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7화
1432화
대부분의 사람은 처한 상황과 감정에 따라 행동이 변하기 마련이지만, 검후는 그러지 않았다.
한장. 두 장.
그녀는 감정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표정을 관철하고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단어 하나에 분노하고, 문장 하나에 침을 뱉어도 이상하지 않음에도 그저 고요했다.
그야말로 검후의 품격이 느껴지는 순간이랄까.
그런 아우라에 주변 사람들은 숨소리도 조심하며 마른침만 삼켰다. 과연 저 편지를 다 읽은 후 검후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목이 탔다.
물론 그 정도를 넘어 흐르는 식은땀과 떨리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소리 없이 높아지는 긴장감에 숨이 막힌다 싶을 때였다.
“아둔한 것 같으니라고…….”
둑이 무너지듯 짙은 감정을 담아 툭 쏟아 낸 검후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후는 다 읽은 편지를 보며 혀를 찼다.
“어떤 일에도 세 번은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여태 변한 게 하나도 없으니.”
검후는 한심하고 안타깝다는 양 읊조렸다. 당연하게 그 대상은 편지를 적은 마르텔을 향한 것이었다.
이러한 검후의 모습에 코랄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죽지는 않겠구나……..’
그를 포함해 이 자리에서 검후의 감정 변화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편지를 통해 그녀의 감정이 요동친 것이다. 보통 저런 모습을 보이면 최소한 편지에 대한 답신을 보내기 마련.
다시 말해 마르텔이 내린 임무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는 말이다.
그러자 시야가 넓어지며 여유가 생겼다.
소문으로 들었던 황금마차의 위용이 눈에 들어오고, 뒤집어쓴 먼지를 뚫고 나오는 은색 기사단의 기세도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옥의 티와 같은 남자 기사 하나의 존재까지.
하지만 이렇듯 주변에 대한 관심도 잠시였다.
코랄의 관심은 조심조심 황금마차 안을 향했다.
마법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는 내부. 하지만 그는 분명 그 안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절대 착각이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검후와 동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평소 높은 지위와 명성에 비해 예의와 격식에 까다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 온 검후는 덕분에 소탈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소드 팰러스에서 머무를 때면 이곳저곳을 홀로 거닐며 사람들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힘들어하는 수련생에게는 필요한 가르침을 내리길 즐겼기 때문이다. 펍에서 그녀와 같은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코랄은 그것도 검후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다 떠나서라도, 사람 많은 펍에서 마주하는 것과 마차에 함께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더욱이 저 황금마차가 어디 보통 마차인가.
문장이나 깃발은 없지만 누가 봐도 황실의 것이다. 애초에 저런 걸 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 소수 중에서 검후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개중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소드 팰러스로 향하는 검후와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드 명예 후작 말고는・・・・・・ 없겠지?’
검후를 구출한 것도 그였고, 삼검왕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만 아니었다면 미완의 마탑에 대한 토벌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금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한 것도 이드 명예 후작이 원인이다.
검왕은 물론,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원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분노에 불타거나 하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코랄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이드 명예 후작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만 코랄은 소드 팰러스에서 작전 중인 동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검후 하나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거기에 이드 명예 후작까지 더해진다면 과연 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원래 계획은 수성을 통해 모든 시선을 내성으로 집중시키는 것이지만, 검후와 이드 명예 후작이 함께 나선다면 과연 한나절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쭉정이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이 없지만, 그래서야 시간이 너무 짧다.
‘어쩌면 중간에 마르텔이 나서 준 것이 전화위복이 될지도?
다행이라면 이런 계획에 마르텔이라는 변수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바라는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생각보다 쉽게 시간을 벌게 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는 말이다. 코랄은 갑자기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졌다고 생각했다.
‘제일 우선할 것은 마르텔이 원하는 답을 받아 내는 일이고, 둘째는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명예 후작이 맞는지 확인하는 건가.’
둘 다 쉬운 듯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해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은 코랄은 이후 해야 할 말을 신중히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질문과 조롱이든 절묘하게 받아쳐 주고 말겠다!
그렇게 단단히 배에 힘을 줬을 때였다.
“무엇이 그리 불만이십니까?”
“……소드 팰러스에 있는 어리석은 제자 놈에 대한 이야기네. 명예 후작이 한번 읽어 볼 텐가?”
긴장감 없는 목소리와 함께 검후의 어깨 너머로 드러나는 얼굴.
‘역시 명예 후작이었구나. 빌어먹을!’
예측은 맞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다만 은은한 놀라움이 같이 왔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저렇게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라고?’
말투와 억양, 눈빛과 표정에 이은 행동을 보면 서로에 대한 거리감이 보이는 법.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격이 없어 보였다.
코랄이 알기로 배신이 일어나기 전의 검후와 검왕도 저렇게 친근한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기는 했다.
마인드 마스터와 무공이라는 공통점이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 명예 후작이 검후를 구출해 냈지 않은가. 서로서로 가까워질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까.
“네 이름이 코랄이라지?”
“예? 예! 그렇습니다.”
검후의 부름에 코랄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검후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코랄을 향한 시선은 무심할 정도로 투명했다.
그 눈을 마주한 코랄이 스스로 작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이미 기사가 아니기에 경이라 부르지는 않겠다. 알겠지?”
“……황공하옵니다.”
따지고 보면 코랄은 검후의 기사는 아니다.
검후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크게 보면 제국의 기사로서 황족인 검후를 배신하는 무리에 속했으니, 불충이다.
거기에 소드 팰러스에서 배움을 얻었다면 그 소드 팰러스의 주인인 검후는 가장 큰 스승이다. 그 스승을 배신하는 무리에 속했으니, 이 또한 기사도를 어긴 것.
아무리 말재간 좋은 사람이라도 확실한 사실 앞에서는 입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물론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통하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다. 감히 이런 자리에서 헛소리를 했다가는 바로 목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검후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코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편지 말고 그 아둔한 것이 전한 게 더 있느냐.”
“함께 전하라 하신 전언과・・・・・・ 요청이 있습니다.”
“하! 감히 나에게 요청이 있다? 지금 그걸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
감정이 동요했기 때문인가. 짜증을 내는 검후로부터 발산된 기세에 코랄은 이를 힘껏 깨물어야 했다.
그리고 내심 납득했다. 이것이 검후인가.
잠시 후, 짜증을 삭힌 검후가 물었다.
“그래, 어떤 기막힌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녀석이 무슨 말을 전하라 하더냐.”
마르텔 경께선 스스로 지은 죄를 청산할 기회를 얻고 싶다 하셨습니다. 용감한….. 죽음을 위해서라고.”
말을 마친 코랄은 곧 떨어질 불호령에 질끈 눈을 감았다.
죄를 청산할 기회는 둘째 치고, ‘용감한 죽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불호령은 없었다.
“……쯧.”
대신 검후가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저 멀리 소드 팰러스에 있을 마르텔을 향해 딱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용감히 죽고 싶다는 놈이 애초에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거기에 정말 죽고 싶기는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이 편지 말입니다. 구질구질한 옛날이야기로 동정심이나 불러일으키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드는 끝까지 읽은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대충 접어 검후에게 건넸다.
“명예롭게 죽고 싶은 건 검을 쥔 무인의 한결같은 바람이죠. 제가 있던 곳에서도 그런 사람 많았습니다. 침대에서 죽는 것은 수치라면서, 죽을 몸을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같은 무인으로서 이해 못 할 건 아닙니다.”
“…….”
그건 이드의 말을 듣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중에는 코랄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기사로서 그들에게도 로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장렬한 최후가 아닐까.
그들도 한 사람의 기사이며, 한 사람의 무인이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왜 그가 아니라 저자가 있는 겁니까? 정말 모든 것을 청산하고 싶으면 그가 직접 이 자리에 와야 했던 거 아닙니까?”
이런 이드의 질문에 은색 기사단 사이에서 옳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이 생겼다.
왜 마르텔은 직접 이 자리에 나서지 못했는가.
설마 자신의 마지막을 보아 줄 사람이 없어서?
“놈을 따르는 자들이 있으니, 그러긴 어렵지 않았을까?”
그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낸 검후.
그에 이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죄를 청산하고 싶다는 인간이 말입니까? 만약에 제가 그라면・・・・・・ 자신을 찾은 멍청이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검후께 달려왔을 겁니다.”
“명예 후작의 말은.. 용감한 죽음으로 포장한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인가.”
“그야말로 당사자에게 직접 듣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최소한 겸사겸사라는 목적은 있지 않을까요? 검후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마르텔을 가장 오랫동안 보아 오셨으니,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알았다면 등을 내어 줬을까.”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검후는 곧 코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