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5화 : 교룡 다시 연못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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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5화 : 교룡 다시 연못에 갇히다


교룡 다시 연못에 갇히다

원술이 대군을 일으켜 소패로 오고 있다는 말은 오래잖아 유비의

귀에도 들어왔다.

“몸을 굽혀 분수를 지킴으로써 천명이 이르기를 기다릴 일이요, 함부로 천명과 싸우려 들어서는 아니 된다.”

지난번 서주를 여포에게 내어주고 소패로 들어올 때 유비는 불평 에 가득 찬 관우와 장비를 그렇게 달랬다. 그리고 말없이 때를 기다 리고 있었는데, 겨우 찾아온 게 원술의 공격이었다. 천자의 조서 때 문에 원술과 이롭지 못한 싸움을 하다 적지 않은 군사를 꺾인 데다, 소패란 고을이 또한 작고 궁벽해 아직 이전의 세력도 회복하지 못한 터라 유비는 원술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제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여럿을 불러놓고 의논을 하는데 장비가 나서서 말했다. 따지고 보면 유비가 그토록 궁하게 된 원인은 자신의 술주정 때문이라 할 수도 있어 남 먼저 나선 것이었다. 손건이 그런 장비 를 가로막았다.

“지금 소패에는 군사도 적고 양식도 넉넉하지 못한데 어찌 원술 의 수만 대군을 당해내겠습니까? 차라리 여포에게 글을 보내 위급 함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이 옳습니다.”

“여포 그 의리 없는 도둑놈이 우리를 구해주러 올 리가 있소? 공 연히 때만 늦추고 말 것이오.”

장비가 그래도 우기고 나섰다. 그때 유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손건의 말이 옳다. 먼저 여포에게 글을 보내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날로 여포에게 글을 보냈다.


‘장군께서 너그러이 살피시어 이 비를 소패에 머물도록 허락해주 시니 실로 하늘에 가득한 덕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술이 전 날의 사사로운 원한을 잊지 못해 기령(紀靈)으로 하여금 수만 군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게 하매, 장군께서 구해주시지 않으면 저녁까지 도 버텨내지 못하고 망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약간의 군사 를 내시어 금세 뒤집히게 된 이 소패의 위급을 구해주신다면, 이 비 에게는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습니다.’


비록 원술에게 많은 곡식을 얻어 그냥 보아 넘기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터이지만 그같이 간곡한 유비의 글을 받자 여포의 마음은 슬며시 흔들렸다. 거기다가 전에 그토록 딴전을 피다가 이제 와서 급작스레 곡식을 보낸 원술의 속셈도 수상쩍었다. 이에 여포는 모사 진궁을 불러 의논했다.

“전에 원술이 곡식을 보내면서 내게 유비를 구해주지 말라는 글 을 함께 보냈소. 그런데 이제 또 현덕(德)이 글을 보내 내게 구해 주기를 청해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얼른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구려. 생각해보면 현덕이 소패에 있는 것은 내게 크게 해로울 게 없으나, 원술이 유비를 꺾고 소패를 손에 넣으면 북으로 태산(泰山)의 여러 장수들과 이어져 함께 나를 치려 들지도 모르겠소. 그렇게 되면 베 개를 높이고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현덕을 구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소. 공의 생각은 어떠시오?”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유현덕을 구해드리십시오.”

진궁도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그렇게 말했다. 진궁까지 찬성 하자 여포는 그대로 생각을 굳히고 그날로 군사를 점검해 소패로 떠 났다.

한편 기령의 군사는 기세 좋게 소패로 밀려와 현 동남쪽에 진채 를 세웠다. 낮에는 기치가 하늘을 덮는 듯했고 밤에는 횃불과 북소 리가 땅을 울리는 듯했다. 현덕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는 겨우 오천 남짓했지만 나가서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기령이 진세를 벌인 맞 은편에 그 또한 대강 영채를 세우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현에서 서남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진채를 내렸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유비는 여포가 자기를 구하러 온 줄 알고 기뻤다. 그러나 기령은 그렇지가 못했다. 곧 여포에게 글을 보내 신의 없음을 따지고 들었다. 어떻게 보면 여포 의 입장이 자못 난감해 보였으나 여포는 미리 생각해둔 게 있는 듯 허허거리며 말했다.

“내게 원술과 유비 양쪽이 모두 나를 원망할 수 없게 일을 처리할 계책이 하나 있소.”

그러고는 기령과 유비에게 각기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함께 술자리에 청했다.

여포가 자신을 청한다는 말을 듣자 유비는 그 길로 곧장 여포에 게 가려고 했다. 여포라면 이를 가는 장비가 그런 유비의 옷깃을 잡 았다.

“형님, 가지 마십시오. 이는 필시 여포란 놈이 마음을 먹고 수작 을 부리는 겁니다.”

“내가 그를 박하게 대접하지 않았는데 그가 나를 해칠 리 있겠느냐?”

유비는 오히려 그런 장비를 타이르듯 말하며 그대로 말 위에 올랐다.

“그럼 저희들만이라도 형님을 모시겠습니다.”

유비가 기어이 떠나려 하자 장비와 관우도 그렇게 말하며 따라나 섰다. 여포의 진채에 이르니 여포가 웃음으로 유비를 맞았다.

“내가 이번에 특히 공의 위태로움을 풀어줄 것이니 뒷날 뜻을 이 루거든 잊지 마시오.”

제법 거드름까지 섞인 말이었으나 유비는 공손하게 감사하고 여포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 뒤를 따라간 장비와 관우가 칼을 찬채 유비 뒤에 시립해 섰다.

“기령 장군께서 이르셨습니다.”

갑자기 군사 하나가 들어와 여포에게 알렸다. 기령이 왔다는 말에 유비는 놀랐다. 급히 몸을 감추려 하는데 여포가 능청스레 말렸다. 

“내가 생각한 게 있어 양편을 모두 한자리에 불렀소. 너무 의심하 지 마시오.”

그러나 여포의 속셈을 모르는 유비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기는 기령도 마찬가지였다. 말에서 내려 여포의 장막으로 들 던 기령은 유비가 거기 앉았는 걸 보자 낯색까지 변했다. 급히 몸을 돌려 돌아가려다가 좌우에서 말리는 바람에 못 가고 있는데 여포가 어린아이 안듯 덥석 안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장군께서는 이 기령을 죽이려 하십니까?”

여포에게 잡혀 버둥거리면서 기령이 다급하게 물었다. 여포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럼 저기 저 귀 큰 아이[大耳兒, 유비]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역시 아니외다.”

“그럼 무얼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현덕과 이 여포는 형제요. 이번에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곤궁에 빠진 걸 구해주고 싶을 뿐이오.”

“그렇다면 결국 이 기령을 죽이시겠다는 뜻이 아니오니까?”

그러자 여포는 더욱 능청스레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소? 나는 평생에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소. 오히려 싸움 말리기를 좋아해왔으니, 이번에도 양쪽을 위해 화해를 주선해 볼까 하오.”

“이미 서로 군사를 내었는데 어찌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하늘이 정해주는 대로 따르는 법이오. 어쨌든 서로 처음 만나는 예나 갖추시오.”

여포가 제법 위엄까지 갖추며 그렇게 말하자 기령도 더 어쩌는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유비와 알은체를 했지만 마음속에 의심이 남 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여포는 그래도 모르는 체 두 사람을 좌우 에 앉게 하고 술자리를 벌이게 했다. 두 사람은 별수 없이 여포가 따 라주는 술잔을 묵묵히 기울였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였다. 여포 가 불쑥 말했다.

“그대들 양가는 모두 이 여포의 낯을 보아서라도 각기 군사를 거두시오.”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여전히 여포의 속셈을 헤아릴 길 없 는 유비는 말없이 여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때 기령이 불끈하며 소리쳤다.

“나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유비를 잡으러 여기까지 왔소이다. 그런데 어찌 아무런 소득도 없이 군사를 물리란 말씀이오?”

그 말에 장비는 몹시 성이 났다.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 기령을 꾸짖었다.

“우리 군사가 비록 많지 못하나 너희 무리쯤은 아이들 장난으로 밖에는 여기지 않는다. 네놈 생각에는 너희가 백만 황건적에 비해 어떠하냐? 그런데 우리 형님께서는 그 황건의 무리도 쥐 잡듯 하셨 다. 네놈이 감히 그런 형님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 흉흉한 기세가 금세 기령을 찌를 듯했다. 생각 깊은 관우가 급 히 그런 장비를 말렸다.

“여장군께서 우리를 한자리에 부르셨을 때는 달리 뜻이 있으셨을 것이네. 우선 그 뜻부터 듣고 보세. 싸우는 일은 나중에 각기 자기 진채로 돌아간 뒤에라도 늦지 않네.”

여포가 관우의 말을 이어 얼러대듯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 양쪽을 부른 것은 화해하라는 뜻이었지 서로 치고 받으라는 뜻은 아니오, 멈추시오!”

하지만 한쪽에서는 욕을 먹은 기령이 몹시 성이나 씨근댔고, 한 쪽에서는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여포 따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했다. 드디어 여포도 크게 성이 났다.

“가서 내 화극을 가져오너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졸개 하나가 화극을 가져오자 그걸 힘있게 잡았다. 여포의 무예를 잘 아는 기령은 여포 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안색까지 변했다. 그 바람에 장비까지도 주 춤했다. 여포가 불길이 이는 눈으로 그런 양쪽을 돌아보며 한 말은 뜻밖이었다.

“내가 그대들 양편에게 화해를 권한 것은 바로 하늘의 뜻에 따르게 하려는 것이오.”

여포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졸개에게 시켜 화극을 멀리 진문 밖에 내다 세우게 했다. 그리고 명을 받은 졸개가 시킨 대로 하자 다 시 유비와 기령을 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진문은 여기서 백오십 발자국 떨어져 있소. 내가 만약 화살 한 대로 저 화극의 잔가지를 쏘아 맞힌다면 그대들 양가는 각기 군사를 거두시오. 맞히지 못한다면 각기 돌아가 싸움을 벌여도 좋소이다.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쪽이 있다면 내가 그를 칠 것이오!”

그 말에 기령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백오십 발자국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화극의 잔가지를 어떻게 맞 힐 수 있겠는가. 그대로 여포의 말을 따르는 체하다가 못 맞히면 그 때 유비를 쳐도 되리라.’

그리고 한마디로 허락하니 유비도 아니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령과 같은 생각에 속으로는 애가 탔다.

“술을 쳐라.”

양쪽이 모두 응낙하자 여포는 좌우에 영을 내려 다시 모두에게 술 한 잔씩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잔을 쳐들며 양쪽에 권했다.

“자, 드시오. 이건 서약의 술이외다.”

유비도 할 수 없이 잔을 비웠지만 술이 단지 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내 활과 화살을 가져오너라!”

잔을 비운 여포가 문득 좌우에게 소리쳤다.

‘부디 맞아주기를!’

여포가 활과 화살을 받아 쥐고 일어서는 걸 보고 유비는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여포는 별로 겁내는 기색 없이 시위에 살을 먹이더니 힘껏 당겼다.

“맞아라!”

이윽고 여포가 보름달 모양이 된 활에서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땅에 떨어지는 살별처럼 시위를 떠나더니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그 대로 화극의 잔가지에 맞고 튕겨 나왔다. 그 귀신 같은 솜씨에 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실로 그 옛날 활로 이름 을 떨친 후예(后羿)에 비할 만한 신기였다.

여포도 통쾌한지 한참을 껄껄거리더니 활을 던지고 기령과 유비 의 손을 끌어 서로 잡게 하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란 것이오. 이제 두 분은 각기 군사를 거두도록 하시오.”

그러고는 다시 군사에게 명하여 술을 가져오게 한 뒤 둘 모두에 게 큰 잔으로 한 잔씩 돌렸다.

유비는 당장 위급을 면하게 되어 기뻤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부 끄러움도 일었다. 당당히 힘으로 헤쳐나가지 못하고 남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가게 된 자신의 처지가 새삼 서글퍼진 것이었다. 기령 은 어이가 없었다. 여포의 귀신 같은 활솜씨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 내 자신의 난감한 처지가 떠올랐다.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볼멘소리 로 우물거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장군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만 실로 내 처지가 난감합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주공께서 어떻게 믿어주시겠습니까?”

“내가 글을 써서 공로에게 보내겠소.”

여포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더 할 말이 없게 된 기령은 쓴 술만 몇 잔 더 마시다가 여포가 써주는 글을 받아 먼저 돌아갔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공은 위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 오.”

기령이 돌아간 뒤 여포가 다시 한번 거드름을 떨었다. 유비는 그 런 여포에게 절하여 고마움을 표하고 관, 장두 아우와 진채로 돌아 갔다. 이로써 소패에 몰렸던 전운은 걷히고 다음 날로 세 곳의 군 마는 각기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기령이 얻은 것 없이 수춘으로 돌아가 일의 앞뒤를 고하자 원술 은 크게 노했다.

“여포가 그 많은 양식을 내게서 얻고도 오히려 어린아이 장난 같 은 일을 꾸며 유비를 편들었으니 용서할 수 없다. 내 마땅히 중병(重 兵)을 이끌고 소패로 가서 유비를 사로잡고 아울러 여포도 쳐부수 리라!”

원술이 그렇게 소리치며 펄펄 뛰자 무안하게 된 기령이 조심스레 말했다.

“주공께서 그렇게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여포는 그 용력이 남다 를 뿐만 아니라 기름진 서주에 터잡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유비와 함께 머리와 꼬리처럼 서로 도우면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계책을 써야 합니다.”

“이 마당에 계책은 또 무슨 계책이 있단 말이냐?”

“제가 듣기로 여포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이제 혼인할 나이에 이르렀다 합니다. 마침 주공께는 아드님이 한 분 계시니 여포에게 친히 구혼을 하십시오. 만약 여포가 주공께 딸을 출가시킨다면 반드 시 유비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먼 것이 가까운 것을 갈라놓을 수 없 음을 이용한 계책[疏不間親之計]입니다.”

여포와 혼인을 맺어 가깝게 됨으로써 유비를 멀게 하여 여포로 하여금 유비를 없애게 하자는 뜻이었다. 원술이 들어보니 그럴듯했 다. 그날로 다시 한윤에게 예물을 갖춰준 뒤 서주로 가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서주에 이른 한윤은 여포에게 말했다.

“주공께서는 장군을 우러르고 사모하시어 따님을 며느리로 삼음 으로써 옛날 진(秦)과 진晋)이 그랬던 것처럼 양가가 오래오래 가 깝게 맺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허락하여주십시오.”

그 뜻밖의 혼담에 여포는 어리둥절했다.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멀뚱거리다가 겨우 구실을 찾아냈다.

“혼사에 관한 일이라면 마땅히 그 어미도 알아야 할 것이니 내 안 으로 들어가 의논해보고 결정하겠소.”

그렇게 대답을 미뤄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여포에게는 두 아 내와 한 첩이 있었다. 정처인 엄씨와 동탁에게서 뺏은 첩 초선 외에 소패에서 다시 맞아들인 차처(妻)조씨였다. 그러나 조씨는 자식 없이 먼저 죽고 초선도 자식이 없어 여포에게는 오직 엄씨가 낳은 딸 하나뿐이었다. 그 바람에 여포는 그 딸을 그지없이 사랑했는데 이제 원술에게 청혼이 들어온 것이었다.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 여포는 엄씨를 찾아 의논을 했다. 엄씨가 얼른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원술은 오래전부터 회남에 터를 잡아 군사는 많고 양식도 넉넉하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머지않아 천자가 된다는 말까 지 있으니, 그렇게 되면 우리 딸은 황후가 될 희망도 있지 않습니 까? 그런데 원술에게 아들이 몇이나 됩니까?”

“다만 하나뿐이오.”

“그렇다면 당연히 허락해야지요. 끝내 황후가 못 된다 해도 원술 같이 든든한 사돈을 두면 우리 서주라도 걱정거리가 없어지지 않겠 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위세만 보고 엄씨는 그렇게 여포를 부추겼다. 여 포 또한 천하의 대세를 살피는 안목은 엄씨보다 나을 게 없어 그 말 에 솔깃해졌다. 그 자리에서 딸을 원술의 며느리로 보내기로 마음 을 정하고, 한윤을 두텁게 대접한 뒤 혼인을 받아들인다는 뜻과 함 께 돌려보냈다.

한윤으로부터 여포의 뜻을 전해 들은 원술은 됐다, 싶었다. 다시 그날로 혼인 예물을 갖춰 한윤을 서주로 되짚어가게 했다. 여포 또 한 이미 허락한 혼인이라 반갑게 한윤을 맞아들여 예물은 거두어들 이고 사람은 역관에 머물게 했다.

다음 날이었다. 그때야 그 혼인을 알게 된 여포의 모사 진궁은 역 관으로 한윤을 보러 갔다. 서로 예를 마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진 궁이 홀연 좌우를 꾸짖어 물리친 뒤 은근하게 물었다.

“하나 물읍시다. 도대체 누가 이 꾀를 내었소? 원공로로 하여금 여포와 혼인을 맺게 한 것은 유현덕의 머리를 얻으려는 데 그 뜻이 있지 않소?”

그 말에 놀란 한윤이 벌떡 일어나며 진궁에게 사정했다.

“이미 아셨구려. 하지만 제발 그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주시오.”

“나야 외고 다닐 리 없지만, 두려운 것은 다만 일이 쓸데없이 늦어 지는 것이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알면 결코 그대로 보아넘길 리가 없소. 반드시 성사가 되기도 전에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오.” 

진궁이 그렇게 한윤을 안심시켰다. 그 말에 한윤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바라건대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내가 먼저 봉선(奉先)을 만나 오늘로 그 딸을 보내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한윤은 기뻐하며 치하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원공(公)도 크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그 갚음이 어찌 엷겠습니까?”

이에 진궁은 한윤과 헤어져 여포를 만나러 갔다.

“듣기에 공의 따님을 원공로에게 출가시키기로 했다니 참으로 잘하신 일입니다. 다만 언제 혼례를 치르시려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진궁의 그 말에 여포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천천히 의논해보아야지요.”

“예로부터 혼인은 정해서 혼례를 올릴 때까지는 각기 정한 시기가 있습니다. 천자는 일 년이요, 제후는 반년이며 대부는 석 달이요, 서민은 한 달입니다.”

“원공로는 하늘의 뜻에 의해 옥새를 손에 넣었으니 머지않아 제위 에 나갈 것이오. 그럼 이제 천자의 예를 따르는 게 어떻겠소?”

여포의 터무니없는 말에 진궁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됩니다.”

“그럼 제후의 예를 따르란 말이오?”

“그것도 아니 됩니다.”

“그렇다면 대부의 예를 따르란 뜻이구려.”

여포가 약간 부아가 난 얼굴로 퉁명스레 말했다. 그래도 진궁은 여전히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아니 됩니다.”

“아니, 그럼 공은 나에게 서민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오?”

여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공의 뜻은 무엇이오?”

“지금 천하의 제후들은 서로 패권을 다퉈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 공과 원공로가 혼인을 맺는다는 걸 알면 누군가 꺼리고 시기하지 않 겠습니까? 만약 혼기를 길게 잡아 좋은 날로 택일을 한다면 도중에 군사를 숨겨두었다가 신부를 빼앗아가는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럴 법도 하오. 그 같은 낭패를 없이 하자면 어떻게 해야 좋겠소?” 

“계략을 쓰셔야 합니다. 이미 혼인을 허락했으니 지체하지 말고 다른 제후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때 신부를 수춘으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신부를 그곳 별관에 묵게 해놓고 좋은 날을 골라 혼례를 올리면 아무런 낭패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공대(公臺)의 말이 옳소. 깨우쳐주시지 않았더라면 크게 일을 그르칠 뻔했소.”

그제서야 여포도 기쁜 얼굴로 진궁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아내 엄 씨를 재촉해 그날 밤으로 혼수를 장만케 했다. 다음 날 경대와 장롱 이며 의복 폐백에 보석과 향수까지 장만되자 여포는 즉시 송헌과 위 속 두 장수에게 군사를 이끌고 딸과 한윤을 호위하여 앞서가게 했 다. 북과 피리소리 요란한데 여포 자신도 성 밖까지 나가 딸과 한윤 을 전송했다.

이때 진등의 아버지 진규(陳)는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길거리에 요란한 북소리와 피리소리가 들리자 부리는 자들에게 까닭을 물었다.

“저것은 여포가 원술의 아들에게 딸을 출가시키는 행렬입니다.”

물음을 받은 자가 그렇게 대답하며 간단하게 경위를 물었다. 진규 가 놀라 소리쳤다.

“저것은 소불간친(疏不間親, 친분이 두텁지 못한 사람이 친분이 두터운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지 못한다)의 계략이다. 원술이 여포와 혼인을 맺 어 현덕을 노리는 것이니 현덕이 실로 위태롭게 되었구나.”

그러고는 병든 몸을 이끌고 몸소 여포를 찾아 나섰다. 병들어 누 워 있다는 소문이 돌던 진규가 자기를 보러 오자 여포가 이상한 듯 물었다.

“대부께서 어쩐 일로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그러자 진규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들으니 장군께서 돌아가셨다기에 이렇게 조문을 나온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늙은 진규의 말에 뼈가 들어 있음을 알아차린 여포가 소리 높여 물었다. 진규는 병석을 박차고 나온 늙은이답지 않게 물 흐르듯 대 답했다.

“지난날 원술은 금과 비단을 보내 공으로 하여금 유현덕을 죽이 게 하려 했으나 공은 오히려 화살로 진문 밖의 화극을 맞혀 그들의 싸움을 말리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술이 다시 공께 혼인을 청해온 것도 뜻은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공의 따님을 인질로 삼고 현덕을 쳐 소패를 손에 넣으려는 것입니다. 만약 소패가 원술에게 빼앗기면 서주 또한 위태롭게 됩니다. 거기다가 원술이 또 양식을 꾸어달라, 군사를 빌려달라고 나올 때 만약 공이 그걸 들어주시게 되면 괴롭고 피곤한 노릇일 뿐만 아니라 남의 원망까지 사게 됩니다. 원술은 공 께 빌린 양식과 군사로 사방의 제후들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거절하신다면 그것은 사돈간의 친함을 저버리는 것이 니 싸움이 일게 되고 따님은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그뿐입 니까? 듣기에 원술은 이미 황제로 칭할 뜻을 굳혔다 하니 이는 천조 (天朝)에 반역하는 짓입니다. 만약 그가 반역하면 공 또한 역적의 인 척이 되니 천하의 누가 용서하려 들겠습니까? 살아 있는 공을 보고 이 늙은 것이 감히 죽었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여포는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었다.

“진궁이 나를 그르치게 하였구나!”

진궁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않고 그렇게 탄식한 뒤 급히 장요(張遼)를 시켜 딸을 되찾아 오게 했다.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간 장요는 삼십 리나 뒤쫓은 뒤에야 여포의 딸을 데려올 수 있었다.

이때 원술의 사자 한윤도 함께 끌려왔다. 여포는 그를 가두어놓고 따로 원술에게 사람을 보내 아직 딸의 혼수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 다는 핑계를 대고, 그게 갖춰지는 대로 여포 자신이 호위해 데리고 가리라는 전갈을 보냈다.

“한윤을 허도로 보내 조정의 허락을 받아오게 하십시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여포라 그걸 근심하는 진규가 다시 그렇게 권했다. 그 혼인에 대해 조정의 허락을 받아둠으로써 뒤탈을 없이 하자는 구실이었지만 내심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제후들에게 널리 그 일이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에 선뜻 마음이 내키 지 않았다. 진궁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져 아직 원술과 사 돈으로 맺어지는 일에 미련이 남은 탓이었다. 그래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소패의 유현덕이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이는 것은 장수된 자가 본래 하는 일이다. 괴이하게 여길 게 무엇이겠느냐?”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 장수 송헌과 위속이 깨 어지고 부은 얼굴로 나타나 일러바쳤다.

“저희 둘은 명공의 명을 받고 산동으로 말을 사러 갔던바 마침 좋 은 말이 있어 삼백여 필이나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 는 길에 패현 경계에 이르렀을 때 강한 도적 떼가 나타나 반이나 뺏 어가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산적 떼로 알았으나 나중에 알아보니 그 우두머리는 유비의 아우인 장비로서 그가 졸개들을 거짓으로 산적 인양 꾸며 우리 말을 빼앗아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여포는 몹시 성이 났다. 장비가 여포를 싫어하는 것 못지않게 여포 또한 장비라면 이름만 들어도 분통이 터질 지경이 었다.

“급히 군마를 모으라. 소패로 가자!”

여포가 펄펄 뛰며 장졸을 재촉했다. 소문은 곧 나는 듯이 현덕의 귀에 들어갔다. 여포가 갑자기 대군을 일으켜 자기를 치러 온다는 말에 크게 놀랐으나 그렇다고 두 손 처매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 는 일이었다. 유비는 할 수 없이 성안의 군마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여포를 맞으러 성을 나갔다.

양군은 오래잖아 만났다. 둥글게 서로 맞서 있는 가운데 유비가 말을 타고 나와 여포에게 물었다.

“형께서는 무슨 일로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여포는 손가락을 들어 유비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나는 지난날 진문에 세운 화극을 쏘아 맞혀 네놈의 큰 어려움을 덜어주었거늘 네놈은 어찌하여 오히려 내 말을 빼앗아갔느냐.”

유비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까닭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비가 말이 모자라 사람을 시켜 사방에 말을 사들인 적은 있습니다만 감히 형의 말을 뺏을 리야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네 아우 장비를 불러내거라. 얼른 빼앗은 말 백오십 필 을 내놓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엔 무사하지 못하리라.”

대강 일이 짐작되었지만 여포는 여전히 시퍼런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서야 놀란 유비가 장비를 돌아보려는데 어느새 장비가 창을 들고 말을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그렇다. 네놈의 말은 내가 뺏었다. 어쩔 테냐?”

완연히 싸움을 거는 짓거리였다. 여포가 그걸 참아넘길 리 없었 다. 금세 욕설로 장비의 말을 받았다.

“이 고리눈 가진 도적놈아! 너는 이미 여러 번 나를 깔보았다. 그 러고도 네 목이 어깨 위에 남아날 것 같으냐?”

“개수작 마라. 내가 너의 말 몇 마리 빼앗은 것은 그렇게도 성을 내면서 너는 왜 우리 형님의 서주를 빼앗고도 구린 입 한번 떼지 않 느냐?”

보아하니 제딴은 처음부터 여포와 한바탕 싸울 작정으로 일을 벌 인 것 같았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극을 휘두르며 나오는 여포 를 장비 역시 창을 끼고 달려 나가 맞으며 그렇게 또 한번 여포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유비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장비와 여포는 치열한 싸움 에 들어갔다. 쌓인 감정이 있는 둘 사이라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 치 열했다. 찌르고 막고 후비고 피하기를 백여 합이 되도록 좀처럼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놀란 중에도 유비는 이미 싸움을 말리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싸 워야 한다면 여포는 군사가 많고 자기는 적으니 성에 의지하는 수밖 에 없었다. 이에 유비는 급하게 징을 울려 군사를 소패성 안으로 불 러들였다. 장비도 싸움을 그치고 뒤를 막으며 성안으로 되돌아왔다. 성난 여포는 군사를 풀어 사면으로 소패성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꼼짝없이 성안에 갇히어 생각지도 않은 싸움을 해야 하는 유비는 속 이 탔다. 여포를 막을 배치를 끝내기 무섭게 장비를 불러 꾸짖었다.

“네가 여포의 말을 뺏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뺏은 말은 어디 있느냐?”

“성안의 여러 절에 나누어 감춰뒀습니다.”

장비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유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여포와 싸워서는 아니 된다. 이겨도 져도 좋을 것은 우리가 아니다. 말을 돌려주고 화해를 해보자.”

그리고 사람을 여포의 진채로 보내 사정을 설명한 뒤 말을 돌려 줄 테니 싸움을 그만두자는 전갈을 보냈다. 여포도 대강 사정을 짐 작한 데다 유비가 그렇게 굽히고 나오자 약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말만 돌려받는다면 구태여 싸울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유비의 제안을 따르려 했다. 그때 진궁이 여포를 충동질했다.

“지금 유비를 죽이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그에게 해를 입게 될 것 입니다. 이왕 내친김이니 그대로 급하게 들이치십시오.”

생각하면 쓸쓸한 진궁의 변모였다. 처음 조조를 따라 벼슬자리를 버리고 난세에 뛰어들 때만 해도 진궁은 천하를 위한 대의에 몸과 마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 년도 흐르지 않은 지 금 그는 여포 같은 어리숙한 주인 아래서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권모(權)의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눈에는 유 비 또한 조조에 못지않게 음험한 야심가로 비쳤는지 모르지만, 확실 히 그 같은 부추김은 대세를 살펴 내린 판단은 못 되었다.

귀가 엷은 여포는 진궁의 말을 듣자 금세 마음이 변했다. 유비의 청을 들어주려던 생각을 바꾸고 오히려 한층 급하게 소패성을 들이 쳤다.

넓고 기름진 서주를 근거로 한 여포가 힘을 다해 소패를 들이치 니 유비의 위태롭기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그럭저럭 얼마간은 버텼으나 마침내 더 견딜 수 없자 미축과 손건을 불러놓고 의논했 다. 손건이 조심스레 한 가지 방도를 내었다.

“제가 알기로 조조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여포입니다. 위태로운 이 소패를 버리고 허도로 가 조조에게 의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에게 군사를 빌려 여포를 깨뜨리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상책인 듯합니다.”

유비도 생각해보니 그밖에 달리 어쩌는 수가 없었다. 곧 조조에게 의탁해 가기로 마음먹고 다시 물었다.

“누가 선봉이 되어 여포의 포위를 뚫고 나가보겠느냐?”

“제가 죽기로 싸워 길을 열어보겠습니다.”

장비가 유비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말했다. 일을 벌인 것이 자기라 그렇게 앞장선 것이었다. 유비도 말리지 않았다.

“좋다. 그럼 익덕이 앞서 길을 열고 운장은 뒤를 막으라. 나는 중군이 되어 늙고 어린 사람들을 지키겠다.”

그리고 그날 밤 삼경에 북문으로 성을 빠져나가기로 결정을 내렸 다. 유비가 정한 대로 대오를 짠 채 준비하고 있던 성안의 군사들은 그날 밤 삼경, 달이 뜨기 무섭게 북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마침 그쪽 을 에워싸고 있던 것은 송헌과 위속이었다. 갑자기 군사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얼결에 길을 막았으나 장비의 범 같은 기세에 눌려 쫓겨난 뒤 멀찌감치서 둘러싸기만 했다. 그 틈에 유비가 중군을 거 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장비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는 여포의 장수 장요가 급하게 뒤를 쫓았다. 그러나 관우가 뒤를 지키고 있으니 또한 함부로 따라붙지 못했다. 그 바람에 유비 는 노소를 보호해 무사히 소패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여포는 유비가 이미 달아난 것을 알자 뒤를 쫓으려 들지 않았다. 소패를 뺏어 후한을 없이 한 것으로 만족할 뿐 달아나는 유비를 쫓 아 죽일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곧바로 소패로 들어가 남은 백성들 을 안심시킨 뒤 고순(順)에게 소패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다시 서 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소패를 빠져나간 유비는 처음에 생각해둔 대로 허도에 이르 렀다.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온 뒤라 얼마 되지 않은 군사들이었으나 그래도 함부로 성안에 들지 못했다. 성 밖에 진채를 내리고 먼저 손 건을 들여 보내 조조를 찾아보게 했다. 그의 뜻을 안 뒤에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에서였다.

조조를 만난 손건은 그간의 경위를 말하고 특히 그에게 투항하고 싶다는 유비의 뜻을 간곡히 전했다. 내심으로 여포와 유비의 결속을 늘 근심해오던 조조는 기뻤다. 화살 한 개 허비하지 않고 유비와 여 포가 갈라선 걸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비는 근거조차 없는 떠 돌이 신세가 되고 여포는 발톱이 상한 호랑이 꼴이 된 걸 알았기 때 문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기쁜 것은 유비가 스스로 자기의 손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까닭 없이 유비를 경계해오던 그는 그 좋은 기회 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받아들이자. 두텁게 온정을 베풀어 내 사람을 만들어보자. 공손찬 따위도 한 일을 이 조조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그렇 게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 연못 안에 가두어둘 수는 있겠지. 그가 아무리 교룡같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작은 연못에 갇히어서야 무슨 조화를 부릴 수 있겠는가.’

조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정으로 반갑고 기쁜 표정을 지어 손건에게 말했다.

“현덕은 나와 형제 같은 사이요. 어찌 그가 어려운 처지에 떨어진 걸 못 본 체할 수 있겠소? 가서 이리로 들라 이르시오.”

그 말에 은근히 마음을 졸이던 손건은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숨 을 쉬었다.

이튿날이었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군사들과 함께 성 밖에 남겨 둔 채 손건과 미축만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문관들만 데려감으 로써 혹시라도 조조를 자극하는 일이 없게 한 것이었다. 조조는 유 비를 상빈(上賓)의 예로 맞아 대접이 후하기를 이를 데 없었다. 결코 갈 데 없어 찾아든 뜨내기 장수를 맞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이 비가 저를 대함에 박하지 않았거늘 오늘 오히려 여포에게 쫓 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실로 어찌해야 이 바다 같은 한을 풀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마친 뒤 그간의 경위를 짤막하게 말한 유비가 침통한 얼굴 로 그렇게 덧붙였다. 조조가 그런 유비를 위로했다.

“여포는 원래가 의리 없는 무리외다. 나와 현제가 힘을 합쳐 쳐없애면 될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그리고 잔치를 열어 늦도록 함께 마신 뒤에야 보내주었다.

유비가 돌아간 뒤 순욱이 들어와 조조를 보고 말했다.

“유비는 여포 따위와 비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 뜻이 만만찮은 당 금의 영웅이니 더 자라기 전에 일찍 없애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 으면 뒷날 반드시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냉철한 순욱에게는 이미 유비가 한의 신하로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와닿은 것일까, 좀처럼 하지 않는 박한 소리였다. 그러 나 마음속으로 생각해둔 바가 있는 조조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한의 부흥을 위주로 생각하는 순욱은 그 무렵부터 조조에 게 조금씩 경계를 사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순욱이 생각하는 적과 자신의 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조조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순욱이 나가고 완전히 자기의 사람이라고 믿는 곽가가 들어오자 불쑥 물었다.

“순욱이 내게 유현덕을 죽이라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떤가?”

곽가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아니 됩니다. 주공께서는 지금 의병을 일으키시어 천하 백성들을 위해 포악한 무리를 없애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믿음과 의 리를 짚어 천하의 뛰어난 인물들을 모아들이셔야 하는데, 만약 의심 과 두려움이 일면 그들은 즐겨 주공께로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유현덕이 영웅의 이름을 얻고 있으나 지금은 곤궁하여 주공께 의지하러 온 것입니다. 만약 그를 죽이면 이는 어진 이를 해친 것이 되고 맙니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이 그 소문을 들으면 절로 의 심이 생겨 주공께로 오지 않을 것인 바, 그때는 누구와 더불어 천하 를 평정하시겠습니까? 무릇 걱정되는 한 사람을 없애고자 천하의 신망을 잃는 일은 현명한 처사가 못 됩니다. 아직은 천하가 안정되 지 못한 때인 만큼 주공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리십시오.”

한마디 한마디가 조조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이었다. 이에 조조는 몹시 기뻐하며 치하했다.

“그대의 말이 정히 내 마음과 맞다.”

그리고 다음 날로 천자에게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목에 천거했다.

그걸 보고 정욱이 다시 순욱과 같은 뜻을 말했다.

“유비는 끝내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일찍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러나 조조는 좋은 말로 그 권유를 물리쳤다.

“지금은 천하의 영웅들을 불러모아 써야 할 때요.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어서는 아니 되오. 이는 나와 곽봉효(孝)의 뜻 이 하나가 된 결정이외다.”

그러고는 군사 삼천과 곡식 만 섬을 주어 예주에 부임토록 했다.

예주는 유비가 전에 있던 서주와 소패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조조가 유비를 예주로 보낸 것은 거기서 소패로 군사를 내어 전에 흩어진 옛 군사들을 다시 모아들임과 아울러 여포를 공격할 틈을 엿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유비에게 여포를 쳐 설욕할 기회를 만들어준 것 같지만 실은 유비를 이용해 여포란 만만찮은 상대를 견제하는 셈 이었다.

예주에 이른 유비는 새로이 얻은 군사와 군량을 밑천으로 다시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여포에게 쫓길 때 흩어진 옛 군사들이 다시 모여들고 새로 뽑은 군사도 보태 유비는 오래잖아 상당한 힘을 회복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혼자 힘으로는 여포를 넘볼 처지가 못 돼 유비는 다시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함께 여포를 치자는 글을 올리게 했다.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입니다. 서주를 잃었으나 새로 예주를 얻고 또 조조란 든든한 동맹군을 얻었으니 머지않아 주공께서도 크게 세 력을 떨치실 것입니다.”

일이 그쯤 되자 손건이 자못 다행스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유비는 오히려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닐세. 우리는 오히려 조조의 작은 연못에 갇힌 셈이네. 언제 다시 구만리 창천으로 치솟을 날이 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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