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76화
크레비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여황을 바라보았다.
“베후이아, 이번 일은 더 생각해 볼 것도 두고 볼 것도 없다. 지금 당장 사신을 보내던지 마법으로 통신을 하던지 해서 아나크렌과 급히 의견을 나누어라. 만약 잘못된다면 이들의 말대로 세 제국의 역사가 조만간에 끝나 버릴지도 모르겠다.”
크레비츠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크레비츠를 향해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황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로서는 항상 웃으며 사는 할아버지인 크레비츠가 저렇게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님.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닐까요? 아직 주요 귀족들의 의견도 수렴해보지 않았는데.”
“아니다. 그런 녀석들 의견 들을 것도 없다. 너도 상황 파악이 다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자기밖에 모르는 놈들이 언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한단 말이냐. 잘 들어라, 베후이아.”
크레비츠는 그 말과 함께 이드와 바하잔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두 사람 모두 그래이트 실버의 경지에 들었다. 그런데 그런 그래이트 실버 두 명이 같이 덤볐는데도 힘들었던 상대라면… 베후이아, 그 힘이라면 말이다. 그들 두, 셋이 본 제국의 모든 힘과 맞먹는다고 생각하면 될 게다. 지금 여기 있는 바하잔, 이드 그리고 나까지. 이 세 명 중 하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도 수십 개의 군단이 나서야 하는데, 그런 실력자들 두 명이 하나를 상대 한 것이다. 알겠니?”
크레비츠의 말에 여황 역시 어느 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보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시녀에게 무언가를 전하고는 곧바로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크레비츠와 바하잔 등을 바라보았다.
“전쟁 시라 항시 준비되어 있던 회의가 소집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나크렌과 마법으로 통신해 보겠습니다. 할아버님도 그때는 나오셔야 해요.”
그녀의 말에 크레비츠는 방금까지의 분위기는 잊은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인석아. 이번 일에 반대하는 놈이 있으면 내가 확실히 손을 봐주지.”
“할아버님.”
이드는 다시 날카롭게 쏘아보는 여황의 눈빛에 그냥 웃어버리는 크레비츠를 보며 씩 웃었다.
그때 일리나스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여황이 크레비츠의 성격을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 크레비츠의 웃음이 끊기더니 그의 시선이 바하잔에게로 돌았다.
“거, 내가 깜빡하고 있었는데. 자네 혹시 그 소드 마스터를 찍어낸다는 것에 대해 뭐 알고 있는 게 있나? 자네가 오늘 와서 이야기한 것 말고 다른 부수적인 걸로 말일세.”
크레비츠의 말에 바하잔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으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알아낸 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니네. 그걸 모르는 게 왜 자네 탓인가. 괜찮네.”
이드는 바하잔과 크레비츠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거, 제가 조금 알고 있는데.”
조용히 내뱉은 말이기는 했지만 좌중에서 이드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순식간에 이목이 이드에게 모이자 크레비츠가 이드를 향해 말했다.
“알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좀 들은 것이 있거든요.”
이드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크레비츠와 좌중의 인물들에게 아나크렌에 있는 아프르의 연구실에서 일란과 아프르에게서 들었던 마법진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했다.
“그런 마법진인가. 그런데 자네는 어디서 들은 건가?”
이드는 자신을 향해 묻는 크레비츠를 보며 잠시 갈등이 일었다.
사실대로 말하느냐 마느냐. 사실대로 말하게 되면 꽤나 귀찮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두 나라가 손을 잡게 되면 크레비츠들이 알게 될 일이었다.
“아나크렌의 황궁에 있는 아프르의 연구실에서 들었습니다.”
이드의 말에 여황이 바로 반응해 왔다.
비록 전쟁을 생각지는 않더라도 라일론과 비슷한 국력을 가진 상대국에 대해 조금은 알아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읽은 아나크렌에 대한 자료 중 방금의 연구실에 대한 것 또한 들어 있었던 것이다.
“거긴, 아나크렌의 요인들과 황제의 친인들만 드나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 아나크렌의….”
여황의 말에 이드는 그녀가 엉뚱한 말을 하기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아나크렌 출신도 아닌걸요.”
“그럼 어떻게 그 연구실에 간 거지?”
이드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지금 상황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비츠, 여황의 할아버지와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여황과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킨 말이라니.
‘크레비츠씨에게 말하는 걸 좀 조심해야겠다.’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우연찮게 아나크렌의 황궁 내 일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한 것 때문입니다. 덕분에 황궁에서 아는 사람도 꽤나 생겨버렸지요.”
하지만 여황은 아직 이드의 말에 만족하지 못한 듯, 무언가를 더 물으려 했다.
그때 대회의실인 크레움에 모든 귀족들이 다 모였다는 보고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여황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알았다. 곧 간다고 전해라. 할아버님, 가세요.”
여황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야기하자 크레비츠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공작과 백작들 뒤로 물러나던 바하잔과 이드를 보고는 여황을 바라보았다.
“베후이아, 저 둘도 데리고 가야겠다. 아나크렌과 이야기하려면 저 두 사람의 증언도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크레비츠의 말에 바하잔과 이드를 잠시 바라보던 여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몸을 일으켰고, 크레비츠는 그런 그녀의 옆에 섰다.
그 뒤로 공작들이 줄지어 서며 크레움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여황과 크레비츠의 뒤를 따르던 이드는 황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황국의 중앙부에 위치한 커다란 백색의 문 앞에 섰다.
문 앞에는 네 명의 기사가 서 있었는데, 앞으로 다가오는 여황과 크레비츠를 보고는 깍듯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회의실의 문을 열며 크게 여황의 행차를 알렸다.
그 기사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톤에 적당한 크기였는데, 이런 일을 위해 일부러 뽑은 기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황과 크레비츠의 뒤를 따라 들어선 대회의실, 크레움은 넓었다.
입구의 반대쪽 벽에는 황금빛 검을 들고 전쟁터를 거니는 영웅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웅장함이 대단했다.
특별한 부조물 없이 깔끔한 무늬가 새겨진 벽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느낌을 주었다.
또한 중앙에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석검과 석검 손잡이 부분에 달려있는 맑은 빛을 뿜는 수정은 장관이었다.
그 수정의 양측으로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밖에서 보았던 황궁의 모습처럼 단순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황의 뒤를 따라 들어서던 이드는 앞에서 걷고 있던 케이사 공작과 벨레포, 레크널이 우측의 긴 테이블에 늘어선 십수 명의 사람들 사이로 방향을 바꾸자 같이 방향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앞서 걷던 벨레포가 앞으로 그냥 걸어가라는 듯 손짓하는 모습에 바하잔과 같이 여황의 뒤를 따랐다.
여황이 걸어가는 곳은 영웅왕의 모습이 그려진 벽 아래 놓여진 최상석의 자리였다.
그 자리로 걸어간 여황은 자신의 옆으로 크레비츠를 앉게 하고, 시중들을 시켜 한쪽 옆에 바하잔과 이드의 자리를 마련해준 후 앉았다.
그리고 아직도 허리를 굽히고 있는 여러 대신들에게 입을 열었다.
“모두 착석하세요.”
청아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리자 크레움의 큰 문이 닫히며 대신들이 자리에 앉았다.
크레비츠를 대하던 때와는 달리, 그녀의 겉모습과 어울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자리에 앉아 여황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대신들은 곧 얼굴에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여황의 곁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 크레비츠 때문이었다.
크레비츠가 앉아 있는 자리는 10여 년 전 여황의 남편인 게메르 대공이 죽고 나서 항상 비어 있었던 자리였다.
그리고 여황과 같은 자리는 아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드와 바하잔 또한 그들의 의아함을 부추겼다.
그 모습에 꽤나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던 파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십 대 후반의 크레비츠와 같은 나이로 보이는 그는 약삭빠르게 보이는 가는 눈으로 크레비츠를 기분 나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폐하, 실례되는 말이오나 폐하의 친인을 함부로 이곳에 들이시는 것은, 크윽…”
꽤나 능글맞은 말을 내뱉던 파고 백작은 인상을 굳힌 채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 크레비츠의 모습과 함께 배를 부여잡고 자신의 자리로 쓰러지듯 넘어져 앉았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이 즉시 검을 뽑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가 지금 뭐하는 것인가.”
“네놈이 감히 이곳에서 난동을…”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크레비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닥쳐라. 나 크레비츠는 네놈들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모두 자리에 다시 앉아라. 그렇지 않은 놈들은 황실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 자리에서 목을 쳐버리겠다.”
마치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크레비츠의 말대로 쉽게 자리에 앉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검을 뽑은 상태였고, 자신들의 수를 믿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크레비츠의 눈썹이 일그러지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케이사 공작이 장내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폐하께옵서 직접 모시고 오신 분께 이 무슨 무례란 말이요.”
“크윽, 하지만 공작 전하, 저놈은 이곳의 귀… 카악….”
케이사의 말에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반박하던 파고는 다시 한번 배를 부여잡고는 뒤로 나뒹굴었다.
“흥, 네놈이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놓고 귀족 운운한단 말인가. 베후이아, 어찌 저런 놈들을 그냥 두었느냐. 내가 재위했을 때는 저런 놈들이 없었거늘… 뭣들 하느냐. 어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느냐.”
하지만 크레비츠의 말에 쉽게 자리로 돌아가는 인물은 없었다.
크레비츠의 말대로 파고가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크레비츠의 말대로 한다면 자신들은 정체도 모르는 인물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대신들과 함께 검을 급히 뽑아 들었던 코레인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 또한 크레비츠만 아니었어도 직접 검을 들고 나섰겠지만, 알지 못하는 외인이 나서자 자연스레 검을 뽑아 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니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외인이 함부로 날뛰는데도 여황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여황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공작인 케이사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그대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오.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 주시겠소.”
코레인이 어느 정도 예를 갖추어 말하자 크레비츠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굳었던 얼굴에 씩하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코레인은 상대의 하대에 기분이 상하고 당황스러웠다.
공작인 자신에게 하대를 하다니, 그것도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자가 말이다.
그렇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당당한 태도, 거기에 라운 파이터의 스페이스 기술이라니, 왠지 검을 뽑은 것이 더 불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본인은 본 제국의 공작인 랜시우드 크란드 코레인이요.”
“훗, 공작이라고 다른 놈들보다는 조금 낫구나.”
크레비츠의 말에 장내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졌다.
“나는 크레비츠 모르카오 시드 라일론이다. 여기 베후이아는 내 손녀 되지. 답이 되었다면 당장 자리로 돌아가라.”
하지만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크레비츠의 말에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고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크레비츠의 당당한 태도에 코레인은 케이사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침착함을 유지하는 그라면 무언가 알 듯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케이사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코레인은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신 코레인 공작, 크레비츠 선 황제 폐하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코레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그의 뒤에서 사태를 바라보던 다른 대신들도 얼굴이 하얗게 변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선 황제 폐하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