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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0화


이드는 쓰러지는 카제를 뒤로 하고는 룬을 향해 돌아섰다.

이드의 곁으로는 어느새 다가온 라미아가 서 있었다.

터억

스윽 내민 이드의 손 위로 아까 전 하늘을 향해 던져두었던 일라이져가 떨어져 내렸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우리 일을 볼까요? 룬 양.”

돌아본 룬의 얼굴엔 안타까움과 걱정이 떠올라 있었고, 눈가엔 약간의 물기가 생겨나 카제를 향하고 있었다. 아마 카제와 그 수하들이 당하기 전에 반응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다친 사람들에 대한 걱정 탓일 것이다. 정말 어찌 보면 한 조직의 수장에 어울리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저 나이 때의 순정 어린 고만고만한 소녀다.

“룬양, 지금이라도 브리트니스를 돌려줄 수는 없나요?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데…. 어차피 그 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잖아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미아가 다시 한 번 룬에게 정중하게 권했다.

“하아, 제 고집일지도 몰라요. 두 분 말처럼 이 검을 드리면 되는데…. 하지만,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단순한 검이었다면 드렸겠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다툴 수밖에……”

정말이지 왜 저렇게 브리트니스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대답이 그토록 원치 않았던 것이기에 이드와 라미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라미아의 말대로 그녀와 브리트니스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엔 저 소녀와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만 명쾌해졌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다시 검집으로 돌려보내고 철황가를 입힌 양손을 들었다.

라미아는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디스펠 마법과 봉인해제의 마법을 준비했다.

룬이 사용했던 봉인 마법에 대한 대책이었다.

물론 그 사이 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브리트니스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리킨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검은 모양이 나타났는데, 이번엔 언뜻 봐서도 알 정도로 선명하게 검극에서부터 룬의 팔까지 검은 문양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검은 문양. 그것은 일종의 마법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만 그녀를 중심으로 한 번 느껴봤던 비단 천 같은 봉인의 기운이 희미하게 흐른다는 것뿐.

이드는 원래 먼저 공격해 들어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공격하기보다는 상대의 공격에 대한 방어적인 공격을 취하는 전투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앞전 카제와 그 수하들과의 전투에서도 그들의 공격을 먼저 기다렸던 이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룬의 평범한 모습에다, 봉인이라는 특수한 기술. 이번에는 이드가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한 줄기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드가 룬을 향해 튕겨져 나갔다. 공격 방식은 전과 같은 직접적인 타격 방식을 택한 이드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맴돌고 있는 봉인의 기운. 이번엔 자신과 라미아를 둘러싸지 않고 그녀의 주변에 맴돌고 있는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이드는 룬에게 다가가기 전 그 기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다면 이 한 번의 주먹으로 모든 일이 끝날 것이고, 아니라면….

터텅

……..이렇게 곤란해지겠지.

약간 실없이 보이는 소리와 함께 주먹과 몸에 와 닿는 감각. 이드는 그 감각을 느끼는 순간 반동을 이용해서 바로 뒤로 물러났다. 마치 모래가 든 샌드백을 쳤을 때의 감각이라고 할까? 단단하지만도 않고, 물렁한 것도 아닌…… 마치 보통의 주먹으로 사람을 친 듯한 느낌이었다.

“치잇, 라미아!”

“알아요. 해제!”

짜자자자작

라미아의 마법에 따라 룬을 감싸고 있던 허공 중에 갑자기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이질적인 두 기운의 충돌이 일어났다. 마치 햇살에 비친 투명한 유리와 같다고 할까? 두 기운의 영향을 받아 한 순간 반투명한 검은색 반구형의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봉인이 드디어 해제된 것이다. 그러나 그 해제와 동시에 다시 검은빛이 일어나며 룬의 주위를 감싸 안아버렸다.

“이래서야……”

이드는 그 광경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도무지 공격이 먹히길 기대할 수가 없었다. 앞전에 자신의 공격을 고스란히 먹어치우는 마법의 효과를 직접 확인한 이드가 간단히 내린 결론이었다.

“후, 12대식을 사용할까?”

이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12대식의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 봉인의 마법은 라미아처럼 마법으로 상대하기보다는 힘으로 부숴 나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드의 생각보다 룬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그녀의 브리트니스가 다시 한 번 움직이며 봉인의 마법을 그녀들까지 포함한 채 펼쳐낼 것이다. 다시 말해 중앙의 룬을 뺀 도넛 형태의 봉인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드와 라미아가 봉인의 기운으로 그 사실을 알고 막 봉인을 깨려고 하자 룬이 질끈 입술을 깨물며 브리트니스의 일부를 봉인지 안의 땅에 박아 넣는 것이 아닌가.

슈아아아아아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브리트니스와 룬의 팔을 덮고 있던 검은색의 문양에서 한 줄기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검은색의 로브를 입은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인자해 보이는 긴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이드와 라미아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검은색 일색으로 생겨난 존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으음….. 실로 오랜만의 현신이로고. 저번에 모습을 보이고 일 년 만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싸움을 위해서 나서야 하는 것이니 마음이 편치는 않구나. 오랜 잠 끝에 의지가 깨었건만….. 싸움 뿐이라니.”

갑자기 웬 신세타령?

이드는 느닷없이 나타나서 요령부득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검은색 일색의 존재를 경계하듯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노인장.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실제 노인에게 하기에는 조금 무례한 말투였지만 앞의 존재는 진짜 인간이 아니었다.

“허허, 보면 모르나. 신세를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내 말은….. 뭐 하는 존재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오.”

“글쎄, 뭐 하는 자인가…..”

검은 존재는 이드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때 라미아가 이드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이드님, 상대는 사념의 덩어리예요. 인간이 남긴 기억이 의지를 가진 것. 그것을 중심으로 마나로 형체를 만들고, 봉인의 마법으로 모습을 고정시킨 것 같아요.”

“맞아, 난 그런 존재.”

라미아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검은 사념의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더하자면 내 이름은 지너스라고 하지. 아주 고대의 고대에 이 세상을 봉인했던 자가 남긴 의지. 너무도 추악하게 더렵혀지는 세상의 말로에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던 흐트러진 염원. 그게 나지.”

끄응, 단지 브리트니스만 찾으면 되는데, 정말 골치 아프게 하는군…

이드의 입가에서 눌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너스라니. 그 이름을 이런 곳에서 다시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더구나 비록 사념이지만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도 못했었다.

그제야 왜 룬이 브리트니스를 포기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바로 저 지너스의 사념이 브리트니스에 붙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 생각이 난 것이지만 룬의 성이 지너스라고 했었다. 다른 것 필요 없이 그것만 보더라도 룬과 지너스의 인연이 결코 짧지도, 얕지도 않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같은 성을 쓴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가족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왠지 뭔가 꼬인 느낌에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야 왜 그렇게 룬이 당당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한 조직의 수장을 맡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바로 저 지너스가 옆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같은 성을 사용하는 가족인 그가…

아, 정말 검 하나 찾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하단 말인가.

“후, 룬양.”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긴 이드가 룬을 불렀다.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법이다.

“아무래도 브리트니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분, 지너스 때문인 것 같은데…”

끄덕

브리트니스를 잡고 있던 룬이 이드의 말에 지너스의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가능하다면 저희가 이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대신 브리트니스를 돌려주………핫! 갑자기 무슨….”

촤아아아악

이드는 순식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묶여드는 촘촘한 비단결 같은 봉인의 기운을 느끼고는 땅 위를 미끄러지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드가 뒤로 물러서는 그 순간 그가 있던 땅의 일부와 함께 직경 3미터 정도의 공간이 작게 오므라들며 검은색의 공으로 변했다가 사라졌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고 할까.

“이게 무슨…….”

“헛헛헛…대개 이런 걸 불의의 기습이라고 하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지너스는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까운 일이지만 자네의 말대로는 할 수 없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와 룬 그리고 이 검 브리트니스는 하나로 묶여 있거든. 룬은 나나, 이 브리트니스가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나와 이 검은 셋 중 누구 하나만 없어져도 존재의 균형이 깨어져 사라지게 되지. 다시 말해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없다는 말이네. 우리 셋은 이 세상을 봉인하던 마법진의 일부로 묶여진 사이거든.”

지너스는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다시 한 번 이드를 향해 봉인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이드를 잡을 수는 없었다. 봉인의 힘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긴 해도 발동이 늦는 것이 최대 약점인 듯했다.

“자네는 아나? 남겨진 내가 이 세상에 실망하고 스스로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이 세상의 봉인을 푼 것이 누구인지 말이야. 바로 저 브리트니스라네. 저 위대한 차원의 길을 걸어와서 결계의 심장에 틀어박힌 것이지.”

지너스의 발언은 자칫 혼돈을 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 세상이 이렇게 된 게 다 저 브리트니스 때문이란 말인가? 실제로 그렇다면 브리트니스에는 또 다른 복잡한 의미들이 부여될 수밖에 없었다.

“결계의 힘도 대단했고, 검의 힘도 대단했지. 원래대로라면 둘 다 소멸해야 했어. 그런데 그 검에 내가 깃듦으로 해서 봉인의 마법진이 약간 이상하게 반응을 한 거야. 무너지는 마법진의 일부가 날 따라와 브리트니스와 나를 묶어버린 것이지. 그렇게 검과 묶여지고 난 후 만난 것이 룬이라네.”

지너스는 브리트니스와 자신 그리고 룬과의 관계를 주저리주저리 잘도 떠들어댔다.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수다일까, 이드는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의 귀가 흥미로 기울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너스가 저런 일들을 왜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귀가 저절로 쏠리는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봉인의 기운은 끊임없이 이드를 따라 형성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원래 사념인 나는 아무런 힘이 없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봉인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지. 바로 저 브리트니스의 혼돈의 힘을 동력으로 해서 검에 새겨진 봉인의 마법진을 사용하는 것이지. 또 그러기 위해서는 룬도 꼭 필요하지. 우리 셋을 이어주는 존재가 그녀거든.”

“왜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강물을 바라본 늙은이의 지혜에서 나온 보험이라고 할까. 내 보기엔 자네는 그렇게 독해 보이지 않네. 지금의 이야기를 들어두면 만약의 경우라도 룬을 해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 사실……..정면으로 부딪치면 승산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또 자네를 잡아두려는 늙은이의 변덕이기도 하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무슨……….엇?”

지너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이드는 갑자기 사방에서 생겨나 몸을 조여 오는 기운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라미아가 급히 다가오려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도 이미 또 다른 결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드는 비단 두루마리에 둘둘 감긴 답답한 느낌을 느끼며 지너스가 중얼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룬을 변호해준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자신과 라미아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때때로 봉인의 마법을 시도하며 자신과 라미아를 생각한 곳까지 몰아가고, 미리 펼쳐놓은 봉인의 그물로 도망가기 전에 잡는다!

이드는 자신을 빈틈없이 조이고 있는 강력한 힘의 기운에 사냥개에게 물린 사냥감의 느낌을 맛보았다. 하지만 사념만 남았다고 해도 지너스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기감의 영역을 피해서 이렇게 그물에 걸려들다니. 확실히 세상을 봉인할 만큼 대단한 자인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난 자네들을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사념일 때야 내 생각과는 달리 파괴되고, 더렵혀져만 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모든 걸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거든. 이미 신의 개입으로 세상이 바로 잡혀 가기 시작했지. 누군가의 말대로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을 이루는 작은 한 부분이란 말이 진정한 힘을 얻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좌우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저 저 아이를 돌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전부라네. 지금에 와서 내 흔적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여한은 없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가는 모습과 저 아이가 자라는 모습만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어떤가? 자네, 저 아이가 명이 다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줄 수 없겠나?”

비록 진짜 인간의 영혼이 아닌 인간이 남긴 사념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인간과 같아진 진정이 담긴 지너스의 말이었다.

그 말에 이드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미 결심했던 사항. 이드는 신체의 속박과는 달리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는 내력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그러자 바람도 없는데 이드의 머리카락이 파르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우우우우

보랏빛 빛무리가 이드의 허리를 중심으로 강렬하게 회전하며 생겨났다. 그 빛의 원은 점점 회전을 빨리하며 그 크기를 더 했다. 그러자 파지직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이드의 주위를 덮고 있던 봉인의 기운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드는 몸 주위로 호신강기를 형성하고는 한순간 강력한 내력을 내치며 보랏빛 원형의 륜으로 봉인의 기운을 잘라 나갔다.

파즈즈즈 치커커컹

급격히 크기를 더하는 륜의 힘 앞에 봉인의 기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깨어졌다.

지너스의 이야기대로라면 봉인의 마법에 사용되는 힘은 혼돈의 파편의 힘! 이미 혼돈의 파편을 몇 번이나 상대하며, 그들을 다시 봉인하기도 했던 이드였다. 봉인이라는 방법을 상대할 수는 없어도, 힘 대 힘으로 부숴버리는 것은 가능했던 것이다. 꽁꽁 묶인 밧줄을 풀 수 없을 때 칼로 잘라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휘이이잉

자신을 묶고 있던 봉인의 마법을 일거에 부숴버린 이드는 곧 손을 휘둘러 허리에서 회전하던 강기의 륜을 던져 라미아와 자신을 가르고 있던 봉인의 마법까지 부숴버렸다.

“죄송하지만, 그 부탁 들어 드릴 수 없겠습니다. 아시겠지만 브리트니스의 힘은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것은 혼돈의 힘입니다.”

“헛헛…… 나도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알았지만 혼돈도 세상의 한 부분이지.”

“그것은 세상의 생기를 불어 넣는 혼원이겠죠. 하지만 브리트니스에 깃든 힘은 제어되지 않은 혼돈입니다.”

이미 결심을 굳힌 이드였다.

지너스는 이드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봉인의 힘을 다시 조종했다. 가장 외각으로 가장 두꺼운 검은색으로 물든 거대한 원형의 봉인과 내부에 지너스와 브리트니스를 중심으로 한 작은 봉인의 힘. 이미 룬은 따로 떨어트려 놓은 지너스였다.

이드는 묘하게 몸이 눌리는 감각을 느꼈다. 봉인에 의한 압박이라기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느끼는 그런 이질적인 무게감이랄까? 과연 이드의 감각은 정확했다.

“지금 우리는 하늘에 있지. 구름 위의 까마득한 하늘이네. 자네와의 충돌에 룬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려들면 위험하지 않겠나. 자, 난 준비가 되었네. 오시게.”

말고는 달리 공격이나 반격을 준비하지도 않고서 털털한 웃음을 흘리는 지너스의 자세는 정말 세상을 다 산 노인의 그것이었다.

“그럼…. 부탁을 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2대식 팔천광륜법(八天廣輪法)!”

바우웅…. 바우웅 바우웅 바우웅

이드의 단전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둥근 륜(輪)이 생겨났다.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륜 형태의 강기는 앞서 이드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이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륜은 서로서로 교차할 때마다 그 사이에 숨어 있는 공기를 베어내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여덟 개의 륜 속에서 똑바로 브리트니스를 들고 있는 지너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드는 기합과 함께 지너스를 향해 뛰어나갔다.

“천륜의 힘은 태산을 부수노니,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태산파형(太山破型)!”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는 그의 형체는 긴 유선을 그리지만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는 유성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또 그 앞에 있는 작은 돌멩이나 공기도 모두 그의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가며 소멸해 갔다. 가히 파천의 위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보랏빛이 물든 유성과 흐릿한 검은색의 구가 부딪치는 순간!

차아아앙

검은색 봉인 안을 쩌렁쩌렁 울려내는 검명이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의 근원이 있는 곳 그곳에는 어느새 보랏빛 륜을 회수한 이드와 브리트니스를 들고 있는 지너스가 보였다.

헌데 지너스의 손에 들린 브리트니스의 검신이 끝에서부터 마치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는 게 신기했다. 아마 방금 전 들렸던 그 날카로운 검명이 브리트니스의 마지막 비명성이었던 모양이었다. 힘 대 힘! 철저한 봉인에 쌓인 방어와 절대의 공격력이 서로 부딪친 결과였다. 그리고 부서져 내리던 브리트니스가 손잡이만을 남겨놓았을 때 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부탁…… 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됐어. 자네를 볼 때부터 짐작한 일이었으니까. 또 자네의 말도 맞아. 혹시 모르지, 내가 혼돈에 물들어 폭주했을지도….. 그 가능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야. 이미 그 아이에게는 이런 일을 생각해서 호신할 수 있는 물건도 주어놓았지.”

고개를 내젓는 지너스의 말에 대충 뭔지 짐작이 갔다.

“종속의 인장.”

위에서 두 사람의 충돌을 지켜보고 있던 라미아가 명쾌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래, 그렇지. 똑똑한 아가씨구먼.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도 그 아이를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카제라는 사람이 어지간히 잘 돌봐줄까만은…. 자네 설마 그것까지 상관치는 않겠지?”

이드는 지너스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저와는 상관이 없는 물건입니다.”

브리트니스는 그레센 대륙의 것이지만, 종속의 인장은 원래 이 세계에서 태어난 물건이었다.

“그래, 그래. 그럼 이거 미안하게 됐는걸.”

무슨 뜻인지 모를 지너스의 말에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사이 브리트니스는 완전히 사라지고 지너스 역시 그 형체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지너스는 희미하게 반대편이 비치는 얼굴 위로 손주를 놀리는 심술쟁이 할아버지의 미소를 띠었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브리트니스의 혼돈의 힘과 내가 가지고 있던 봉인의 힘을 모두 자네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마법에 쏟았지 뭔가. 모르긴 몰라도 일 년 동안 지속될 봉인이네. 혹 모르지, 방금 전과 같은 공격을 계속한다면 조금은 그 기간이 줄어들지도… 허허헛…. 자네와의 인연도 꽤 재미있었네. 그럼……”

말을 다 마쳤는지 지너스는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순식간에 허공 중으로 녹아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말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이드에 대한 작은 복수가 아닐까.

이제 사방 5미터 정도의 공간 안에 이드와 라미아, 두 사람만이 남게 된 것이다.

“어떻하지?”

“글쎄요.”

한 번 봉인을 향해 팔천광륜법과 디스펠, 봉인 해제의 마법을 사용해본 후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이드와 라미아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표정에 지나지 않을 뿐, 그 목소리에는 전혀 걱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쩝, 그냥…… 맘 편히 쉬지 뭐. 일 년 정도는 내력으로 문제 없이 버틸 수 있으니까.”

“흐응….. 그래도 오엘이 기다릴 텐데…. 걱정이네요. 그런데 정령은 소환이 되려나? 물도 먹고 목욕도 해야 되는데…..”

다섯 번이나 봉인과 부딪쳐본 후에야 봉인을 대하는 이드와 라미아의 태도가 확실해졌다. 이제 이곳에서 생활할 궁리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 뒤 동춘시 상공에는 몇 달 동안 그렇게 처음 보는 검은색의 구체가 해와 달과 함께 둥실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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