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1화
1426화
계획의 실패는 곧 전쟁이다.
실제로 연락관이 가져온 봉투에는 그것을 더욱 확실히 하는 내용뿐이지 않던가.
우연히 만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은 이제 상대에게 욕설과 저주를 쏟아 낼 것이고,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리라.
소드 팰러스 안에서 벌어질 전쟁은 어찌 보면 내전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분명 그보다 참혹할 것이었다.
내전은 기본적인 규모로 인해 지휘관급이 아니라면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남남이란 말이다.
그러나 소드 팰러스는 인원은 많을지언정 규모로 따지면 하나의 영지 정도에 해당한다. 즉, 조금 과장을 보태면 아침저녁으로 보는 사람들끼리 전쟁을 하게 되는 셈이었다.
더욱이 소드 팰러스는 기사의 요람이다. 검을 들고는 있지만, 그곳은 배움을 위한 공간이었다. 돌아보면 선후배에 동기로 이어지는 끈끈한 인연들. 이런 인연들 간의 전쟁이라니. 시작도 과정도 결말도 말끔할 수가 없다. 끝없이 질척거릴 것이 뻔했다.
인연의 붕괴는 부정, 배신, 우울, 분노 등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회오리가 되어 사람들의 피를 말릴 테니까.
아무리 많은 피를 본 연륜 있는 기사라 할지라도, 어제의 친구를 베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면, 과연 소드 팰러스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는 덤이고.
“하지만 개인의 상처는 결국 시간 속에 치유되겠죠. 진짜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을 소드 팰러스의 명예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소드 팰러스를 향해 손가락질하겠죠. 정의로운 기사들이 아닌, 배신자들의 요람이라는 말도 나올 겁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은 상처의 회복을 더디게 하고, 결국에는 소드 팰러스를 떠나게 만들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악순환의 연속이지.”
보통 외부의 적은 내부를 결집하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그 적이 세상이라면 반대로 조직에 등을 돌리고 떠나는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특히 세상의 부정적 여론이 조직 자체의 잘못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사람이 떠나면 조직의 힘은 줄어들고,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조직의 덕이 없다는 증거로 사람들의 입에 또다시 오르내리게 된다. 악순환의 완성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의 성지에서 발생한 배신은 악의를 불러올 최고의 먹거리였다.
“배신자가 삼검왕만 아니었으면 조용히 묻고 갈 수도 있는 일인데.”
배신은 무겁지만, 또한 흔한 일이었다.
특히 권력과 이권에 민감한 귀족 사회에서는 배신이 기본 소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배신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배신을 권하는 사회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귀족들은 항상 배신을 염두에 둔다.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당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기 위해.
그건 귀족들 간에 배신이 그만큼 빈번하다는 방증이었고, 또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귀족들 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사람들도 그러려니 한다. 그들은 원래 그런 족속들이니까.
하지만 기사는 다르다.
평민들이 가지는 기사에 대한 이미지란, 기사도라는 단어로 축약된다. 약자를 보호하고, 주군에 충성하고, 레이디를 섬기며, 목숨을 다해 맹세를 지키는 고고한 검.
기사 본인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세간이 만들어 낸 환상만도 아니다.
그런 만큼 이런 이미지가 무너지면 그 반동도 크다.
더러운 놈이 더러운 짓을 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모두가 깨끗하다고 믿은 놈이 더러운 짓을 하면 사람들은 죽일 듯 손가락질을 하며 욕한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믿음이 무너진 것에서 온 배신감에서 나오는 분노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겨우 그런 것으로 소드 팰러스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검후가 있는 이상 소드 팰러스가 무너질 일은 없다.
그리고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할 검후가 아니다. 세상이 무엇이라 떠들어도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과거 황녀였던 사람이, 지금은 검후로 더욱 세상에 알려졌다. 과연 그 과정이 무리 없이 조용하기만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별별 헛소문이 넘치다 못해 폭발했을 것이다.
그 아수라장을 지나온 검후에 있어 세상의 소문 따위 언젠가 스러질 아지랑이보다 못할 뿐이다.
물론 이번 사건에 있어 검후를 욕할 사람이 없기는 하다. 그녀는 엄연히 피해자였으니까. 거기에 감히 누가 있어 검후의 흉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검후는 전쟁 후에 불어올 후폭풍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아닌, 그간 소드 팰러스에서 배움을 얻은 기사들과 지금도 열심히 땀 흘리며 수련 중일 수련생들을 위해서 말이다.
“아직 어린 수련생들의 경우 충격이 클 겁니다. 어쩌면 소드 팰러스를 떠나려는 이들까지 생길지 몰라요.”
“그건 너무 나갔어.”
“하지만 절대 아니라고도 못하죠.”
뭐, 그렇기는 하다.
특히 외국에서 배움을 위해 소드 팰러스로 유학을 온 경우라면 가문에서 소환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수선한 소드 팰러스에 핏줄을 그냥 두는 것에 우려를 가진 사람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어쩌겠어. 배신자들이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데. 대놓고 살려 줄 테니 소드 팰러스를 떠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만에 하나 그렇게 했다가는 소드 팰러스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게 뻔했다. 애초에 황제가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아까 라미아의 말처럼 여유 시간을 더 줄 수도 없고요.”
“안 되지. 그랬을 경우 높은 확률로 배신자들의 오판을 불러일으킬걸. 자신들의 행동이 통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더 과감한 행동에 나설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어쩌면 내성이 아니라 소드 팰러스를 통째로 점거하려 할 가능성도 있어요.”
이드가 말을 보탠 일리나를 보며 최악의 가능성 중 하나를 언급했다.
그러자 검후가 더는 듣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두고 볼 수 없어요.”
강제적인 점거에는 아무래도 무력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점거를 당하는 이들 역시 힘없는 평민들도 아니고, 모두가 검을 수련한 수련생 혹은 기사들이다. 당연히 불합리한 통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올 터였다.
더욱이 검후의 복귀를 눈앞에 둔 상황이 아닌가.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흐르는 피는 전쟁보다 작다고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도리어 전쟁보다 더욱 잔인할지도 모른다.
이드는 검후를 살폈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검후의 낯빛은 창백했다. 모르긴 몰라도 환장할 지경이 아닐까 예측해 본다.
비록 그런 검후가 안쓰럽지만 이드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대책은 있어?”
“없어요. 솔직히 지금과 같은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건 마르텔의 성격과도 맞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런데 이번엔 그 마르텔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
“검왕?”
“네. 검왕이라면 이런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있죠. 실행하지는 않았겠지만요. 그렇잖아요.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비참한 최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걸요. 무엇보다 지금 소드 팰러스에는 그가 없죠.”
“그렇지. 하지만 연락은 할 수 있지 않겠어? 혹시 이게 검왕의 명령에 의한 것일 가능성은?”
“….”
검후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말이야. 숨어 버린 놈이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일을 꾸민 이유는 뭘까?”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그는 이미 안전을 확보한 상황이니까요.”
현재 검왕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목숨을 잃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리 위험을 감지한 검왕은 거짓 정보를 흘리고서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런 와중, 굳이 소드 팰러스를 움직여 혼란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그래 봐야 쌓이는 건 무엇 하나 득 될 것 없는 악명뿐일 텐데.
하지만 아무 목적 없이 혼란만을 주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 알 만한 사람은? 지금까지 이런 부분을 살펴 온 사람들이 있을 거잖아.”
“이전이었다면 클라인 백작이 상황을 분석했을 거예요.”
잠시 잊고 있던 이름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여우라 불리던 소드 팰러스의 총관. 확실히 그라면 검왕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 추측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소드 팰러스에 있잖아. 그 말고는 없어?”
“백작 말고라면. 검왕이 그런 역할을 해 왔죠.”
“……뭐, 본인에게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
검후의 인생에 여기저기 빠지지 않는 검왕의 존재감에 내심 혀를 찬 이드의 말에 검후가 씁쓸히 웃음을 지었다.
결국 검왕의 의도에 대해서는 알기 힘든 상황.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대로 계속 가?”
“갈 수밖에 없어요. 이젠.”
“원한다면 내가 먼저 가서 소드 팰러스의 상황을 살피고 적당히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은 ‘적당히’라고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검후가 도착하기 전 내성에 모여든 배신자들을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검후는 그런 이드의 배려를 이미 앞서 한 번 거절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상황이 계획과는 다르게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가 마무리를 지어야죠. 이드가 나서서 해결해 버리면 이후 상황이 더욱 좋지 않을 거예요.”
비록 깔끔하지 못해도 스스로 책임자고 마무리하는 것과 다른 손을 빌리는 것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큰 차이로 다가올 터였다.
검후의 우려는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한 점이었다.
이드는 검후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런 가운데, 검후는 쉴라를 불러 이동 속도를 높이게 했다. 이제는 굳이 배신자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줄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그와 함께, 소드 팰러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된 쉴라와 은색 기사단은 분노했다.
스스로의 죄를 시인하고 자결을 해도 모자랄 놈들이, 농성이라니.
그 분노를 동력 삼아 은색 기사단은 전력으로 말을 달렸다.
덕분에 진땀을 빼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봉투를 들고 온 연락관이었다.
좀 쉬어 볼까 하자마자 다시 말을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임무를 마친 그로서는 굳이 은색 기사단과 함께 말을 달릴 이유는 없지만, 달리 보면 은색 기사단과 함께할 기회가 이번 말도 또 있겠는가.
덕분에 여기사들 사이에서 말을 달리는 연락관의 표정은 실로 오묘했다. 기쁨 가운데 슬픔이 있다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