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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69화


그리고 문이 완전히 열리며 은은한 분위기가 흐르는 방 안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벨레포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인이 서 있었다.

“손님들도 오셨군. 여기로 와서 앉지.”

마치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대하는 듯한 자연스러움. 마치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듯 방의 모습과 꼭 맞춘 듯한 묘한 아우라가 그 중년인의 주위에 배어 있었다.

그의 그런 분위기는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풍겼다.

그런 독특한 분위기에, 그를 처음 보는 바하잔과 이드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바하잔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상당히 아깝다는 표정과 함께였다.

놀라기는 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앞의 바하잔이 놀란 이유와 같은 것도 조금은 있었지만, 이드는 다른 이유에서 경악하고 있었다.

그런 이드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치 음식을 초대받고 가다가 개똥을 밟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모습일지… 저는 안 밟아 봤는데 혹시 그런 일이 있으신 분…은 없으시겠죠?)

조금씩 벌어지는 이드의 입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음성이 끊겨 흘러나왔다.

“…..영감…탱이… 광노… 자림… ~!!”

마치 씹어 뱉어내는 듯한 이드의 목소리에는 사뭇 어색하지만 작은 살기까지 묻어 있었다.

그리고 마치 무엇을 찾는 듯 금발의 중년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드의 귀로 벨레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이드로서는 벨레포의 목소리가 한쪽 귀로 흘러나갈 뿐이었다.

이드의 눈은 여전히 그 중년인에게 못 박힌 듯 정지해 있었다.

‘진정하자… 예천화! 이곳은 절대 중원이 아니다… 그러니까 저기 저 사람은 절대로 그 자림… 미친놈에 영감탱이가 아닐 거야… 그럼 아니고 말고…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는 아니야…’

그러나 그렇게 되뇌면서도 금발의 중년을 보고 있는 이드의 머리는 1년이 다 되어가는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 1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누님들이 떠나고 나자 갑자기 조용해져 버린 집안의 분위기에 이드는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달래고자 누님들이 말했던 대로 그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산속에서만 살았으니 중원을 구경해보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누님들이 떠나고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중원으로 처음 나와서 황당한 일도 꽤 당했던 이드는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5일 만에 꽤 많은 경험을 한 이드는 그날만큼은 편히 쉬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근처에 있는 봉령(鳳玲)이란 아름답고 깊은 산세를 가진 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아무리 여름이고 편히 쉬고 싶다고 해도 아무 곳에서나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쉴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산을 조금 돌아다니던 이드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꽤 깊은 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를 만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영감탱이… 호자림을.

‘젠장…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런 자연의 기운을 풍기는 신태 비범한 늙은이가 그런 짓을 할 줄은…’

이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앞에 있는 금발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 얼굴은 완전히 틀에 찍어 낸 듯 닮아 있었다. 만약 머리카락의 색만 반흙 반백이었다면 그 누구라도 가려내지 못할 정도로.

‘으~ 그놈의 영감 때문에 한 달이나 산에 갇혀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드로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에 열이 오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중원에서 몇 번 그를 만나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때의 원한을 풀 기회가 없었으니…

이드로서는 마음에 불꽃이 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게 늦어진 감정으로 복수심을 불태우던 이드의 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는 사람과 닮기라도 했나? 그렇지만 그렇게 뚫어지게 보다간 내 얼굴이 뚫려 버릴지도 모르이… 허허허.”

그제서야 이드는 자신이 초면임에도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실례를… 제가 아는 어떤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계셔서…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정중히 사과를 표하자, 케이사 공작은 아니라는 듯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허허, 아니닐세… 오히려 자네 같은 절세미남을 보는데 그 정도야 별문제 되겠는가?”

그 말에 이드는 케이사 공작이 화가 났다거나 불쾌하다는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이드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을요… 그러시는 공작님이야말로 젊으셨을 때는 엄청난 미남이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하지만 자네 정도는 아니지. 그럼 이렇게 서서 있을 것이 아니라 모두 앉지들. 자리는 앉으라고 있는 것이니 말이야. 그리고 벨레포, 자네도 앉아서 이 사람들을 소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케이사 공작의 말에 벨레포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크널, 토레스, 바하잔, 그리고 이드를 창가 쪽에 놓인 자리로 이끌었다.

창가라고 해서 답답한 느낌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놓은 자리 배치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드들이 서 있는 이 서재는 거의 집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넓었다. 그런 곳에서 답답함을 느낄 이유가 없으니, 창가 자리의 목적은 경치 구경일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중앙에 케이사 공작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자리에 앉았다.

꾸우우우우우욱… 뜨드드드득…

갈색의 깨끗한 가죽 소파에 앉자 들려오는 소리였다. 어떻게 들으면 조금 시끄럽고 불편한 소리 같지만, 앉은 이들이 느끼는 감촉은 끝내주는 것이었다.

몸을 완전히 감싸는 듯 푹 꺼지는 소파.

자리에 앉은 이드는 자신의 등과 엉덩이를 떠받치는 소파의 푹신함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나크렌에서도 푹신한 소파에 앉아보긴 했지만, 황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이드는 이런 고급스러운 소파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중원에서는 이런 것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더욱 그랬다.

‘중원에 돌아가면 집에 하나 만들어야지… 푹신푹신한 게… 잠자기도 좋고… 앉아있어도 기분 좋고… 차차… 하나가 아니구나, 누님들 것까지 치면…’

이드가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빠져들려 할 때, 벨레포의 목소리가 넓은 서재의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럼 제가 모두를 소개를…”

벨레포가 나서서 모두를 소개하려 하자, 케이사 공작이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 됐네. 본인들이 직접 하지. 굳이 격식을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우선 두 사람에게 내 소개를 하지. 나는 현 라일론 제국에서 부담스럽게도 공작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지. 이름은 케이사라 하면 될 것이야.

검의 제국이라는 라일론에서 검술도 못하는 사람으로서 공작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지.”

약간의 농담을 섞은 케이사의 말이 끝나자, 이어서 이드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드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직업은… 현재 용병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정도 실력이시라면 어지간한 소드마스터 이상일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이어 장난스러운 농담이 이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저를 처음부터 남자로 봐주신 분은 공작님이 처음이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이드의 표정은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라미아 덕에 뜻하지 않은 횡재를 했어… 전화위복이라…’

그렇게 즐거워하는 이드의 손이 저절로 얼굴로 올라가 매만졌다.

그런 이드의 얼굴은 얼마 전과는 무언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라미아의 프리피케이션(purification)으로 이드의 마나가 한 차례 변화를 거친 후…

이드가 운용 중이던 선녀옥형결(仙女玉馨決)과 옥룡심결(玉龍心決).

그리고 그 중에서 옥룡심결을 흡수해 이드의 모습을 여성으로 바꿔 놓았던 선녀옥형결이 마침내 그 독주를 멈추고 옥룡심결과의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드를 여성처럼 보이게 하던 여성스러운 염기가 사라진 것이었다.

거기다가 나긋나긋하다 못해 날아갈 듯하던 몸매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자답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벨레포 등의 네 사람뿐이었다.

전에 이드의 모습을 알지 못했던 케이사로서는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이드의 다른 말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내 실력이라… 자네가 내 실력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케이사의 얼굴은 부드러웠지만, 말투는 그렇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웬만한 검사 정도만이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긴 했으나, 확실히 짚어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방금 이드의 말투는 그의 실력을 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케이사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답하는 이드의 목소리는 케이사의 분위기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 밝은 목소리였다.

“보이니까요. 공작님 주위로 퍼져 있는 대지와 맞닿아 공명하는 마나의 기운… 그게 눈에 보이니까요.”

이드의 말에 케이사 공작의 눈이 절로 커졌다.

그의 눈에는 놀라운 듯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이드의 말과 케이사의 표정을 본 나머지 네 사람은 눈만 데룩데룩 굴릴 뿐이었다.

잠시 이드를 바라보던 케이사가 벨레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설명을 요구하는 듯했다.

벨레포 역시 케이사 공작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방금의 대화 내용과 관련해 알 수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그의 생각으로는 바하잔의 일이 더 급했기에 대답을 피했다.

“우선은… 이쪽 말부터 듣는 것이 좋겠네요. 이쪽이 훨씬 급하니까요.”

케이사는 잠시 벨레포를 바라보다가, 이드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바하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벨레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 자네는 누구인가?”

케이사의 물음에 바하잔이 자세를 바로잡고 케이사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에서는 어느새 케이사 공작과 비슷한 위엄이 풍겨나고 있었다.

“본인은 카논 제국의 공작직을 맡고 있는 바하잔 레벨레트 크레스트라 하오이다.

라일론 제국의 케이사 공작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갑자기 바뀌다니…’

찰나의 순간에 표정이 바뀐 케이사의 모습이 이드의 눈에는 꽤 재미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드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렇게 굳어진 얼굴로 케이사가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벨레포…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러나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벨레포가 아닌 케이사의 시선이 머물던 바하잔에게서 들려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제가 하지요. 케이사 공작…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벨레포 백작과 레크널 백작에게는 이미 한 이야기지만… 얼마 전이었소…”


그렇게 시작된 바하잔의 이야기는 벨레포 등에게 했던 내용을 다시 케이사를 향해 자세히 풀어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이 이어짐에 따라 실내의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아 갔다.

그러나 어디서나 예외적인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이드가 그러한 존재였다.

이미 한 번 들은 이야기. 괜히 골머리를 썩인다고 더 나올 것도 없을 터.

벌써부터 저렇게 걱정한다고 무엇 하겠는가, 하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자연스레 이드의 시선은 서재의 이곳저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크단 말이야… 이놈의 나라에서는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뭐든 이렇게 커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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