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98화
“음… 그건 좀 있다가 설명해주지. 우선은 이일이 먼저다.”
이드는 마치 고문을 해도 말을 안겠다는 태도로 대답하고는 미처 뭐라고 말할 순간도 주지 않고 다시 외치는 차레브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웅성거림이 잦아져 조용해진 카논 진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인의 이름은 카르티오 나우 차레브, 영광스런 카논 제국의 삼대 공작 중의 한 사람이다!!”
마나를 가득 담은 차레브의 목소리는 처음의 외침보다 더욱 커다란 것이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귓속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덕분에 순간적이나마 전장의 주위로 쥐죽은 듯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의, 거의 숨 몇 번 들이쉴 정도의 적막이 지나고 나자 카논의 진영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 카논 진영의 술렁임을 진압했던 세 명의 지휘관들과 그들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그 세 명의 지휘관들 중 이드의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남자 같은 차림의 여자였다.
그녀는 차레브의 외침과 함께 고개를 돌려 차레브를 바라보았고 곧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비록 소드 마스터에겐 500m라는 거리가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지만 잠시 잠깐 바로 본 것만으로도 차레브를 알아본 것으로 보아 그녀가 차레브와 상당한 안면이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차레브 또한 그녀를 아는 듯한 반응이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카논의 지휘자들로 보이는 세 명 중에 끼어 있다는 것은 그녀의 직위가 상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드로서는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딸 아니야?’
이드는 순간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순간 떠올린 생각이긴 하지만 딸이라고 연관 지어보니 딱! 하는 느낌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겉모습이지만 저 차레브의 딱딱함을 닮은 듯한 분위기의 여자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농담이 전혀 먹혀들 것 같지 않은 차레브의 분위기에 말을 꺼내 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이드였다.
그리고 이드가 그렇게 생각하는 카논의 진영에서 세 명의 지휘관의 지휘로 어느 정도 술렁거림이 가라앉는 모습을 보이자 차레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나는 나의 조국인 카논 제국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대들도 본 공작에 대해 들어 알겠지만 본인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 들어주기 바란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잘 믿지 못한다.
특히 그 상대라는 것이 적대적인 상대와 같이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세 명의, 아니 두 명의 지휘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중 장년의 인물이 소리쳤다.
“…그대의 말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당신을 믿기는 힘드오. 우선 당신이 차레…”
장년인 역시 소드 마스터인 듯 마법이 아닌 자신의 마나를 사용해서 이드들이 서 있는 곳에서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남자 차림의 여성 때문에 할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닫아야만 했다.
그리고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 2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세 명 중 여성이 앞으로 나서며 이드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 역시 방금 전 소리쳤던 장년인 못지않은 크기였다.
“저는 본영의 부사령관 직을 맡고 있는 파이안이라고 합니다. 귀하께서 차레브 공작 각하를 자처하신다면 저희가 믿을 수 있을 만한 증거를 먼저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전쟁 중인 이때에 적 진영에 각하께서 머물고 계신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면 서로가 신뢰할 만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똑똑 부러지는 듯한 말투에 듣고 있던 차레브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고, 옆에서 지켜보던 이드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 번 차레브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 파이안이라는 여자의 똑똑 부러지는 듯한 말투가 어딘가 차레브 공작을 닮은 듯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드의 엉뚱한 생각도 차레브가 입을 여는 것과 함께 허리에 걸려 있던 롱소드를 꺼내는 것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래… 그것도 그렇지. 그럼 이 정도면 증거가 되겠지? 파이… 다크 크로스(dark cross)!”
커다란 차레브의 외침과 함께 그가 들고 있던 검이 검은색으로 물들었고 그의 팔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수평과 수직으로 가볍게 춤을 추고는 내려왔다.
별것 아닌 듯한 간단한 동작. 하지만 이어지는 현상은 별것 아닌 것이 아니었는데, 공중에서 흔들린 검의 궤적을 따라 검은색의 십자형 검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십자가가 허공 20, 30m 정도에 달했을 즈음, 어느새 내려져 있던 차레브의 팔이 허공에서 수직으로 다시 한 번 휘둘러진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공중으로 솟아오르던 십자가가 그대로 땅으로 내려박히며 둔중한 소리와 함께 깊숙이 십자형의 낙인을 만들었다.
쿠우우웅…..
땅이 거대한 낙인에 대한 비명을 지르는 것과 함께 낙인의 주위로 하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먼지가 다시 땅바닥에 가라앉을 때쯤, 차레브에게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파이안의 목소리가 이드들의 귓가를 울렸다.
“말씀… 하십시오. 차레브 공작 각하.”
차레브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파이안의 모습을 보며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방금 펼쳐진 다크 크로스라는 기술은 차레브의 트레이드마크인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이 아니었기에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 측에는 자신과 꽤나 안면이 두터운 파이안이 있었고, 그런 안면 덕분에 차레브는 그녀에게 자신의 기술을 몇 번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안이 자신의 기술을 알아보리라는 생각에 그 기술을 펼친 것이었고 결과는 그의 생각대로 만족할 만한 반응이었다.
“지금부터 본인이 하는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에도 거짓이 없을 것이며, 잠시 후 그대들이 직접 확인해봐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도중에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