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58화
1393화
왕의 분노는 무거워야 한다.
왕가에 내려오는 격언 중 하나다.
왕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비쳤다면 끝을 보라는 잔혹한 뜻도 담겼다. 그 때문일까.
노성을 터트린 국왕의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다.
새벽부터 이어진 기다림의 끝에 올라온 타란 백작의 보고는 인내의 임계점을 간단히 넘겨 버리게끔 한 것이다.
“너는 이번 일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네가 지키지 못한 게 단순히 영혼의 관이라는 마법사 나부랭이의 연구실이라고 여겼느냐? 아니다. 네놈이 지켜야 했던 것은 이 마스의 미래이며, 영광이었다! 그런데 그걸 네놈이!!!”
“저, 전하! 부디 노여움을…………..”
얼마나 흥분했는지 국왕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기사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국왕이지만 저대로 두었다가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대신들이 간언했으나, 국왕은 무시했다. 오히려 목소리와 발언 수위가 더 높아졌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말리면 오히려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라고.
“나 크라이 반 마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네놈이 생각하는 그 어떤 처벌보다 잔인한…….”
그렇게 국왕의 흥분이 절정에 이르러 터지려는 순간.
“전하!”
늙었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국왕의 말을 끊었다. 그와 동시에 국왕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갔다.
순간 대신들은 자신들을 향해 덮쳐 오던 불길이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 같은 환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불안한 눈길을 보냈다.
감히 국왕의 말을 중간에 끊어 내다니.
이는 자칫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국왕이 분노한 상태가 아니던가.
당장 목을 자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다행히도 국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글거리는 눈빛을 거둬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참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다름 아닌 안데르 재상이었기 때문이다. 고장 난 관절과 허리 때문에 항시 앉아 있던 노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있던 것이다.
“내 말을 끊다니. 그대가 아니었다면 어떤 놈이었더라도 당장 목을 쳤을 것이다.”
“이 늙은 것의 목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가져가십시오. 그러나 전하. 부디 지금은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그럴 수 없다. 내 분노는 정당하다.”
국왕의 말은 옳았다.
이런 상황에 분노하지 않으면 언제 분노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냉정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겨우 죄인을 벌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 존귀하신 전하의 이름을 걸다니요. 이 나라의 재상으로서 그런 일을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노재상은 국왕의 분노에 지지 않는 꼬장꼬장함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국왕은 이런 노재상의 하얀 머리를 말없이 노려봤다.
노재상의 말에는 분명 틀림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은 고귀하게 쓰여야 했다. 겨우 이런 일에 쓰이기에는 품위에 맞지 않는다.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쉰 국왕이 보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는…… 항상 옳은 말만 해서 문제다.”
“허허허. 제 잔소리를 들으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흠.”
.굽혔던 허리를 편 재상의 농담에 국왕이 코웃음으로 답했다.
순간 대신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던 무형의 압력이 사라지는 느낌에 몰래 진땀을 닦아 냈다.
‘과연 안데르 재상이다. 누구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왕의 분노를 막아 내다니.’
‘아쉽다. 내가 나서서 간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랬다가는 목이 잘렸겠지?’
‘역시 안데르 재상이 아니면 전하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
‘……재상께서 은퇴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 아냐?’
현재 마스의 재상으로 있는 안데르의 나이는 여든여덟. 역대 마스의 재상을 다 뒤져도 최고령자였다. 당연히 마스의 대신 중에서도 최고령이다. 안데르 다음의 고령자가 일흔하나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나이 차가 있다.
그만큼 발언에 무게가 있지만, 동시에 낡은 인간이기도 했다. 슬슬 다음 주자에 재상 자리를 넘겨야 하지 않느냐는 말도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 그에 재상도 조만간 물러나겠다는 뜻을 비쳐 놓은 상태로, 제법 많은 대신이 그가 떠난 이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그러나 방금, 국왕의 분노를 정면으로 막아서는 모습을 본 대신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언젠가 재상이 물러나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라고. 최소한 이번 사건이 끝나고 다시 안정이 될 때까지는 안데르가 재상으로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안데르가 만약 이런 대신들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노인네에게 무슨 중노동을 시키느냐고 버럭 화를 냈을 일.
하지만 대신들은 그야말로 진심이었다.
분노한 국왕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고도 목이 붙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들 중 누가 있을까?
그들은 아무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안데르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말이다.
본래 말이란 참으로 요물인 것이, 말의 내용보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신들이 재상의 은퇴를 막을 방법을 궁리하는 한편, 수정구 위로 비치는 타란 백작을 쏘아봤다.
자신이 폭언을 쏟아내는 중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마 이대로 영상 너머 밖에서 대기 중인 기사를 불러 목을 치더라도 반항하지 않으리라.
까득.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간 국왕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재상의 말도 있으니, 백작의 처벌은 추후에 논의하겠다.”
“자비로운 결정이시옵니다.”
국왕의 말에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그의 결정을 칭송했다. 특히 그중 타란 백작과 가까운 인물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타란 백작의 처분에 관한 문제가 보류되었을 뿐, 진짜 심각한 문제들은 이제부터 하나하나 풀어 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정되어 있는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이 또한 대신들이 말문을 열기 힘들어하자 안데르 재상이 나섰다.
“전하, 일이 이미 벌어진 이상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전쟁입니다.”
“그렇겠지. 명분도 이득도 없는 싸움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장 오늘이라도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대로 준비를 하여 전쟁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당당히 국왕의 말을 끊고 나서던 노재상이 조심스럽게 말을 줄였다.
국왕은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고는 곧 똥 씹은 얼굴을 하고서 노재상이 다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전쟁을 막아야겠지. 그러려면 내가 제국에 고개를 숙여야 할 테고.”
이미 거친 언사를 주고받은 양국이다.
특히 마스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서 행동에 나섰고, 그것을 알아차린 제국도 전쟁을 각오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일촉즉발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놓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확실히 굽히는 방법뿐이다. 그건 어떻게 보면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다른 이름이 붙은 전쟁 배상금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 액수가 크더라도 실제 전쟁을 치른 후에 내놓을 금액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추락할 국왕의 체면과 권위였다.
“불가!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국과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전하께서 고개를 숙인 역사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스 특유의 거친 성향으로 인해 인접국과의 다툼은 일상이었다. 그에 대해 마스는 유감을 전하긴 했어도 국왕의 이름으로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를 한 경우는 없었다.
인접한 국가들로서는 분통 터질 일이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영지끼리 충돌한 정도가 아니라 전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유감이라고 넘어갈 일이 아니야. 누구보다 재상이 잘 알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시점에 전하께서 고개를 숙인다면 지금까지 마스가 쌓은 명성에 금이 가고 맙니다.”
“하하. 악명도 명성이라는 말인가?”
국왕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의 말은 분명 옳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재상이라면, 방법도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 내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나?”
“제 목을 잘라 제국에 보내십시오.”
“……”
자신을 죽이라는 말을 어쩜 저렇게 담담하게 할 수 있을까. 그 잔잔한 기백에는 국왕도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놀라기는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노재상의 필요성을 재인식 중이던 대신들로서는 재상의 목을 자르는 일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상의 목을 자른다고 전쟁을 막을 수가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너무 나가신 말씀이십니다.”
반대하고 나서는 대신들에 재상이 그들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국왕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생각은 저러한데, 국왕의 생각은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이 또한 무례였지만, 그이기에 가능한 무례였다.
“그대에게 책임을 돌리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제가 전하의 눈을 가렸고, 대신들을 강압해 전쟁을 꾸몄습니다. 전하께선 뒤늦게 그런 사실을 밝히시어 제 목을 자르신 것이지요. 재상의 목이면 제국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인정하겠지.”
국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어중이떠중이의 목과 안데르의 목은 그 가치가 천지 차이다. 안데르 재상의 능력은 마스의 인접국일수록 인정받고 있었다. 마스가 타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그가 중심을 잘 잡아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다르게 보면 이건 마스가 스스로 제 살을 잘라 내는 모습과도 같다.
제국 입장에선 마스가 알아서 주저앉는 그림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라는 소리다.
“그러니 제 목을 자르십시오.”
“늙은이의 목을 잘라 바치는 것으로 내 자존심을 지키라고? 흥, 내 자존심이 그렇게 값싼 줄 아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퉁명스러운 국왕의 반응에 안데르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대전에 그를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신들의 주름만 더 싶어졌다.
과연 이 시점에 안데르의 안을 받아들인다면, 대신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국왕은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전쟁을 물리지 않으면 어떨까?”
“・・・・・・・ 기어코 제국과 한판 하시겠다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