 모습을 가렸다.
“이건?”
그 회색 빛기둥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흡입력에 존 워스가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뭐야, 보기보다 겁쟁이잖아. 그럴 땐 오히려 과감하게 달려들었어야지. 그랬으면 혹시 알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빛의 기둥이 세워진 시점에서 이 수법은 완성된 것이었으니까.
원원대멸력.
비록 그 시작과 형태는 달랐지만, 완성된 것은 12대식의 원원대멸력. 바로 모든 것을 가두고 해방하는 힘이었다.
그것은 만약의 상황에 존 워스의 발목을 잡기 위한 안배였으며, 동시에 신호를 받은 때에 터트리기 위해 준비된 폭탄이었다. 폭탄의 성능은 확실했다.
쩌쩡!
이드의 입에서 나온 와장창, 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공간이 깨졌다.
하늘을 넘어 우주까지 뻗어 나갈 것 같던 원원대멸력이 하늘 중간에다 공간의 구멍을 뚫어 놓은 것.
그건 반대쪽으로 땅을 뚫고 내려간 쪽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절반씩 나뉘어 뚫어 놓은 공간 속으로 원원대멸력이 꼬리를 남기며 완전히 사라진 다음이었다.
쩌어어억!
하늘과 땅이 잘 익은 호박처럼 쩌억 갈라졌다.
갈라진 공간 너머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돌로 만들어진 벽. 하지만 그 벽은 일순간에 무너졌고, 그 뒤에 보이는 것은 하늘이었다.
별이 떠 있는 밤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