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19화
남자는 그것을 들고 일행들 앞으로 오더니 결계의 한 부분에 그것을 대고 그대로 그어 내렸다. 물론, 결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헛짓거리 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돌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결계가 갈라지는 것을 말이다.
“들어들 오게.”
그의 말에 세 사람은 열려진 결계를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만은 오엘도 결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들어서자 결계는 자동적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그에 따라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쉬도록 하게.”
지금까지 이드들을 상대하던 남자가 조금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한 마디를 던지며 등을 돌렸다. 루칼트는 그런 그를 향해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준 후 일행들을 ‘만남이 흐르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 루칼트. 그 앞치마는 뭐예요? 여관비를 못 내기라도 한 거예요?”
“아하하하….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자세한 건 여관에서 이야기하지. 그런데 거… 사제님은 안 보이는군.”
“그건 여관에 가서 이야기하죠.”
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을 돌아보았다. 정말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저번엔 그래도 용병들의 모습이 보이긴 했는데, 이젠 그런 모습도 없었다. 몬스터의 습격이 많은 편이었던 이곳은 더없이 평화로워지고, 반대로 경비가 잘 되어 있는 대도시는 공격당한다.
피식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만남이 흐르는 곳’은 여전했다. 일 층의 식당을 몇몇 남자들이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면면은 루칼트와 같이 본 적이 있는 용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루칼트와 같이 들어서는 이드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엘과 라미아를 향해서 말이다. 이곳에서 지낼 때 두 사람의 인기는 그야말로 최고였으니까.
“자, 우선 올라가서 방에 짐부터 내려 놔.”
루칼트는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 아래 있는 방 열쇠 중 두 개를 오엘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말대로 방에 짐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오자 루칼트가 이미 몇 가지 요리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아직 식사 시간은 아니라서 그런지 간단한 몇 가지 요리들이었다.
“도대체 여기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넬은요?”
“아아… 천천히 해. 천천히. 그리고 넬은 지금 여기 없어.”
“에… 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루칼트의 대답에 세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없다니. 그럼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도 거의 반 강제로 이 가게를 떠맡게 된 거야.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일, 이 년만 가게를 봐 달라나? 쳇, 뭐라고 해 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발목 잡혀 버린 거지.”
“그런데 발목을 잡힌 것 치고는…. 앞치마까지 하고서 상당히 즐거워하시는 것 같네요.”
오엘의 말에 루칼트는 잠시 띵한 표정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앞치마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어 버렸다.
“훗, 거 예쁜 아가씨는 여전히 예리하구만.”
별로 그런 건 아닌데…. 오엘은 발목이 잡혔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이 좋았던 루칼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자신이 누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드래곤이란 사실을 알고도 저렇게 빙두를 거릴 수 있을까.
“그럼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당연히 물어봤지. 그런데 별 대답이 없는 걸 내 어떡하냐? 그냥 급히 가 볼 데가 있다는 말뿐이었어. 그러고 나간 게 아마….. 삼 주쯤 전이었을 거다.”
이드는 루칼트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은데 사라지다니. 거기다 마을에는 결계까지 쳐져 있…. 그래. 결계. 그때 라미아도 같은 생각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을을 덮고 있는 이 엄청난 결계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건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건데.”
라미아의 질문에 루칼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기다리던 질문이 드디어 나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뭔가 엄청난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 루칼트는 우선 자신 앞에 놓인 물을 쭉 들이키고는 목소리를 쓱 깔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목소리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인 듯 가벼운 그의 성격이 어딜 가겠는가.
“역시 예쁜 마법사 아가씨는 뭘 좀 아는군. 잘 들어.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구. 우리 마을 전체를 감싸며 보호해 주는 이 엄청난 물건은 말이야. 다름 아닌… 다름 아닌….”
루칼트는 천천히 긴장감과 고조감을 유도하듯 말을 끌며 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 힘이 쭉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세 사람은 전혀 긴장감 없는 얼굴로 이야기할 거 해 봐라. 라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결계를 누가 쳤는지 짐작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었기에 그의 말에 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 이쁜 아가씨들하고 왜 긴장을 안 해?”
“…. 긴장해 드려요?”
“쳇, 됐어. 하지만 이 결계를 만든 존재는 정말 믿기지 않는 존재야. 다름 아닌 벤네비스산에 산다는 그.린.드.래.곤이지.”
끄덕끄덕.
세 사람은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칼트는 그런 세 사람의 모습에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이, 이봐…. 이건 정말이라구. 놀랍지 않아? 응? 놀랍지 않냐구….”
이드는 그런 루칼트의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하기사 자신만 아는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가 아는 이야기라고 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럼 내가 놀라게 해 볼까?
“네, 네… 놀랍네요. 근데… 너비스 말고 밖의 소식은 아세요?”
“바깥 소식? 아니. 이 주 전쯤에 이 결계가 생기고서부터는 도대체 전파가 잡히지 않아서 말이야. 전혀 못 들었어. 근데 왜?”
“그럼 블루 드래곤이 나타나서 도시 두 개를 통째로 날려 버렸단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겠네요.”
“…. 뭐, 뭐야!!! 그, 그게 지금….. 저, 정말이냐?”
“물론이죠. 거기에 더해서 몬스터 군단에게 공격당해서 도시 몇 개가 완전히 무너졌고, 정부에서 능력자들을 감금하고 협박해서 이용했다는 소식도 있지요.”
“……..”
조용했다. 루칼트는 물론이고, 조금 전 루칼트의 비명과 같은 경악성에 자극을 받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멍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 분위기가 루칼트가 이드들에게 기대하고 있던 표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한 명. 짧은 단발의 꽁지머리를 가진 남자만은 무거운 얼굴이었다.
“그 말…. 정부에서 능력자들을 이용했다는 그게 사실로 밝혀졌다는 거. 사실이냐?”
묵직한 목소리가 식당 안을 울리며 멍한 표정으로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깨웠다.
“마, 맞아. 그 말 사실이냐?”
“그럼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어떻게 처리된 거냐?”
이드는 갑작스럽게 흥분하는 용병들의 모습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가디언들이나 용병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같은 능력자라는데 동조해 분노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해 주었다. 증거는 있으나 사정상 터트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드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꽁지머리는 바로 뒤로 돌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 그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여기 그 일과 관계된 분이라도…”
이드가 의아한 듯 묻는 말에 한 용병이 슬쩍 꽁지머리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야. 동생과 함께 선천적인 정령술사였는데…. 놈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간신히 저 녀석만 탈출했었지.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말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말에 이드들의 시선이 꽁지머리를 향했다. 제로를 제외하고 정부에 억류되었던 사람을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오엘은 자연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에 조용히 물었다.
“그럼 동생 분은….”
“동생 녀석 소식은 모른다더군. 원래는 같이 탈출하던 중이었는데…. 발각당하는 바람에 헤어진 모양이야. 그런데 그것 말고 다른 소식은 없냐?”
결계 속이라고 해도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 상당히 바깥 소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결계도 일종의 감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더 이상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이드의 말에 사람들은 하나씩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당연히 돌아간 자리에서 거론되는 이야기는 이드가 방금 전한 소식이다.
“참,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해 줘요. 설마 그 드래곤이 그냥 결계만 치고 가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루칼트는 이드의 재촉에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이야기할 맛이 나지 않았다. 이건 들어 주는 사람이 흥미를 가져야 이야기를 하지. 하지만 재촉하는 이드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연 루칼트였다.
“그래. 그냥 가진 않았다. 사실 우리 마을에 날아 내릴 때만 해도 우린 전부 다 죽는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카르네르엘이, 아. 카르네르엘은 그 드래곤 이름인데, 우리들에게 알려 주더군. 그러면서 이 마을을 떠나지 말라고 경고하더라고.”
“경고요~??”
세 사람이 합창하듯 되물었다. 갑자기 갈 데가 있다고 하고 가 버린 후에 드래곤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마을을 떠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고? 루칼트는 처음 이야기 때와 달리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에 이유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경고, 아니 충고였어. 그 드래곤은 마을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우리 마을을 자신이 인정했다고 그냥 여기 있어도 좋다고 말했어. 그때 기분이란. 정말 그 큰 발로 꾹 밟아 죽여 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아, 빨리 본론부터 이야기해요!”
“이익…. 쯧, 좋다. 하여간 그렇게 말한 카르네르엘은 말이야. 흠… 흐음… ‘이제 곧 온 세계가 피를 흘릴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리이며, 새로운 탄생의 고통이다. 저 높고 높은 곳에서 정해진 순리이다. 하지만 내 영역에 있는 그대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세상이 피에 물들더라도 우리들 드래곤의 영역에서는 피가 흐르지 못할 것이다. 허나 만약을 대비해 미친 이리 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울타리를 쳐 줄 것이다. 그 울타리의 관리자는 내가 지명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그 울타리 넘어로 함부로 나서지 말 것이다. 또 관계된 자 이외에는 들이지도 말라. 이것은 나 카르네르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컥, 콜록콜록….”
카르네르엘의 목소리 흉내를 위해서인지 한껏 낮춘 목소리가 목에 부담이 되었는지, 루칼트는 마른 기침을 토해 내며 물을 삼켰다. 그 사이 이드와 라미아, 오엘은 서로 돌아보며 잠깐이지만 의견을 나누었다. 카르네르엘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그런 말을 했다면, 이건 뭔가 있다.
“크흠. 이제 좀 살겠네. 휴~ 좌우간 몇 마디 바뀌거나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우리끼리 그 말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긴 했는데…. 잘 모르겠더란 말이야. 뭐, 네 이야기를 들으니, 몬스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확인해 볼 방법은 없지. 카르네르엘은 말을 마치고 네가 들어올 때 본 결계를 세웠지. 정말 끝내 주더구만. 보통 마법사들은 한참 주문을 외우고서야 대가리만 한 불 공 하나 만들어 내는데 드래곤은 몇 마디만 하니까 끝나더라고. 결계의 증거라면서 마을 중앙쯤에 비늘을 하나 박아 놓고 결계를 열 수 있는 열쇠라면서 그 비늘의 작은 조각을 떼어서 봅씨에게 줬지. 너도 봤지? 아까 들어올 때 그 호리호리하게 생긴 아저씨 말이야. 그렇게 일을 마치더니 다시 벤네비스 산 쪽으로 날아가더라. 덕분에 그 후에는 몬스터 한 마리 보기가 힘들어. 보이더라도 접근도 안 하고. 용병들로서는 죽을 맛이었지. 하지만 드래곤의 말이니 나가지도 못하고…. 결국 마을일을 하는 신세가 됐지. 뭐, 내 경우는 오히려 좋았다 고나 할까? 누님이 오면 고맙다고 안아 주기라도 해야겠고 만. 하하하하…”
“야, 루칼트, 뭘 미친놈처럼 웃고 난리야? 여기 술 좀 더 갖다 줘라.”
순간 들려온 거친 말에 루칼트의 웃음이 뚝 멎어 버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말한 사내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녹색의 앞치마를 두른 그의 모습은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우이씨, 네가 갖다 마셔 임마. 있는 자리도 알잖아.”
“호~ 오. 정말 그래도 되냐? 내가 얼마나 갖다 먹을지 어떻게 알고? 흐음, 이거 넬이 오면 말해 줘야 겠는 걸 손님이 직접 갖다 마시고, 대충 돈을 줬다고 말이야. 보자…. 술통이 어딨더라…”
순간 사내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루칼트가 그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술집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해 돌아갔다. 루칼트의 말을 정리하던 이드의 시선도 자연히 일어선 그의 등을 향했다.
“….. 그냥 앉아 있어라. 내가 가지고 올 테니까. 얼마나 가져다주면 되냐?”
그 말에 능청을 떨며 몸을 일으키는 척! 하던 남자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제일 큰 걸로 두 개. 그거면 돼.”
“알았다. 그런데 말이야….”
“뭐?”
“….. 누님 오면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 정말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세 사람은 그날 하루를 마을에서 지냈다. 이드와 라미아는 마을 중앙에 박혀 있다는 카르네르엘의 드래곤 스케일을 보러 갔다 오기도 했고, 루칼트에게 들었던 말을 각색해 보기도 했으며, 봅이란 인물을 비롯해 찾아오는 몇몇 사람들에게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 한도 내에서 알려 주었다. 오엘은 오랜만에 적수를 만난 용병들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었다. 2주 동안 칼을 만지지 못해 몸이 뻐근하다고 달려드는 용병들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검을 들고 나간 오엘은 그날 정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대련을 해 주었다. 그리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이드에게 추궁과 혈을 받은 후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여관의 음식 맛은 카르네르엘이 운영할 때와 비슷했다. 루칼트가 직접 만든 것이라는데, 아마 카르네르엘이 루칼트에게 떠나기 전 가르친 모양이었다. 또 꽤나 오랫동안 맛본 카르네르엘의 요리이기 때문에 루칼트도 잘 따라 한 모양이었다. 또… 숨겨진 그의 요리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기는 했다.
다음 날 느긋한 시간에 일어난 이드와 라미아는 늦은 아침을 먹고서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진 후 천천히 마을을 나섰다. 알쏭달쏭한 이상한 말만 하고는 레어에서 코를 골고 있을 카르네르엘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제 루칼트에게 들었던 말을 그녀를 만나 직접 자세하게 설명까지 더해서 들어 볼 생각이었다. 이런 두 사람의 생각을 들은 오엘은 스스로 뒤로 물러나서 따라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녀로서는 카르네르엘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드래곤이라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더욱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드와 라미아도 그녀의 말에 권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가 같이 있을 경우 레어를 찾는 데 더 더뎌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마을을 나서며 다시 한번 봅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결계를 건드리지 않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봅은 두 사람이 수련을 위해 나간다는 말에 별 말 없이 결계를 열어 주었다. 대충이나마 주위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어제 이드에게 들었던 것이 있던 그는 이곳까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올 수 있었던 그들의 실력을 짐작해 볼 수 있었고, 그런 이들이 이런 좁은 마을에서 제대로 된 수련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두말할 필요 없이 헛짚은 생각이지만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벤네비스는 영국 제일의 산이다. 산의 높이뿐만이 아니라 그 모양이나 위용이 실로 대단했다. 거기에 봉인이 풀리던 날 생겨난 작고 큰 산들이 같이 들어서면서, 드래곤이 레어를 만들고 살기에 가장 적합한 산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반대로 산중에 무언가를 찾는다면 꽤나 찾기 곤란하고 어려운 산이 되기도 했다. 여러 산이 겹치며 은밀한 동굴과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고, 으슥한 계곡을 형성했던 것이다. 거기다 레어라면 당연히 보조 마법으로 숨겨 놓았을 테니…. 정말 전 산 전체를 다 뒤질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레어를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헤헤헷, 하지만 나한텐 결정적인 방법이 있지. 아~~주 확실하게 드래곤을 찾는 방법이 말이야.”
이드는 고인돌 위에 올라서 한눈에 들어오는 벤네비스 산을 바라보며 호언장담을 해 댔다. 하지만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모습을 못 미더운 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제 텔레포트 해 왔던 언덕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곳은 너비스 마을이 한눈에 보일 뿐 아니라, 벤네비스 산도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우선 이곳에서 벤네비스 산을 살펴본 후 가 볼 만한 곳을 우선 뽑아 보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이드는 여기서 딱 한 곳만 신경 써서 체크했다. 바로 산의 중심 부분을 말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라미아는 벤네비스 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그 방법을 쓰실 거예요?”
“당연하지. 너도 알잖아. 그 확실한 효과를 말이야.”
물론 알기야 알죠. 덕분에 산 하나가 날아가 버리는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라미아는 그렇게 튀어 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사실 지금 그녀의 주인이 하려는 방법은 예전에 일리나와 함께 골드 드래곤인 라일로시드가를 찾으러 갔을 때 사용한 방법이며, 어제 결계를 열고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이다. 바로 상대를 부르는 방법(呼名).
‘후우~ 마음에 안 드는 방법이지만, 그것 이외엔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라미아는 벤네비스와 이드의 매끄러운 얼굴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어 너비스 마을로 돌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드는 갑작스레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라미아의 모습에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사용할 마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라미아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파도를 타며 고운 목소리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오브젝트 어포인트 사일런스 서리스!!”
시동어가 울려 퍼졌다.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대기 중에 떠돌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미아의 명령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자신들의 성질과 위치를 바꾸며 너비스를 덮고 있는 결계 위쪽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이로서 너비스 마을은 두 가지 마법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어 버렸다. 카르네르엘의 결계와 라미아가 지금 시전 한 마법에 말이다. 하지만 그런 라미아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이드는 가만히 서 있다가 라미아를 향해 물었다.
“지금 마법은 뭐야?”
“설마 모.르.시.는.건. 아니겠죠?”
이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미아의 시선에 순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고개는 자동적으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사실 라미아가 시전한 마법의 뜻은 알고 있다. 명색이 그레이드론의 지식을 이어받은 자로서 마법의 시동어도 모르고 있다면, 정말 체면이 서지 않는다.
“무, 물론 알고 있지. 너비스 마을을 사일런스 마법으로 뒤덮은 거잖아. 결계 위쪽으로. 게다가 오래 지속되도록 특별히 가공해서.”
“맞아요.”
“….. 라미아,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잖아.”
이드는 자신의 말에 뾰족이 입술을 내미는 라미아의 귀여운 모습에 씨익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미아의 입술은 더욱더 앞으로 전진해 버렸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지금 제가 마법을 사용한 게 전부 이드님이 쓰시려는 그 방법 때문이라구요. 이드님은 마을 사람들이 산을 떨어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게다가 저 마을의 사람들은 겨우 2주일 전에 드래곤이라는 엄청난 존재의 위압감을 직접 맛보았다구요. 만약에 이드님이 저번 라일로시드님을 부를 때처럼 드래곤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들었다간 모두…. 기절해 버릴지도 모른다구요.”
사실이다. 정말 거품 물고 기절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들으면 뭔 말 하나 듣고 기절씩이나.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다. 기절하는 이유는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존재가 노여워하고, 그 노여움이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기절하는 것이다. 예전 라일로시드가를 찾으러 갔을 때 항상 평상심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엘프인 일리나조차 이드의 “누런 똥색 도마뱀”이란 말을 몸으로 느끼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기절하는 것 정도는 약하게 봐준 것일지도. 이드는 그녀의 말에 쩝쩝 입맛을 다셨다. 할 말이 없었다. 일리나 옆에 서 있었던 자신이니만큼 그녀의 반응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흠흠…. 잘했어. 그럼, 오랜만에 힘껏 달려 볼까나.”
이드는 괜히 무안해지려는 마음에 부운귀령보를 사용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라미아 역시 그런 이드를 보며 빙긋 웃으며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며 비행 마법을 사용해 날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벤네비스 산을 결승점으로 둔 땅과 하늘의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부운귀령보로 어느 정도 속도가 붙었다는 것을 느낀 이드는 단전으로부터 웅후한 진기를 쏟아내며 부운귀령보를 뇌령전궁보로 한 순간에 바꾸어 버렸다.
“하압. 뇌령전궁(雷靈電弓)!!”
쿠아아아아아….
마치 제트기가 지나가는 듯했다. 뇌령전궁보로 한 순간에 배가 된 빠르기에 이드의 주위의 공기들이 부서져 나가며 제트기가 지나가는 듯한 소음을 발했다. 이드가 지나간 자리로는 갑자기 비어진 공간을 따라 땅에 있던 모래 먼지들이 빨려 들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도저히 인간이 달리는 속도라 믿어지지 않는 마치 경주용 자동차가 달리는 것 같았다. 사실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속도는 이드의 몸에 그래이드론의 신체가 섞여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공이 엄청나더라도 근육 한, 두 개는 파열되고 말았을 것이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를 바라보며 그의 속도에 맞추어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 주위로는 바람이 보호막이 생겨나 그녀를 칼날 같은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사실, 땅에서 아무리 빨리 뛰어 보았자, 날고 있는 라미아를 앞서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좌우간. 그렇게 달려간 덕분에 순식간에 벤네비스 산의 언저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드는 나무들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그 부분에서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고, 이드의 몸은 대포에서 쏘아진 포탄처럼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나무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파앗
“다시 부운귀령보 다.”
이드는 떨어져 내리는 힘을 나무의 탄성을 이용해 없애 버리면서 다시 부운귀령보를 사용하여 나무 위를 스치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만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이드님, 그럼 어디부터 먼저 가실 거예요?”
이드는 어느새 고도(?)를 내려 자신의 눈높이에서 날고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며 벤네비스 산보다 작은 산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딱 이드가 찾는 조건에 알맞은 산처럼 보였다. 벤네비스 산을 앞에 두고 주위로 둥글게 산이 둘러져 있는 것이 딱 중심이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그럼 전 먼저 가 있을게요.”
목적지를 확인한 라미아는 이드를 앞질러 산의 정상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 모습은 정말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가 날고 있는 듯했다. 더구나 오늘따라 풀어 버리고 온 머리가 바람에 날려 더욱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타악.
“후~ 하~”
이드는 봉우리 정상 라미아가 서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내려서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몇 번의 숨 고르는 것만으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던 내기는 진정되고, 호흡이 안정되었다. 이드는 그런 자신의 몸에 정말 더 이상 인간의 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간이긴 하죠.”
“응?”
“인간 맞다구요. 그래이드론님의 육체가 동화되면서 이상해지기는 했지만, 이드님의 몸은 인간이 맞아요. 또 드래곤이기도 하구요.”
아마 잠깐 스친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이드는 자신을 생각해 말하는 듯한 라미아의 모습에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손길이 좋았는지. 가만히 눈을 감다가 이드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요. 이드님, 저 이쁘죠?”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뚱딴지같은 말을. 우선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럼요. 저, 검이 되기 전에 아.기.가 가지고 싶은데.”
또냐! 이드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며, 진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천마후를 시전할 테니 알아서 준비하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라미아도 그걸 알았는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이드를 흘겨보며 주위에 사일런스와 실드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막 마법에 둘러싸이는 라미아로부터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치잇, 꼭 디엔같이 귀여운 아이를 키워 보고 말 거야.”
으읏, 저건 아이를 키우는 걸 해 보고 싶다는 건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건지. 애매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깊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천마후라는 것이 내공을 이용한 음공(音功)이기는 하지만 그 기본은 사람의 목소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위해서는 호흡이 또한 중요했다.
“소환 윈디아.”
우우우우우웅웅
주위에 있는 바람이 휘돌며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뭉치고 뭉치고 뭉쳐진 바람은 그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낮게 떨리며 푸르게 점점 더 맑은 푸른색을 띠며 하나의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그것은 새였다. 아주 작은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크기를 가진 새. 햇살을 받은 푸르게 빛나는 날개를 빠르게 휘저으며 이드의 얼굴 앞에 떠 있는 것은 바람의 상급 정령 윈디아였다.
[할 일이 있는 건가요?]
“응, 있어. 지금부터 내가 외쳐 댈 목소리가 이 주위 산 속 곳곳에 닿을 수 있도록 좀 더 세세하게 퍼질 수 있도록 도와줘.”
[알았어요. 나는 바람. 바람을 이용해 퍼져 나가는 소리는 나를 통해 그대가 원하는 곳에 닿을 것이에요.]
이드의 명령에 가볍게 대답한 윈디아는 이드의 주위를 한 바퀴 휘돌았다. 그리고 또 한 바퀴, 다시 또 한 바퀴. 윈디아는 이드의 주위를 계속 돌았고 그렇게 돌 때마다 윈디아가 그리는 원은 커져 갔고 원을 그리는 윈디아의 몸은 허공 중 바람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 듯 이드는 주위를 떠도는 바람에서 윈디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좋아. 간다.’
“후우웁…. 카르네르엘!!!! 나! 이드예요!!! 당신을 찾아 왔어요!!”
쿠르르르릉…. 우르르릉…..
엄청난 천마후의 위력이었다. 마치 하늘의 천둥과 벼락이 벤네비스 산 바로 위에 떨어진 듯 산 전체가 흔들리며 울어 댔다. 산사태가 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만약 근처 누군가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놀라 심장마비로 이유도 모른 채 죽어 버릴 엄청난 폭음(爆音)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천마후에 담긴 내공의 힘에 내부가 산산히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이드는 한꺼번에 내뱉은 숨을 다시 고르며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산 여기저기서 몬스터와 동물의 것으로 들리는 포효 소리와 날뛰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드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몬스터와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자의 외침을 기다렸다.
‘라일로시드가 때는 바로 왔는데 말이야. 하기사 그때는 그 녀석이 욕을 먹어서 그랬던가? 라미아, 다시 한번 더 한다. 아직 마법 거두지 마.’
마음속의 외침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드는 그것을 신호로 다시 한번 커다란 천마후를 내뿜었다. 그 소리는 첫 번째보다 더욱 웅장했으며, 파괴적이었다. 또….
우르르릉… 쿠쿵… 쾅쾅쾅….
가벼운 산사태라는 부작용도 가지고 왔다. 아마도 불안하게 놓여 있었던 지반이 폭주하는 대기의 공명에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아마 이번의 천마후로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은 몬스터와 동물들이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주위에 피해를 주면서 찾으려 하는 카르네르엘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드래곤으로서 잠들어 있다고 해도 이 천마후를 들었다면 일어났을 것이다. 내뿜어지는 내력이 주위의 마나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라면, 마나에 민감한 드래곤을 깨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헌데 아직 카르네르엘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분명히 루칼트 씨가 벤네비스 산으로 날아갔다고 했었는데…. 여기 없는 걸까요?”
라미아가 마법을 거두고 이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드는 윈디아를 돌려보내며 라미아의 말에 답해 주며 서 있던 바위 위에 앉았다.
“후우~ 모르지. 혹시라도 레어 주변에 보호 마법을 여러 겹 덧씌어 두었다면, 내 천마후를 듣지 못했을 수도. 아니면 한 번 잠들면 결코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지독한 잠꾸러기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네 말대로 이곳에 없는 거겠지.”
그 말에 라미아도 이드 옆에 앉으면 앞으로 보이는 벤네비스 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산봉우리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제 막 시작되는 가을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직접 찾으러 다니는 수밖에 없겠네요. 우선 레어를 찾아야. 그녀가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이곳에 없는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이 넓은 곳을 언제 다 뒤지지?”
이드는 슬쩍 시선을 내려보았다. 순간 펼쳐지는 작은 산들과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그리고 저기 모습을 보이는 계곡 등등. 레어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이곳을 뒤지기 위해서는 꽤나 시간을 써야 할 듯하다.
휘이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따라 주위를 돌아보다 뚱한 표정을 지었다.
“….. 차라리 이 주위에다 대단위 마법을 난사해 볼까요? 그럼…. 나오지 않을까요?”
이드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드의 목이 삐걱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아갔다. 그런 이드의 눈에 초롱한 눈으로 벤네비스 산을 노려보고 있는 라미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드는 한 순간이지만 라미아가 무섭다고 느껴졌다. 설마 찾기 힘들 것 같다고, 다 부수겠다니….
“그렇게 되면…. 대화 이전에 상당한 육체적 친밀감을 표해야 될 것 같은데…. 자신의 집을 부숴 줬다고 아주 아주 기뻐할 것 같다.”
“쿠쿡… 그래도 쉽잖아요. 뭐… 결국은 직접 찾아다녀야 할려나. 하지만 이 넓은 산을 언제 다 뒤지죠?”
그건 라미아 말대로다. 정말 이곳을 뒤질 생각을 하니… 답답하기만 한 이드였다. 정말 이럴 때는 라미아의 말대로 부숴 버리고 싶다. 부수다 보면 뭐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 잠깐 라미아의 말대로 해 버릴까 하는 위험한 생각을 하던 이드는 우선 정면에 보이는 벤네비스 산부터 뒤져 보기로 했다. 가장 큰 산인 만큼, 그녀가 레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선 벤네비스 산부터 뒤져 보자. 내가 아래쪽에서 뒤지고 올라갈 테니까. 라미아, 네가 위쪽에서 찾아서 내려와. 빨리 빨리 잘만 하면 오늘 안에 벤네비스는 다 뒤져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말과 동시에 가볍게 몸을 일으킨 이드였다. 그때 그런 이드에게 라미아의 시선이 닿았다.
“그럼 저희들 점심은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건 전혀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이드는 갑작스레 발목을 잡는 그녀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더니 털썩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오늘은 여기서 산세나 구경하다 돌아가고, 본격적으로 찾는 건 내일부터 해 보자.”
그의 말에 라미아가 생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