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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8화


“이봐요,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턱대고 사람을 몰아세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드는 병사들이 완전히 원진을 형성하자 그 사이로 끼어든 수문장을 향해 소리쳤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세 사람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걸걸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너희들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 다크 엘프 하나와 햇살에 그을린 사내 그리고 얼굴선이 가는 미소년. 그 중에 미소년은 붉은색의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이드는 그 말에 채이나와 마오 그리고 라미아를 바라보고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쩝, 우리들이네요. 근데 우린 얼마 전에 칼리의 숲을 출발했고, 그 동안 죄를 지은 기억이…. 기억이 흠, 없는데요. 무슨 이유로 신고가 들어왔는지 알고 싶군요.”

이드는 죄라는 말에 쉽사리 떠오르는 몇몇 장면에 말이 잠깐 꼬이고 말았다. 그 장면이란 것은 바로 용병들과 상인들을 향해 냉정한 얼굴로 단검과 주먹을 흔들어대는 마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였고, 정당방위였기에 이드는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설마라는 말을 믿어서는 발등만 찍히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듣고 싶다니 대답해주지. 용병들과 상인들이 떼거지로 신고를 했다. 여황의 길에서 너희들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피해자만 무려 사십 명이다. 그 중 불구 내지는 반년 이상의 부상을 입은 자가 반을 넘어. 대단한 일을 했더군.”

순간 이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설마 했는데…..

“이봐요, 정당방위였다구요.”

“대답은 된 것 같고. 그만 체포에 협조해주겠나? 아니면 강제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지.”

수문장은 이드의 변명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자신의 말을 끝으로 검을 뽑아들고 병사들로 하여금 원진을 좁히게 했다. 그 긴장된 순간에 채이나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이것들이 정말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별 헛소리만 다하네. 그게 왜 우리 잘못이야? 다 발정 난 돼지들이 덤벼들어서 그런 거지.”

눈을 가늘게 만들고서 상황을 보고만 있던 채이나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너희들부터 잡아두고 조사해보도록 하지.”

수사관이라면 누구나 입에 달고 있는 말로 대답해준 수문장의 말과 함께 점점 원진이 일행들을 중심으로 조여들기 시작했다.

“참, 거 말 안 듣네. 우리 잘못이 아니라니까는….”

이드는 긴장한 병사들을 보며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가오는 병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채이나와 마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채이나는 수문장을 날카로운 눈길로 쳐다보느라 병사들을 전혀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소용없어, 바보야. 아직 눈치 못 챘니?”

“뭘요?”

“저 녀석들 일부러 이러는 거 말이야. 우리를 잡으려고.”

이드는 그녀의 말에 수문장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막 선두에 서서 달려들려는 한 병사를 은밀한 천허천강지로 마혈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는 입을 열었다.

“별로…. 뒤에서 일을 꾸밀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

그 말에 채이나는 수문장을 보던 눈으로 이드를 흘겨보았다.

“너도 속 다르고 겉 다른 인간들 많이 봤으면서 그런 소리야? 상황을 보면 뻔하잖아. 우리들하고 용병들을 같이 세워두면 누가 문제인지 뻔한 대답이야. 거기다 엘프인 내가 속해 있는 일행을 잡으려고 하잖아. 바보가 아닌 바에야 엘프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거지. 저놈이 어떤 놈에게 우리들을 잡아 오도록 사주를 받은 거야.”

그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채이나였다. 동시에 그녀가 말하는 어떤 놈이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짐작이 갔다.

“마오에게 당한 용병들과 상인들이 사주했겠네요.”

뭐, 충분히 이해는 간다. 특히 마오의 단검으로 자손이 끊긴 사람의 경우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일행들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일 테다.

[텔레포트 준비할까요? 도망가게….]

지금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미아가 세 사람에게 동시에 메시지 마법으로 말을 전했다. 뭐,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다.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든가 아니면, 라미아의 말대로 도망을 가든가.

그리고 그 선택은 채이나의 한마디에 의해서 정해졌다.

“무슨 소리니?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물러서. 아들!”

“이미 준비하고 있어요.”

채이나의 부름과 동시에 마오가 한 손에 단검을 쥐고서 그녀의 곁으로 나섰다.

이미 그녀가 그렇게 행동할 것을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동작에 지난 이틀간 스물다섯의 피해자를 만들어냈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대형사고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에 이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채이나. 그러니까 라미아의 말대로 우선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 이건 그냥 물러선다고 될 문제가 아냐. 도망을 가면 우리가 잘못을 했다고 시인하는 게 된다구. 그러면 제국 내에서 여행할 때 보통 곤란해지는 게 아냐. 거기다 이 여행은 아들 녀석에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때의 대처 방법을 배워둘 필요가 있다구.”

“그래서 그 대처 방법이 정면돌파?”

“그래, 여러 가지로 볼 때 지금 상황에서는 정면돌파가 최고야. 이렇게 뭔가 뒷거래가 있어 보일 때는 일을 크게 터트릴수록 좋아. 혹시라도 도망이라도 가면 오히려 상황이 나빠져.”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드는 가만히 얼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도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채이나가 일단 마음을 먹으면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일리나의 정보를 구하기 전까지는 이래저래 그녀에게 끌려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결심을 굳힌 이드는 공격의 선두에 서야 할 동료가 움직이지 않자 그를 대신해서 그 역할을 맡으려는 병사를 천허천강지로 제압하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이미 제압된 둘을 제외하면 스물둘.

십지(十地)를 통해 천허천강지의 연사를 펼쳐내면 순식간에 조용히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행동을 조용히 막는 손이 있었다. 그 손길의 주인은 바로 채이나였다.

앞에 나선 마오를 지켜보다가 이드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고는 잡아 세운 것이다.

“그냥 놔둬.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네가 나설 건 없어. 아들 녀석도 이 정도는 문제없고. 무엇보다 인간과의 첫 실전이라구. 가만히 뒤에서 지켜만 봐.”

“그래도 혹시 병사가 죽기라도 하면 곤란한데요. 일을 키우는 것도 적당히 해야 된다구요.”

“걱정 마. 안 죽여. 너도 봤잖아. 여기까지 오면서 저 녀석이 누굴 죽이는 거 본 적 있어?”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채이나의 말대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 몇 명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것 같은 고통을 겪었고, 앞으로도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것이며, 스스로 남자로서는 죽었다고 비관하고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냥 조용히 죽여주는 것보다 더한 원한이 쌓였을 것이 확실하다. 여기 이 자리에서 병사들 중에 그런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다.

그런 뜻에서 이드는 마오를 향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 적당히 해야 된다. 알지? 그 스물다섯 명처럼 만들면 안 돼.”

순간 마오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이드를 향해 번뜩였다. 이드는 속으로 아차 했다.

[실수했네요. 그걸 그냥 말로 하다니… 단순한 병사들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하죠.]

‘하. 하. 하.’

이드는 어색한 웃음으로 라미아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는 슬쩍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오의 말에 이드를 향했던 시선이 모조리 걷혔다.

“그럴 수 없습니다. 걸어오는 싸움은 적당히 봐주지 마라! 전 그렇게 배웠거든요.”

아아…… 그건 보크로와 채이나가 똑같이 가르쳤을 것 같은 내용이다. 확실히 두 사람 모두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진 않으니까.

그때 한 병사의 목소리가 일행들의 귓가를 울렸다.

“이것들이 듣자듣자 하니까 아주 지들 멋대로야.”

“우리야말로 적당히 봐주진 않아!”

그 뒤를 이어 이런저런 욕설이 잔뜩 섞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병사들을 너무 가볍게 보는 이드와 마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말들 중에 강렬하게 모두의 귀를 울리는 한마디가 있었다.

“셋 다 붙잡아!”

와아아아…….

누군가의 신호와 함께 원진을 형성하고 있던 병사들이 서로 간의 간격을 조정하면서 급하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조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오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움직였다 싶은 순간 그의 정면에서 창을 들고 있던 병사 하나가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마오가 갑자기 병사의 앞에 나타난 것으로 보일 정도의 빠르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런 마오의 움직임을 알아볼 사람들이 몇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 이드는 마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똑똑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마오의 움직임은 앞전에 용병들을 쓰러뜨린 솜씨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때보다 강한 공격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 기본이 되는 강(强)과 쾌(快)의 도리(道理)가 확실하게 살아 있는 공격이었다.

그 중 강의 무술은 보크로의 파괴적인 루인 피스트에서 온 것일 테고, 쾌는 채이나의 바람 같은 단검술에서 온 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건 다름 아닌 마오,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모의 두 가지 무술을 자신의 몸속에서 잘 섞어 마치 용해하듯 녹여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다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잘 가르치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무술에 대해서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해야겠지?’

이드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마오를 평가해보았다.

이드가 이런 긴박한 와중에도 느긋하게 마오의 무술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이 마오는 여러 병사가 서 있던 자리에 한쪽 발을 디디며 몸을 회전시켜 바로 옆에 있는 병사의 얼굴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옆에 있던 병사의 들을 쳐 땅에 처박아버렸다.

직선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직각으로 꺾어버리는 그 동작은 정말 엘프다운 날렵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마오는 그 병사를 시작으로 병사들이 만들어놓은 원진을 따라 원을 그리며 벌떼처럼 모여드는 병사들을 쓰러트려 나갔다. 정말 강하면서도 사정 봐주지 않는 공격이었다.

마치 부드러움에 빠진 철황권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드가 이제는 한가로울 정도로 여유 있게 마오의 실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채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비슷해 보여?”

“응? 뭐가요?”

이드는 갑작스런 채이나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채이나는 여전히 마오를 바라보며 기분 좋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주먹 쓰는 법 말이야. 그이가 네가 사용하는 무술을 보고 완성시킨 기술이거든.”

이드는 그녀의 말에 보크로가 철황권으로 메르시오와 싸우던 모습을 보고 철황권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지금 마오가 쓰고 있는 루인 피스트가 철황권을 보고 느낀 것을 가미시킨 완성형인 것 같았다.

이드는 그런 생각에 채이나를 향해 그녀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레센에서 본 권법 중에서 최고예요.”

이제는 아예 팔짱까지 끼고 두 사람이 하나의 주제로 말을 나누는 사이 마오는 모든 병사들을 쓰러트린 다음 마침내 수문장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너, 어서 지원을 요청해라.”

수문장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 때문인지 긴장으로 더욱 딱딱해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을 부르러 왔던 병사에게 소리치고는 무거운 동작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 그의 포즈는 더 이상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제국의 관리로서의 수문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기사라는 실제의 정체를 드러내주고 있었다. 사실 수문장은 뛰어난 기사이기도 했으므로.

원래 수문장이란 적으로부터 가장 최종적인 안전을 보장받는 성의 입구를 지키는 자인 만큼 의외로 그 계급이 높다. 더구나 비상시에는 직접 초전의 전투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실력도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웬만한 성의 수문장은 꽤나 실력 있는 기사가 맡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마오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수문장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으로 채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앞에 적을 두고서 고개를 돌리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었으므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방심이었다.

하지만 정작 수문장도 그런 것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기사로서의 자존심이라기보다는 방금 전까지 병사들을 신속하게 쓰러뜨리는 마오의 실력을 직접 본 때문이었다.

“상황 정리는 된 것 같은데, 이 녀석도 쓰러트릴까요?”

채이나는 마오의 말에 궁리하는 표정으로 마오와 마주 선 수문장의 단단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을 나눌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눕혀버려.”

채이나의 말에 마오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마오가 아니라 수문장이었다. 마오가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한 자가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타핫!”

수문장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공격을 해 왔다. 그것은 찌르기였다.

빠르진 않지만 정확한 찌르기! 그 정확함이 정밀할수록 상황에 따라서는 한두 단계 위의 상대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오의 실력은 수문장의 공격 범위 밖이었다.

“스흡.”

마오는 가벼운 한숨소리와 같은 기합성을 흘리며 가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검을 몸을 돌려 피해 버렸다. 마치 걸어가던 방향을 바꾸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오의, 어찌 보면 보통 성인 남자보다 섬세하고 작은 주먹이 수문장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컥!”

그와 동시에 수문장의 입에서 목에 걸려 있던 숨이 뛰쳐나왔다.

하지만 이어져야 할 기합이나 비명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못했다. 강한 충격에 숨통이 그대로 막혀버린 것이다.

수문장은 가슴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압력에 눈을 크게 뜨고서 마오에게로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마오는 수문장을 받아줄 마음이 없는지 그대로 옆으로 비켜섰다.

이드는 맨땅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는 묵직한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통 일격에 상대가 쓰러지면 받아주는데 저 녀석은……

‘이건 분명 채이나의 영향일 거야.’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문장에게 다가갔다. 다름 아니라 수문장의 호흡이 끊어진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잡으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인물이 죽으면 문제가 곤란해지겠지?”

일개 병사도 그렇지만 하물며 수문장이 죽는다면 이건 정말 생각보다 나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문장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던 이드는 엎어져 있는 그를 발로 뒤집은 후 그의 옆구리의 기혈(氣穴) 몇 곳을 발끝으로 차서 트여 주었다.

“커헉……컥…. 흐어어어어…..”

순간 마른기침과 함께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며 먼지 섞인 공기가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드는 땅에 찧어서 피가 흐르는 수문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채이나에게 다가갔다.

“좀 있으면 또 몰려올 텐데, 어쩔 거예요?”

“어쩌긴! 오면 또 한바탕 해야지. 이번 기회에 우리 아들 실전 경험도 확실히 하고 좋지 뭐.”

채이나는 연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대지의 정령을 소환해 원을 그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한 군데로 모았다. 쌀 포대 모아 놓은 듯이 한 군데로 몰린 사람들 사이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대부분 정신을 잃었지만 아픈 건 아픈 것이니까 말이다.

채이나는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드와 마오 두 사람도 불러와 옆으로 앉게 했다.

“그래도 언제까지 그럴 순 없잖아요?”

이드는 자리에 앉으면서 조금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꺼냈다.

“뭐, 어느 정도 하다 보면 등급 높은 인간이 나오겠지. 귀족 말이야. 그 녀석들과 문제를 풀어야지. 그 녀석들도 나오면 누구 쪽 잘못인지 잘 알 테니까.”

“잘만 되면 좋죠. 그런데 잘 안 될 땐 어쩌려구요?”

채이나는 그 말에도 빙글 웃으며 이드의 어깨에 팔을 돌려 감싸 안았다.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일이 잘못 돼도 그냥 뚫고 가면 되지….. 네가 앞장을 서서 말이야. 그렇지? 호호호.”

아아….. 저 마지막 말 끝에 붙어 있는 미소는 왜 저리도 악동, 아니 악당 같아 보이는가. 한마디로 수틀리면 이드를 앞세워 뚫고 나가겠다는 말이었기에 이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건 자신인 것을…..

“네.”

이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병사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뛰어간 곳이 꽤나 먼 곳인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저 멀리서 사람들과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소리에 마오와 채이나에게 신호를 주고는 뒤로 돌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죄송하지만 모두 물러서 주세요. 다시 싸움이 벌어질 것 같네요.”

그 말에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와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뒤로 몰려갔다. 물론 그 중에는 눈치 빠르게 이드 일행으로부터 멀리 빙 돌아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잠시 후 성문 앞으로 팔과 어깨, 가슴 등 방어가 약한 곳을 부분적으로 가리는 파츠 아머를 걸친 이십여 명의 기사들과 그 뒤를 따라온 듯한 오십여 명의 잘 훈련된 듯한 병사들이 이드 일행과 마주 섰다.

그 중 선두에 있던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파츠 아머로 양 어깨와 허리와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짧은 머리의 중년인이었다. 누구의 명령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나선 것으로 보아 그가 기사들과 병사들의 대장인 듯했다.

그는 일행들과 채이나가 한 곳으로 치워 놓은 병사들과 수문장을 번갈아 보고는 먼저 뒤쪽의 병사들로 하여금 쓰러진 사람들을 챙기게 했고 그 다음에야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카린 기사단의 부단장 호란 바다. 그대들인가? 우리 병사들과 수문장을 쓰러뜨린 것이.”

한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면 꽤나 대단한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인지 호란이란 자의 입에서는 처음부터 죄인을 심문하는 듯한 반말이 흘러나왔다.

자연히 듣는 쪽에서도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누구에게든 직설적인 성질이 아닌 채이나가 대답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해 뭐하겠는가.

“척 보면 모르나? 그걸 일부러 물어보게?”

“말을 조심해라!”

순간 채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굵직한 목소리가 채이나의 목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상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채이나의 말투에 호란의 뒤에 서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나선 것이다.

“그대가 비록 여성이긴 하나 부단장님께 말을 함부로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흥, 네가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내가 말을 어떻게 하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채이나는 기사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 쳤다.

그녀에게 경고를 했던 기사는 욱하는 표정으로 검 자루를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마오 역시 반사적으로 단검을 손에 들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나서는 폼이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서 달려 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호란의 목소리가 그 기세를 막았다.

“타루! 뒤로 물러서라. 상대는 엘프다. 엘프에게 인간의 법이나 예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

타루라는 자는 엘프라는 말에 놀란 표정으로 급히 채이나의 귀 부분을 바라보더니 곧 표정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엘프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아는 만큼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드는 그걸 유심히 보고는 어쩌면 이번엔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호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당신의 존재를 미처 몰랐군요. 숲의 주민이여, 사과드리오.”

호란의 말에 채이나는 별말 없이 간단히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무척 무례한 태도였지만, 아까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기사들 중에 채이나를 탓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들의 머릿속에는 ‘엘프다, 엘프다, 다크 엘프다!’ 라는 말만 가득 들어찼다. 뒤늦게 채이나가 엘프, 그것도 다크 엘프라는 것을 인지한 기사들이었다.

“고맙소. 그럼 지금 상황을 대답해줄 수 있겠소? 내가 듣기로 당신의 일행이 영지의 수호 병사들을 공격했다고 하던데 말이요.”

호란의 말에 채이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높이 쳐들고는 손을 들어 아직 정신이 없는 수문장과 병사들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상대의 말에 맞추어 존댓말이었다.

“우리들이 저들을 쓰러뜨린 게 맞아요. 하지만 저들은 우리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죠. 상황을 보아하니 무작정 그들을 따라갔다가는 상당한 곤란을 겪을 듯해서 저들을 물리쳤어요.”

그녀의 말에 호란과 기사들의 시선이 수문장과 채이나를 비롯한 이드와 마오에게로 바쁘게 왔다 갔다 왕복을 계속했다.

그런 기사들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엘프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기에 동료가 범법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 기사도를 아는 기사들이었기에 그런 혼란스러움은 특히 더했다. 강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 어느 집단보다 단순하고 순수할 수 있는 게 기사들이었다.

“그럼 레이디께서는 이들이 무슨 이유로 레이디의 일행에게 누명을 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혼란스러워 정신없는 사이 성격이 급해 보이는 타루가 확인을 바란다는 듯 물었다.

“물론, 말해주죠. 그리고 레이디란 말은 좀 어색하네요. 여기 이렇게 사랑스런 아들이 있거든요.”

타루의 말을 듣고서 채이나에게 시선을 모았던 기사들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엘프의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이어진 채이나의 말에 깨끗하게 치워져 버렸다. 여황의 길에 들어서서 지금의 상황까지.

기사들과 그 뒤의 병사들은 채이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묘한 표정을 해 보였다.

채이나에게 추근댄 용병들이 남자로서 이해가 가기 때문에 묘한 표정이었고, 그로 인해 남자로서 불구가 된 상황이 동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또 묘했기 때문이었다.

“크흠, 레이디…. 아니, 부인의 이야기는…..”

호란은 곤란한 문제에 걸렸다는 생각에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채이나라고 불러주면 좋겠네요.”

“그러죠. 채이나 양, 당신의 이야기는 충분히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대로라면 이번 일은 저희들이 직접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주시면 좋겠군요.”

채이나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별 말씀을….. 당연히 저희들의 일입니다. 그럼 일단 같이 성으로 가시지요. 가셔서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채이나 양의 말씀을 의심하진 않지만 저희들의 방식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입니다.”

호란은 기사단의 기사까지 섞여 버린 이 느닷없는 사건에 작은 한숨을 쉬면서도 일부러 긴장을 풀었다. 그나마 이 정도로 사건이 끝났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채이나의 단호한 한마디에 호란의 얼굴은 뭐 씹은 표정 마냥 일그러지고 말았다.

“좋아요. 협조하죠. 하지만 그냥은 가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채이나 양.”

“지금 이 자리로 이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직접 와서 방금 제가 했던 말을 고대로 해주시는 걸 바래요.”

‘아아…. 채이나.’

이드는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나온 채이나의 억지스러운 요구에는 기어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채이나가 하는 말을 가만히 따져 보자면 그녀가 처음부터 원하던 대로 고위 귀족을 불러내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기사단의 부단장 정도라면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영지의 고위 귀족으로 부족함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채이나는 호란과 심각하게 대화 중이라 미처 물어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채이나의 씨알도 안 먹힐 요구에 호란의 표정이 서서히 분노로 굳어 있었으니 더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지금 채이나 양의 말은 제 말을 신용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만.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점잖게만 들리던 호란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이나의 말에 호란은 그 자신의 신념과 기사로서의 말이 부정당했다고 느낀 때문이었다.

호란이 했던 말을 믿지 못하겠으니, 영주가 나와서 대신 말해 달라니….

그것은 기사도를 지키는 기사로서 가장 수치스러워 해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채이나가 엘프라는 것을 알고서 그녀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던 이십여 명의 기사들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모두들 채이나의 말에 대해서 기사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는 뜻으로 들은 것이다. 뭐, 그녀가 그런 뜻에서 한 말이니 틀린 해석도 아니었다. 다만 기사와 인간 종족 전체라는 커다란 스케일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좌우간 결론은 방금 전까지 좋게 마무리되어 가던 분위기가 이어질 답변 한마디에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처럼 살벌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상황을 결정짓는 채이나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래요.”

고개까지 끄덕이는 채이나의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한 대답이었다.

과연 못 말리는 유아독존 식의 특이한 성격이지만, 엘프란 종족이 확실하긴 한 것인지 거짓이라고는 단 한 점도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주저함 없는 대답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흔히 말을 돌리거나 은유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이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덕분에 호란도 당장 발작은 못 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씹어 뱉듯이 말을 이었다.

“체, 채이나 양. 그 말은 본인을 모욕하는 말임과 동시에 저희 기사단에 대한 모욕입니다. 다시 잘 생각해주십시오. 정말 제 말을 믿지 못해서 영주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래요. 난 확실한 처리를 원하니까요.”

이번 대답 역시 전혀 망설임 없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이제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촤좌좌좌좡 차창 차랑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이십여 자루의 검이 뽑혀 나왔다.

살기마저 여기저기서 치솟는 긴박한 상황으로 돌변하자 대충 일이 끝난 줄 알고 슬그머니 다가오던 사람들이 다시 우르르 뒤로 급하게 물러났다.

“휴,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이드는 채이나의 곁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조용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마오에게 실전 훈련을 시키겠다는 채이나, 아니 그녀의 계획에는 미안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나서서 단번에 상황을 끝내 버릴 생각에서였다.

[…. 채이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드의 생각을 읽은 라미아의 말이었다. 확실히 채이나의 성격상 자신이 생각했던 일이 틀어지면 그 뒷감당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문제를 일으켰다가는 뒤끝이 없는 대신에 소문이 커질 것 같아서 말이야. 거기다 마오의 실전이야 내가 책임져 주면 되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도….’

순간 라미아는 이드가 나서도 결과는 똑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이드가 단지 희망 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를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호란에게서 싸움을 시작하는 말이 들려왔다.

“채이나 양! 당신이 한 말은 우리들 카린 기사단의 기사들 모두를 모욕하고 무시하는 말이오. 때문에 나 호란 바는 기사로서의 이름을 걸고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요. 하지만 그대가 여자인 점을 감안해 대리자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며, 마지막으로 당신이 했던 말을 사과와 함께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주겠소.”

호란은 성큼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검을 휘둘러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게 채이나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작은 웃음을 흘리며 마오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고 했다. 유령처럼 갑자기 눈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드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야, 네가 왜 나서는 거야?”

원래 하려던 말 대신에 슬쩍 몸을 반쯤 돌려 채이나 앞에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이드는 그 목소리에 슬쩍 몸을 반쯤 돌려 채이나 앞에 두 손을 모아 보였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번엔 내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오래 끌어서 좋을 것도 없겠고. 무엇보다 마오는 아직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한 경험이 없잖아요. 혹시라도 누가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다구요. 실전이라면 내가 확실하게 훈련시켜 줄게요, 네?”

이드의 간청하는 듯한 말에 채이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뭔가를 궁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 실전 기회는 또 있겠지. 네가 처리해. 대신 우리 아들 실전 훈련은 물론이고, 지도까지 해줘야 한다. 너!”

끄덕끄덕

왠지 저 계산적이고 극성스러운 모습에서 한국의 아줌마가 생각나는 건 착각일까?

이드는 뒤통수에 삐질 땀 한 방울을 매달고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앞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불같이 분노가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드와 채이나가 이야기를 마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드는 그들을 바라보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채이나 양 대신 자네가 나온 것이 내 말에 대한 대답인가?”

채이나의 대답 대신 앞으로 미리 나선 이드를 보자 호란이 굳은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채이나는 그다지 인간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거든요. 특히 커다란 단체에 속해 있는 인간의 약속은 말이죠.”

그 말에 호란이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도 그 말에 뭔가 느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검을 거둘 생각은 없는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으음….. 나도 유감이군. 하지만 우리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 자네 일행에게 검을 들이대야겠군. 그런데… 설마 내 검을 받을 상대가 자네인가?”

이드는 손등까지 덮고 통이 넓은 여름 여행복의 소매를 걷어 올려 고정시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상대합니다.”

“내가 수문장을 쓰러뜨린 것은 소년이 아니라 저 청년이라고 들었는데…. 난 아직 어린 소년에게 검을 쓰고 싶지 않군.”

이드는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피식 웃어 버렸다.

“젊게 봐 주시니 고맙지만 저는 저 녀석보다 나이가 많죠. 동안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저 역시 당신과 검을 맞댈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말이지? 거기 허리에 검이 매달려 있지 않나?”

나이에 대한 건 믿지 않는 건지 검에 대한 것만 묻는 호란이었다.

이드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팔꿈치까지 뽀얀 맨살을 드러낸 두 팔과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저는 이 양손을 쓸 생각이거든요.”

호란은 그런 이드의 행동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박혀 있지 않아 맨들맨들하게만 보이는 두 손과 여인의 팔처럼 가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눈에 보이는 근육도 없는 팔은 너무나 약해 보였던 것이다.

“허! 파이터인 모양이군. 하지만 그다지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 실력으로 마스터의 검을 받겠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엔 만용이라고 보는데….”

“그건 제 문제죠. 그보다 오시죠. 뒤의 분들을 상대하기 전에 호란 경은 정식으로 상대해 드리죠.”

순간 호란은 눈썹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이드를 향해 걸어 나왔다.

“채이나 양은 엘프이니 이해하지만, 네 놈은 건방지구나. 말을 너무 함부로 했어.”

“훗, 먼저 공격하시죠.”

이드는 공격 가능한 거리까지 다가온 호란을 바라보며 빙글 웃어 보였다. 이드로서는 여유로운 웃음이었고, 보고 있는 호란 입장에서는 건방진 웃음이었다.

덕분에 호란은 망설이지 않고 이드의 말대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그의 검엔 검기도 실리지 않았고, 검이 향하는 방향 역시 정확히 맞아도 죽지 않을 팔목 부근이었다.

하지만 검으로 몸의 한 곳을 절단낼 생각은 분명한 것인지 상당히 빠른 속도를 가진 베기였다.

그러나 그런 베기도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이드는 딱 한 걸음의 움직임으로 호란의 검을 간단하게 피해 버렸다.

휘이이잉

“제법. 합!”

자신의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자 호란은 한마디 기합성과 함께 왼쪽으로 베어낸 검을 그대로 대각선 방향으로 올려 베었다. 조금이나 쉽게 피해 버리는 이드의 움직임에 바로 진지하게 목을 노려 온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드를 쉽게 보는 것인지 마나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이거, 이거, 날 너무 얕보는 것 같군요. 이런 검으로는 내 옷깃도 스치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죠.”

이드는 다시 옆으로 반걸음 몸을 옮겼다. 그러자 호란의 검은 자연히 이드의 머리 위쪽으로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 간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격인데, 이드는 단 한 걸음의 움직임으로써 간격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으니… 호란의 검이 이드에게 닿을 리가 없는 것이다.

호란도 검을 수직으로 한 번 더 내려 긋고서야 그런 사실을 인정했다.

마음을 바꾸자 자연스럽게 호란의 검에서 뿌연 연기와 같은 검기가 형성되어 검과 호란의 상체를 감돌았다. 검기가 사용되자 허공을 가르던 호란의 검의 기세가 확실히 변했다.

좀 더 정확하고, 빠르고, 단순하게. 마치 기계와 같은 움직임의 검술이었다.

“이런 검술은 그 자체가 약점이죠.”

이드는 태평스레 말하며 막 허리를 수평으로 베어내는 호란의 검을 뒤로 물러서듯 피했다. 그러자 호란은 실패한 수평 베기를 그대로 찌르기로 변환시켜 이드의 가슴을 노렸다. 말 한마디 없는 신중한 검술이었다.

진지한 공격이 이어지자 이드는 이번엔 피하지 않고서 슬쩍 왼쪽 손의 손등을 검의 진로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검극과 손등이 닿으려는 순간 이드의 손에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처럼 빙글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검 면으로 흘러가 붙었다.

“당신의 검에 필요한 건 이런 화경(化境)의 유연함이죠.”

이드는 검과 마주 닿은 손으로 내공의 운용법 중 접(接)과 인(引)을 이용해 검의 힘과 진행 방향을 틀어 땅바닥으로 흘려보냈다.

“크흐윽….”

순간 폭약이 폭발하는 폭음과 함께 이드가 틀어 놓은 호란의 검이 바닥에 꽂히며 지금 일 미터 정도 넓이의 땅이 푹 꺼져 들어갔다.

방금 전 공격으로는 나올 수 없는 파괴력이었다.

더구나 땅이 폭발하지 않고, 힘에 의해 꺼져 버린 것은 호란의 정확함을 기초로 하는 검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결과는 이드의 수작이었다.

검을 끌어당겨 흘릴 때 검 끝에 무거운 철황기의 내력을 밀어 넣은 것이다. 물론 쓸데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호란의 검이 땅에 박히며 일어난 반발력으로 몸속의 내력이 뒤틀려 꼼짝을 못 하는 것처럼 고수가 하수를 상처 없이 제압할 때 쓰는 수법이었다.

“그럼 잠깐 몸을 달래고 있어요.”

이드는 허리를 펴지 못하는 호란에게 한마디를 건네고 그를 지나쳐,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야 이드가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검사들이 황급히 손에 든 검을 가슴으로 들어 올렸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자신들의 부단장이 힘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비참할 지경으로 당해 버린 탓이었다. 그것도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 같았던 상대에게 당했으니 더욱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드는 그들을 조금은 짓궂게 훑어보며 조금은 사악한 미소와 함께 양손을 가볍게 허리 높이까지 들어 올리더니 본격적으로 내력을 개방했다.

우우우웅……

순간! 마치 수백 마리의 벌떼가 날아오는 것 같은 소리가 이드의 팔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손가락 끝에서부터 황금색 빛 무리가 번지듯 일어났다.

그 빛 무리는 벌떼의 소리를 배경으로 천천히 어깨까지 넓혀 가며 양팔을 황금빛으로 감쌌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황금빛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마나의 위압감이라니….

“이, 이건…”

이드를 향해 검을 빼 들던 기사들은 그 갑작스런 현상에 정신이 확 드는 표정들로 주춤거렸다.

기사들이란 대부분 마나를 느끼는 자들이다. 덕분에 그 황금빛 강기가 주는 커다란 내력의 위압감을 고스란히 느낀 것이다.

이드는 고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의 양팔을 내려다보았다. 현재 이드는 금령단공(金靈丹功) 상의 금령단천장(金靈斷天掌)의 공력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하지만 보통 금령단천장을 펼쳐낼 때는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화려한 모습이 연출되긴 하지만 이렇게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요란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종의 보여 주기! 다시 말해 쇼였다.

사람은 자신의 상식 밖의 일은 봐도 믿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신 얼토당토않은 것이라도 보여 주면 그대로 믿어 버린다. 해서 이드는 이 화려한 장관과 이후에 드러날 금령단천장의 위력을 보여 줌으로써 곧바로 채이나가 원하는 고위의 귀족을 끌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럼…. 잠깐 기절해 있도록 하라구요. 금령단천장 환(幻)!”

대기를 웅웅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와 함께 아직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이드의 양손이 뻗어 나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양 손바닥으로부터 빛이 터져 나온 듯 보였다.

그 빛은 처음 이드에게서 나올 때는 두 개였다가 곧 네 개로, 또 여덟 개로 점점 늘어나 기사들 바로 앞으로 다가갔을 때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처럼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

그리고 그 금으로 만든 듯한 황금빛의 벽이 그들을 향해 넘어지듯이 덮쳐 나갈 때,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 사이로 경악성이 들리며 급하게 검을 휘두르는 뒤늦은 방어가 보였다.

“하앗!”

이드는 눈을 빛내며 마지막 기합성을 발했다.

하지만 이드의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 기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황금색의 손 그림자로 이루어진 벽이 그대로 땅에 부딪히며 거대한 폭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구구궁

그것은 한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마치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대지의 비명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폭음과 충격파에 먼지와 돌덩이들이 주변으로 폭발하듯 날아가며 기사들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을 덮쳐 쓰러트렸다.

이드는 그걸 확인하고는 바로 내력을 끌어 올려 주변의 충격파와 먼지를 내리 눌러 없애 버렸다. 그냥 뒀다가는 뒤에 있는 채이나와 상인들이 애꿎게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드에 의해 먼지가 순식간에 걷히고 나자 기사들이 서 있던 곳이 온전히 드러났다.

순간, 더 한쪽에 모여서 바라보고 있던 상인들과 일반 영지민들이 경악성을 발하며 웅성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기사들 주변의 땅이 움푹움푹 파여 있었고, 길게 도랑이 난 곳도 있었다. 지구에 있는 폭탄이 터졌다기보다는 마치..

마치 고대에 존재했다는 거인 타이탄이 손으로 장난을 쳐 놓은 모습이랄까?

거의 사방 백 미터 정도로 땅거죽이 뒤집어진 폐허가 딱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특이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땅보다 단단할 것이 없는 기사들의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이 그저 잠을 자듯이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쓰러진 그들 주위의 땅 역시 전혀 피해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이드가 안배하고 원했던 모습이었다. 최대한 위압감과 공포감을 주면서도 희생은 내지 않는 것!

사실 기사들은 금령단천장에 의해 혈을 타격받고는 제일 먼저 기절했었다. 그 뒤에 강력한 파괴력을 담은 장강이 땅을 때려 터트렸고, 그 뒤를 따라온 무형의 장력들이 땅의 파편이 기사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도록 보호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번의 출수(出手)로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겨우 내부의 마나를 다스린 듯한 호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 병사…..”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찾는 호란의 몸은 어느새 기사들이 서 있던 자리, 지금은 이드에게 초토화 되어 버린 그 자리를 향해 있었다.

신음하듯 나온 호란의 목소리에 엉망이 된 땅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 듯한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물론 이드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말이다.

호란은 그를 보고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당장 성으로 직접 달려가서 네가 본 것을 소영주께 직접 말해라.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네가 본 것만을 말해라. 그리고 기사들이 모두 살아 있다고 말해라….. 어서!”

호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던 병사는 급히 발길을 돌려 성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로서는 수문장의 명에 이어, 두 번째 들어서는 성문이었다.

병사가 성 안으로 사라지자 호란은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아 버렸다.

기사의 긍지고, 자존심이고 이제는 더 이상 생각지 않는 모습이었다.

허기사 그런 것들도 모두 힘이 받쳐줄 때 지켜지는 것들이다. 지금처럼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대면하게 되면 그런 것들은 그저 말장난으로 여겨질 뿐이다. 지금 호란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드는 그런 호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호란이 처음 그 위용과 위세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던 것이다. 기사의 도리를 소중히 여겼던 만큼 말이다.

채이나는 일이 끝나자 다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드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마찬가지로 바닥에 앉았다. 그 옆으로 마오가 낯선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이나는 두 사람이 옆으로 다가오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령을 불러 널브러진 병사들과 기사들을 정리했다. 병사들은 먼저 쓰러진 병사들에게로, 기사들은 호란의 곁으로.

“근데 너 좀 너무했던 거 아냐?”

사람들을 모두 치워 버린 후 채이나가 던진 한마디였다.

이드는 그 말을 듣고는 오히려 얼굴 가득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채이나를 바라보았다.

“…… 진짜 너무한 게 누군데요. 이 일은 채이나가 시작한 거잖아요!”

채이나가 원하는 쪽으로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일부러 쇼까지 했던 이드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저렇게 심하게 할 줄은 몰랐지. 너도 알지만 이건 마오의 실전 경험을 위한 거라구.”

“…..”

이때는 내 책임 없다, 라고 말하는 채이나의 뺀질거리는 모습에 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말해 봤자 자신만 답답할 듯해서였다.

그때 채이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쨌든 우리 아들, 실전 훈련은 확실히 해 줘야 된다. 약속 잊지 마.”

아들, 아들이란 말이지. 이드는 채이나의 말에 마오를 돌아 보고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하게 훈련시켜 주죠.”

순간 그 말에 마오가 한기를 느낀 것은 우연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드의 허리에 매달려서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라미아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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