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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80화


다음날 이드는 아침 일찍부터 상당히 바빴다.

이미 아나크렌으로 가기로 정해졌고, 출발 시간도 대충 정해져 있었기에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은 이드로서는 바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벨레포의 말대로 저택에 남은 용병들 중 자신과 함께 갈 사람을 골라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와 같이 가실 분 손들어 보세요.’ 하고 말하면 끝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같이 가게 된 인원이 이드와 프로카스를 제외하고 여섯 명이었다. 토레스, 가이스, 모리라스, 라일, 칸,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벽부터 이드의 한쪽 팔을 점령하고 매달려 있는 작은 존재, 카리오스였다.

전날 메이라와 함께 돌아와서는 어떻게 이드가 아나크렌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는지 새벽같이 일어나 이드에게 붙어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케이사 공작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꼬옥 붙잡고 있는 폼이라니…

한쪽 손을 슬쩍 들어올려 카리오스를 떼어내려던 이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메이라가 나서서 케이사 공작에게 몇 마디를 했는데, 그 말이 있고 나자 케이사 공작이 그냥 데려가란다.

이드가 “위험하지 않을까요?”라고 몇 마디 말을 건네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다.

덕분에 이드는 이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한숨과 함께 카리오스도 데려간다는 결정을 봐야 했다.

그렇게 몇 가지 옷가지를 챙기는 것으로 가벼운 준비를 마친 이드들은 케이사 공작과 크레비츠를 따라 왕궁에 마련된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진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드는 자신을 중심으로 매우 복잡한 형태로 배치되어 원인지 다각형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마법진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아침과는 달리 이드의 옷자락을 붙들고서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긋거리는 카리오스.

이드는 그 모습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카리오스를 잠시 바라보던 이드는 고개를 들어 크레비츠와 여황, 그리고 몇몇 대신들과 함께 서 있는 케이사 공작을 바라보았다.

“케이사 공작님. 정말 카리오스가 절 따라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드는 제발 케이사 공작이 마음을 돌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드의 그 목소리에는 전혀 기운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케이사 공작은 전혀 걱정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고 말고. 자네 실력이야 크레비츠 전하께서 인정하시지 않았나. 거기다 녀석이 따라가길 원하고 녀석도 같이 갔다 오면 뭔가 배워 오는 게 있지 않겠나.”

이드는 아까 전과 비슷한 말을 하는 케이사 공작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메이라가 저 공작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태연자약한 반응을 보이는지 도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만 이동시켜 주십시오.”

될 대로 되라는 듯 포기한 듯한 이드의 목소리에 케이사 공작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서 있는 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엘레디케님.”

“알고 있습니다, 전하. 마법진 주위에 위치한 모든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시오.”

라일론의 궁정 대마법사인 엘레디케의 말에 따라 마법진 가까이 있던 몇몇의 마법사와 대신들이 뒤로 물러섰다.

마법진 주위에서 모두 물러선 것을 확인한 엘레디케의 입에서 작은 웅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땅에 그려진 검은색의 마법진이 비록 밝진 않지만 백색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점점 커져 하나의 막처럼 이드들과 여황들 사이를 갈랐을 때, 엘레디케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인딕션 텔레포트(induction teleport).”

이드는 백색의 빛의 장벽 너머에서 시동어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빛의 장벽이 수십 배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 것과 거의 동시에 눈을 아리게 하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뜬 이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눈앞에 보이는 부드럽고,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되게 지어진 대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이드들의 전방에 몇몇 마법사와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이드들이 서 있는 곳은 저 대저택, 비엘라 영주의 대저택에 딸린 거대한 정원의 한 부분이었다.

그 정원에는 두 개의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두 마법진 중 하나의 중앙에 이드들이 들어서 있었다. 초록의 대지 위에 검은 선들로 이루어진 이 마법진은 언밸런스해 보였지만, 저택의 난간에서 바라본다면 꽤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눈이 팽글팽글 도는 착시 현상을 각오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행이 갑작스럽게 바뀌어버린 주위 풍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전방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 중에서 어찌 보면 바람둥이의 전형처럼 보이는 30대 정도의 귀족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일행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흠… 자네들이 라일론 제국에서 온 사람들인가? 내가 전해 들은 것과는 다른데…”

은근히 일행을 깔보는 듯한 말에 토레스의 인상이 슬쩍 구겨졌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 집의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라일과 지아들의 용병들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어서 익숙해져 있었고, 이드 역시 중원에서 몇 번 겪은 일이었다. 자신의 외모 탓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드 옆에서 뭐가 좋은지 웃고 있는 카리오스. 이 녀석이 뭘 알겠으며, 또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앞에서 말하고 있는 귀족의 말은 멀리서 짖어대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백작의 자제로서 처음 저런 말을 들어본 토레스에게는 꽤나 거슬리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꽤나 따지더군요. 속이 중요한데 말입니다. 그런데 귀하는 누구신지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당신은 누구냐’는 말에 귀족 남자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저렇게 받아치는 인물이라면, 저 청년, 그러니까 토레스 역시 라일론 제국의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대하지는 못했다.

“흠, 나는 마르카나트 토 비엘라, 드레인 왕국의 남작의 작위에 올라 있지. 그리고 이 비엘라 영지의 영주이기도 하지.”

“아, 그러시군요. 저는 토레스 파운 레크널이라 합니다. 본 제국의 소드 기사단의 단원입니다. 드레인의 비엘라 영주님을 뵙습니다.”

“오~ 레크널성리아, 그렇다면 제국의 레크널 백작가의 자제이신가? 거기다 소드 기사단의 기사라면 기사단의 모든 기사가 소드 마스터…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하구먼.”

비엘라 남작의 말에 토레스는 픽하고 웃고 말았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 그리고 소드 마스터를 대단하다고 칭하는 모습에 토레스는 어이가 없었다.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소드 마스터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카논에서 소드 마스터들을 찍어내는 상황에서, 지난 8,900년 동안 두 명 있었다던 그래이트 실버 급을 몇 명이나 눈앞에서 보고, 그들의 전투를 목격한 이후로는 소드 마스터라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사라졌다.

물론 이런 자신감 상실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지금도 연신 두리번거리는 카리오스를 달고 있는 이드였다.

그때 비엘라 영주와 함께 있던 세 명의 마법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아나크렌에서 마중 나온 마법사라고 밝혔다.

이름은 추레하네 콩코드.

이드는 옆에서 자꾸 붙는 카리오스를 떼어내려다 그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받으며 킥킥거렸다.

이드는 어릴 때 동이족의 말을 배운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이드와 함께 생활하던 사람 중에 ‘궁황(弓皇)’이라는 별호를 가진 동이족 출신의 사부가 있었다.

덕분에 이드는 그에게서 동이족의 말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 말들 중 궁황 사부가 운검 사부와 자주 티격태격할 때 자주 쓰던 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추레한 놈”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마법사의 이름이 추레하네였고, 그의 모습 또한 연구에만 몰두한 탓인지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게다가 갈색의 커다란 로브 역시 어색해 보였다. 한마디로, ‘추레하다’라는 말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드는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웃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였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여기 카리오스 녀석이 간질여서…”

이드의 말에 카리오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이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드는 마치 얼굴에 금강석을 깐 듯 못 본 척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드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추레하네라는 마법사가 옆의 마법진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일행이 마법진 중앙에 서자, 나머지 두 마법사가 마법진 밖에서 스펠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추레하네 역시 양손으로 로드를 감싸 쥔 채 캐스팅에 들어갔다.

잠시 후, 아까와는 다른 갈색 빛의 장막이 형성되었고, 추레하네의 입에서 방금 전과 같은 시동어가 들려왔다.

“인딕션 텔레포트!”

이드는 다시 한 번 갈색 빛이 일행들 사이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슬쩍 눈을 감았다.

아까 전의 텔레포트 역시 순간이었기에 이번에도 금방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눈을 뜬 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와 같은 저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꽤나 웅장한 성이었는데, 라일론에서 본 레크널 백작의 성과 같은 영주의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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