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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85화


하나하나 풀려 허공에 나풀거리는 붉은 실과 같은 모습의 가느다란 검기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만 도 않게 정면에 서 있는 십 수명의 기사들을 향해 날았다. 그런데 이드의 눈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하늘거리는 붉은 검기에 당황하는 기사들, 그들 사이로 보이는 소녀가 손에 쥐고 있던 곰인형의 양팔을 둥글게 흔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곰인형의 팔이 이동한 자리로 황색의 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이드는 그 빛을 보고 아까 보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아까도 저 빛을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럼….’

순간 이드의 생각이 맞다 는 듯이 붉은 검기의 진행방향 앞으로 거의 3, 4미터에 이르는 흙이 파도치듯이 치솟아 올라 기사들의 앞으로 가로막았다.

쿠쿠쿵…. 두두두….

검기가 흙의 파도에 부딪히는 충격에 선혈을 머금어 붉게 물든 흙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리고 주위로 흙이 모두 떨어질 때쯤 가라앉는 흙의 파도를 보며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혼돈의 파편이라는 놈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게 못 되는 놈들 같아.”

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미아의 검신을 바로 잡아 쥐었다. 저번 메르시오와의 전투로 그들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드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면 혼자서 각오를 다지는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드에게는 엄연히 대답을 해주는 사람, 아니 검이 있었다.

[맞아요. 이드님처럼 겉으로 봐서는 모를 상대예요.]

“엉? 나처럼이라니?”

이드가 라미아의 말에 의아한 듯이 말하며 십여 발에 이르는 긴 원통형의 매직 미사일과 같은 검기, 강(剛)을 날렸다. 하지만 다시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치솟듯이 솟아오른 흙에 가로막혀 여기저기로 커다란 흙덩이만 날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이드가 살짝 눈썹을 찌푸릴 때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잖아요. 이드님도 누가 봐도 절대 강해 보이지 않는다구요. 오히려 약해 보인다구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들으며 슬쩍 웃음을 흘리고는 살짝 몸을 틀어 아까와는 다른 자세를 잡았다.

“뭐, 그렇긴 하지. 나도 네 말에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누가 봐도 는 아니야. 저번에 크레비츠도 알아봤잖아? 상대를 몰라보는 건 상대와의 전력 차가 너무 날 때와 상대를 살필 줄 모른 다는데 문제가 있지. 상대를 살펴보기만 한다면 이렇게 되거든. 분뢰(分雷)!!”

순간 이드와 기사들을 감싸고 있던 병사들과 몇몇의 기사들은 짧은 단발 머리의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아이의 손에 들린 검에서 순간적으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드와 대치하고 있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궁시렁대던 이드가 마지막으로 무언가 막한 단어를 외치는 것과 함께 그들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번쩍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자신들의 눈앞으로 자신들의 가슴높이까지 치솟다가 다시 가라앉는 흙의 파도를 보며 자신들의 몸이 굉장히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몽롱한 정신으로 붉은 땅과 자신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드는 몽롱한 표정으로 비릿한 내음을 머금고 있는 땅으로 쓰러지는 십여 명의 기사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분뢰, 검기를 날릴 때마다 흙의 벽이 막아낸다면 그 벽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검기를 날리면 되는 것. 그리고 분뢰에 당했으니 별다른 고통은 없었을 테니… 쳇, 그러길래 진작 비키랄 때 비킬 것이지.”

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다 다시 멈춰 섰다. 아직 방금 쓰러졌던 인원과 비슷한 수의 기사들이 검을 빼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까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까도 이드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다 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공포에 물들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들의 얼굴과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않는 그들을 보며 이드가 나직이 한숨을 토했다.

[참 답답하겠어요. 저런 꽉 막힌 인간들을 상대하려면…]

“그렇지, 그냥 물러서면 될걸…. 뭐 때문에 저러는지…. 으이구….”

이드는 안됐다는 듯한 라미아의 말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해주고는 이번엔 효력이 있길 바라며 앞에 서 있는 십여 명의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이번엔 그냥 물러 나주시죠? 피 보지 말고… 당신들이 앞을 막건 말건 결국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드가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망설이기만 할 뿐 어느 누구 하나 쉽게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이드와 라미아가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우유부단해요.]

“우유부단한 사람들 같으니…”

이드는 한순간 정확하게 맞추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한 말에 라미아의 검신을 눈앞에 슥 들어 보이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오~ 라미아, 너와 내가 드디어 마음이 맞나보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 아니겠니?”

순간 이드는 장난스레 말 한 번 잘못 내받은 죄로 머릿속이 웅웅울릴 정도의 째질 듯한 소녀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무, 무슨 말이예욧!! 신검합일이라닛…..숙녀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아..아우~… 미, 미안해…. 그러니까 그만 말해. 머리 울린다…”

이드가 여전히 시선을 앞에 둔 채 머리가 울리는지 한쪽 손을 머리에 대고 라미아를 진정시키곤 자신의 말이 뭐가 잘못됐는지 생각해 봤다. 신검합일. 단순한 말… 아니 심오한 무학 용어 중의 하나이다. 검을 든 자들이 극강의 반열에 들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경지.

하지만 이걸 다르게 응용해 보니 같이 다니던 소녀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부라고 소개한 상황이지 않은가.

‘하~ 그럼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지. 처음에 자기가 영혼이 어쩌고 한 건은 뭐야? 게다가 내가 진담이었나? 아니지. 농담이지….. 그럼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게다가 누가들은 사람도 없고.’

이드가 그렇게 속으로 자신의 행동에 별다른 잘못이 없다는 결론에 라미아에게 따져 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방금 전 뇌가 울리던 충격을 생각하곤 그냥 넘기기로 할 때였다. 앞쪽의 기사들의 뒤로부터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소녀의 음성이 들려와 이드와 혼자서 웅얼거리는 이드를 두려운 듯이 쳐다보는 기사들의 고막을 똑똑하고 부드럽게 두드렸다.

“기사 아저씨들 비켜주세요.”

조금은 몽롱한 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드와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소녀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대치 상태에서 기사들이 뒤로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무모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들의 고막을 때린,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편안하고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기사들에 의해 곧바로 이드를 향해 다시 고개가 돌려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소녀의 말에 그녀와 제일 가까이 있던 갈색 머리의 기사가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급하게 말했다.

“그, 그것은 곤란합니다. 모르카나아가씨. 지금 상태에서 저희들이 물러서게 되면…”

그 기사가 그렇게 말을 하며 뒷말을 얼버무리자 모르카나라 불린 소녀가 귀엽게 방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들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잖아요. 괜히 힘도 없으면서 버티지 말아요. 방긋 방긋 ^.^”

이드는 자신의 귀에도 들리는 그 말을 들으며 마치 죽은 자의 피부색을 하고 있는 기사를 안됐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되는 능력이라도 하는데까지 했는데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 그것도 열댓 살 가량의 소녀에게 말이다. 그리고 바로 얼굴 앞에서 이런 말까지 들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거기다 그 것이 사실임에야….

“남은 호위대 대원들은 모두 모르카나 아가씨의 후방으로 돌아가 아가씨의 명령을 기다린다. 빨리 이동해.”

모든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진 목소리로 명령하는 기사의 말에 따라 나머지 기사들이 모르카나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도 갈색 머리의 기사와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드와 모르카나는 비로소 서로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소녀를 바라보던 이드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모르카나란 이름의 소녀는 그 또래 소녀들보다 아담해 보였다. 아니 귀엽다는 말이 맞을 것 같았다. 얼굴 또한 상당히 오밀조밀하니 예쁜 것이 만약 집에 있었다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것 같은 느낌의 소녀였다. 물론 그런 게 이상하다는 게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로 흐르는 분위기….

모르카나의 하얀 얼굴에 크고 귀엽게 자리잡은 촉촉한 눈, 그 눈이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하니 풀려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까지 현실이 아닌 꿈속의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소녀의 눈과 함께 주위로 흐르는 분위기와 기운, 그것은 보고 있으면 잠이 오는 듯한 몽롱함과 나른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마치 몽유병 환자 같단 말이야…”

이드의 입에서 자신이 느낀 느낌의 표현이 직설적으로 튀어나오자 라미아가 그런 이드의 말에 불만을 표했다.

[소녀에게 몽유병이라니요. 이드님, 왜 말을 해도 꼭 그래요? 좋은 표현 있잖아요. 몽환적이라던가…]

이드는 라미아가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 것 같다는 생각에 막 그녀의 말을 끊으려 할 때였다. 이드를 대신해 라미아의 이어질 수다 들을 막아주는 가녀리다 할 만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는 건 처음이네요. 메르시오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름이 이드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전쟁터 한가운데서 적으로 만났건만 마치 찻집에서 친구의 소개로 만나기라도 한 듯한 차분한 목소리에 이드는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 모습에 그 소녀가 다행이라는 듯이 생긋이 웃더니 말을 이었다.

“역시, 메르시오가 말한 모습이긴 한데 이드님을 본 게 라일론이라고 해서 혹시나 물어본 건데… 저는 모르카나 엥켈이라고 합니다. 그냥 모르카나라고 불러주세요.”

“으… 응.”

이드는 그녀의 말에 순간 대답은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바르게 이해되지가 않았다. 전장에서 저런 여유라니…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재미있을지도 모르지만 당하는 입장이고 보면 이것처럼 당황스러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드였다. 그렇게 이드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모르카나의 음성이 다시 이드에게 들려왔다.

“그런데 라일론에 있다는 분이…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드는 그녀의 물음에 그제야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는 갈색의 부드러운 눈을 빛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물론 그런 이드의 음성 역시 모르카나와 같이 전장에서 통용될 일이 없을 듯한 부드러운 말투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장소가 어떻든 귀여운 모습으로 귀엽게 말을 하는 그녀에게 딱딱하고 무겁게 말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특별한 일은 아니고, 단지 모르카라를 보러 왔을 뿐이야. 아나크렌에서 모르카나를 만나 달라고 하더라구.”

마치 옆집에 심부름 온 것 같은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어떻게 된 게 전혀 전장의 분위기가 나질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드가 긴장을 푼 것은 아니라는 것을 라미아 역시 알고 있었다.

이어서 이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아나크렌에서 부탁한 말을 대신 전하면 모르카나가 그냥 돌아가줄 수 없는가 하는 건데. 어때 그냥 돌아가 줄 수 있어?”

여기서 이드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던 듯 모르카나의 얼굴을 바라본 그들의 표정은 더욱더 이상하게 변해 갔다. 개중에는 허탈한 웃음 성이 묻어 나오기도 했는데 그때의 모르카나의 표정은 이드의 말에 눈썹을 모으고 곱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냥 돌아가 달라고 하는 단발의 예쁘장한 소년이나 그 말에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피를 흘리고 있는 그들에게는 거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지금까지 고민하는 듯하던 모르카나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드에게 말했다.

“어떻하죠? 그 부탁은 못 들어 줄 것 같은데… 칸타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여기 좀 더 있어야 된다는데요.”

이드는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던 곰인형을 더욱 껴안는 그녀를 보고는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몽유… 아니 라미아 말대로 몽환적인 분위기와 마치 옆에 칸타라는 사람이 가지 말라고 한다는 듯한 저 말투까지.

“아무래도 이상하지? 라미아.”

[맞아요. 마치… 꿈꾸는 사람 같아요.]

하지만 둘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드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앞뒤에서 굉렬한 폭음과 함께 주위의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쿠콰콰콰쾅……… 퍼펑… 퍼퍼펑………

이드는 주위의 대기와 함께 흔들리는 자연의 기를 느끼며 눈앞에서 폭발이 일어난 두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르카나를 바라보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있는 적. 하지만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모습일 때는 쉽게 손을 쓰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 정체도 불분명하니… 차라리 저쪽에서 먼저 손을 써온다면 대처하기가 좋을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누님들의 교육으로 여성에게 먼저 손을 쓰는 건 왠지 꺼려지는 이드였다. (주입식 교육 ^^; 무섭죠.)

그런데 다행이랄까 폭발이 일어난 두 곳을 번갈아 바라보던 모르카나가 다시 이드에게 시선을 주며 먼저 공격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좀 비켜 주시겠어요? 칸타가 저기 폭발이 일어나는 걸 막아야 되거든요. 방긋^^”

그렇게 말한다고 비켜주면 그게 이상한 것일 거다.

“미안한데, 나도 일이 있어서 비켜주지 못할 것 같은데…”

이드의 말에 모르카나의 얼굴이 조금 어둡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 잠시 이드를 바라보던 모르카나의 한쪽 손이 품에 안고 있는 곰 인형의 한쪽 팔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럼… 많이 아프면 도망가요.”

이드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휘둘러진 인형 팔의 궤적을 따라 황색의 빛이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몸을 솟구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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