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6화 : 전공은 호색에 씻겨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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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6화 : 전공은 호색에 씻겨가고


전공은 호색에 씻겨가고

유비의 글을 받은 조조는 그날로 군사를 일으켜 여포를 치려 했 다. 그런데 홀연 유성마(馬)가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동탁의 옛 장수 장제가 관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양을 치다가 유시(矢)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에 장수(張)란 자가 있어 그 무리를 이어받고 가후賈)를 모사로 삼아 다시 세력을 떨 치게 되었습니다. 장수는 이제 형주의 유표)와 연결하여 완성 에 군사를 머무르게 한 뒤 허도를 엿보고 있다 합니다. 예전에 동탁 이나 이각, 곽사의 무리가 그랬던 것처럼 궁궐을 범하고 천자를 빼 앗아 천하를 호령하려는 뜻임에 분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노했다. 그대로 군사를 일으켜 장수를 토벌하고 싶었으나 문득 여포가 걱정이 되었다. 유비의 일로 잔뜩 준비하고 있던 여포가 허도(都)가 빈걸 알고 쳐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어두운 얼굴로 거기에 대한 계책을 묻자 순 욱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거야 쉬운 일입니다. 여포는 꾀 없는 무리이니 이익을 보면 반 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서주로 사람을 보내시어 여포에 게 벼슬을 높여주고 현덕과 화해토록 권하십시오. 여포는 기쁜 나머 지먼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에 따를 것입니다.”

“좋은 계책이오.”

조조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렇게 대답하고 그날로 봉거도위(奉車 都尉) 왕칙(則)을 뽑아 서주로 보냈다. 여포의 벼슬을 높이는 조서 와 함께 유비와 화해를 권하는 글을 전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런 다 음 조조는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십오만 군사를 일으켜 몸소 장수를 치러 나갔다. 하후돈을 선봉으로 삼고 군사를 세 길로 나누 어 진군하는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조조의 대군이 육수 가에 이르러 진채를 세우자 장수는 은근히 겁이 났다. 모사 가후를 청해 물으니 그 또한 계책이 없는듯 말했다. 

“지금 조조의 병세가 워낙 커 우리 힘으로는 대적할 길이 없습니 다. 차라리 성을 들어 항복함만 같지 못합니다.”

장수는 별수 없이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가후를 조조의 진중으 로 보내 항복할 뜻을 비췄다. 조조가 가후를 만나보니 그 언변이 흐 르는 물 같고 재주 또한 놀라워 아끼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모사 로 쓰고 싶어 은근히 속을 떠보았다. 그러나 가후는 차분하게 대답 했다.

 “저는 지난날 이각을 따라 이미 천하에 죄를 지었습니다. 거기다 가 지금은 장수가 제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게 없고, 제 계책이라면 따 르지 않는 게 없으니 차마 그를 버릴 수 없습니다. 승상의 두터운 정 만 가슴에 간직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장수에게 돌아갔다.

이튿날에는 장수가 조조를 찾아와 항복을 했다. 조조는 싸움 한번 없이 큰 걱정거리 하나를 덜게 된게 기뻐 그를 후하게 대접한 뒤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는데 진채와 목책이 십여 리에 이어질 지경이었다.

조조가 성안에 머무는 며칠 동안 장수는 매일 잔치를 벌여 조조 의 환심을 샀다. 평소 술을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는 조조라 마다할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장수가 연 잔치에서 취해 돌아온 조조는 슬며시 여자 생각이 났다. 군사를 이끌고 나온 터라 여러 날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원래도 호색한 조조였다.

“이 성안에는 기녀가 없느냐?”

조조는 좌우를 돌아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거기에 있던 조카 조안 민(曹安民)이 그런 조조의 속뜻을 알고 가만히 대답했다.

“어제 저녁 늦게 제가 살펴보니 이 관사 곁에 한 부인이 사는데 몹시 아리따운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장수의 아재 비 되는 장제의 처라고 했습니다.”

“장제의 처라…… 그렇다면 과수댁이로구나. 나도 지금은 홀아비 신세이니 서로 만나 정분을 나눈다고 죄 될 리 없지.”

조조는 취한 김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갑병(甲兵) 오십 명을 풀어 그 부인을 데려오게 했다. 조조의 명을 받아 몰려간 군사들은 오래잖아 한 부인네를 업어왔다. 조조가 보니 과연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그대는 누구며 성명은 어떻게 되시오?”

조조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묻자 그 부인네가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첩은 장제의 아낙 되는 사람으로 추씨(鄒氏) 성을 쓰고 있사옵니다.”

“부인은 나를 알아보겠소?”

조조가 다시 그렇게 묻자 추씨는 아미에 은은한 홍조까지 떠올리며 대답했다.

“승상의 위명(名)을 들은 지 오래더니 다행히 오늘 이렇게 절하 여 뵙게 되었습니다.”

그걸로 미루어 이미 조조가 품은 뜻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하면 이미 장제가 죽은 지도 여러 달 지난 터라 사뭇 싫기만 할 리도 없거니와 장제 또한 정으로 만난 사이가 아니니 수절이 그리 중하지도 않았다. 조조는 이미 반 허락을 받은 셈이었으나 짐짓 거 드름을 떨어보았다.

“내가 장수의 항복을 받아들인 것은 특히 부인을 위해서였소. 그 렇지 않았다면 귀(貴) 가문은 모조리 멸족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오.” 

“죽은 목숨을 다시 잇게 해주신 은혜, 실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추씨가 새삼 고마움을 표시했다. 앵두 같은 입술가로 은은한 추파를 머금은 그 모습이 한 떨기 꽃 같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조조는 완연히 드러내놓고 추씨를 달랬다.

“오늘 부인을 보게 되어 실로 다행이오. 오늘 밤 나와 함께 잠자 리에 들고 나를 따라 도성으로 돌아감이 어떠하오? 내 반드시 그대 에게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도록 해드리겠소.”

그러자 추씨는 말없이 절을 올려 따를 뜻을 나타내는 말을 대신했다.

그날 밤 조조는 추씨와 더불어 마음껏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그 러나 새벽녘이 되자 추씨는 은근히 걱정이 이는 모양이었다. 지쳐 눈을 붙이려는 조조에게 교태롭게 감기며 속살거렸다.

“제가 오래 성안에 있으면 필시 장수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소문이 새 나가면 반드시 남의 입에 좋지 못하게 오르내릴 것이니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걱정 마시오. 내일은 부인과 함께 거처를 내 진채로 옮기겠소.” 

조조가 그렇게 추씨를 안심시켰다.

다음 날 조조는 정말로 거처를 성 밖의 진채로 옮겼다. 그리고 전 위로 하여금 장막 밖을 엄히 지키게 하여 아무도 함부로 뛰어들 수 없도록 했다.

그 때문에 안팎이 완전히 막힌 장막 안에서 조조는 매일 밤낮없 이 추씨의 몸을 탐하며 지냈다. 추씨 또한 인물 못지않게 남자를 후 릴 줄도 알아서 조조는 돌아갈 생각도 잊고 음락(樂)에 빠져 허덕 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조조가 추씨를 데려간 지 여러날이 되자 마침내 소문은 장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조조 그 도적놈이 어찌 이리도 심하게 나를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부리는 사람들로부터 그 소문을 듣자 장수는 성나 소리쳤다. 그리 고 급히 가후를 불러들여 의논했다.

“조조 그놈이 내 숙모를 자기 진채로 잡아가 밤낮없이 욕을 보이 고 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소? 세상 사람들은 이 장수를 숙모를 바쳐 구차하게 목숨을 빈 못난이라 욕하지 않겠소? 이 일은 결코 용 납할 수 없소. 공은 나를 위해 다시 꾀를 내어주시오.”

가후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히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결 코 이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서는 안 되니 은밀하고 신중하게 처리하 십시오.”

그러고는 장수의 귀에 대고 상세한 계책을 일러주었다. 듣고 난 장수가 기뻐하며 그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이었다. 장수가 조조를 찾아와 뵙기를 청한 뒤 천연덕스런 얼굴로 말했다.

“새로 승상께 항복을 한 뒤라 그런지 도망치는 자들이 부쩍 늘었 습니다. 진채를 옮겨 단속을 엄히 했으면 합니다.”

“좋도록 하게.”

아직도 추씨에게 빠져 정신이 없는 조조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허락했다.

조조의 허락을 받은 장수는 그날로 군사를 네 부대로 나누어 각기 가후가 준 계책에 맞게 배치하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조의 장막을 지키는 전위의 용맹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장수는 편장(偏將)인 호거아(胡車兒)와 의논을 했다.

“전위가 저토록 굳게 장막을 지키니 가후의 계책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써볼 수가 없네. 좋은 수가 없겠는가?”

호거아 역시 힘이라면 남에게 지기 싫은 위인이었다. 오백 근을 지고 능히 하루에 칠백 리를 걷는 별난 장사였지만 전위는 이길 자 신이 없었던지 한동안 생각하다 궁색한 꾀를 냈다.

“전위가 두려운 것은 그 쌍철극 때문입니다. 내일 주공께서는 전 위를 불러 술을 내리시고 한껏 취하게 한 뒤에 돌려보내십시오. 그 러면 그때 저는 그를 따라온 군사들 틈에 섞여 그의 장막으로 들어 가 쌍철극을 훔쳐내 오겠습니다. 만약 그 쌍철극만 없애버린다면 전 위도 별로 두려울 게 없습니다.”

궁색하기는 해도 꾀는 꾀였다. 장수는 몹시 기뻐하며 먼저 무기와 군사들을 충분히 갖추도록 각 채에 이른 뒤에 가후를 시켜 전위를 청했다.

이미 항복을 한 장수의 청이라 전위는 별 의심 없이 왔다. 전위를 맞은 장수는 정성을 다해 마련한 좋은 술과 안주를 내고, 더불어 마 시기를 권했다. 그리하여 생각 없이 받아 마신 전위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뒤에야 자기의 군막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호거아 도 졸개의 복색을 하고 전위를 따라온 군사들 속에 숨어들었다.

그날 밤이었다. 그 같은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조는 장막 안에서 추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인마가 수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나가보게 했다.

“장수의 군사들이 밤 순찰을 돌고 있다 합니다.”

잠시 후에 사람이 들어와 그같이 알렸다. 이에 조조는 더 의심하 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추씨를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경 이 되었을 무렵 갑작스런 군사의 함성 소리와 함께 말 먹일 풀을 실 은 수레에 불이 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잘못해서 군중에 불이 난 모양이오. 걱정할 것 없소.”

조조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놀란 추씨를 위로하며 다시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오래잖아 불길은 사방에서 일고 조조는 비로소 심상 찮음을 느꼈다.

“전위, 전위는 어디 있느냐?”

조조가 황망히 옷을 꿰며 급한 목소리로 전위를 불렀다.

이때 전위는 장수에게서 얻어 마신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꿈 꾸는 듯하게 북소리 징소리와 죽이고 죽는 함성이 들렸다. 취한 중 에도 몸을 일으켜 정신을 가다듬으며 손에 익은 쌍철극을 찾았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쌍철극이 보이지 않았다.

전위가 당황하여 군막을 뒤지고 있는데 어느새 적병이 진문을 쏟 아져 들어왔다. 전위는 급한 김에 보졸의 허리에 찬 칼을 뺏어 들고 앞을 노려보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마가 장창(長槍)을 비 껴들고 조조의 군막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전위가 힘을 다해 찍고 베니 앞선 군마 가운데서 스무남은 명이 나 말등에서 떨어졌다. 그 바람에 겁을 먹은 적의 마군은 주춤했다. 그런데 때마침 적의 보졸이 당도하자 다시 기세를 올려 몰려들었다.

마치 갈대숲 같은 적의 창대 사이에 둘러싸인 전위는 그래도 두 려워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취해 자다가 달려 나온 그라 몸에는 갑옷 한 조각 걸치지 못했다. 거기다가 무기까지 손에 익은 쌍철극이 아니라 보졸들이 허리에 차는 보잘것없는 칼이고 보니 그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아래위로 수십 군데 창을 맞아 눈뜨고 보기 어 려운 형상이었다.

그러나 전위는 여전히 산악처럼 버티어 서서 물밀듯이 몰려오는 적을 막았다. 이름 없는 졸개의 칼이 오히려 견뎌내지 못해 나중에 는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전위는 양손에 군사 하나씩을 잡 고 그걸 무기로 싸우기 시작했다.

전위가 손에 든 군사들을 가벼운 몽둥이 휘두르듯 하는 데 맞아 다시 적병 몇이 쓰러졌다. 실로 무서운 용맹과 충성이었다. 그러자 적병들도 감히 더 접근할 생각이 들지 않는 듯 멀찌감치 물러나 활 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 화살이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졌으나 전위 는 의연히 진문에 버티고 서 있었다.

갑옷을 걸치지 못한 맨몸이라 전위가 아무리 손에 든 군사를 휘 둘러 막아도 몸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혔다. 그때 다른 곳을 뚫고 들어간 적병의 일부가 전위의 등 뒤에 이르렀다. 그들 중의 하 나가 이미 반 넘어 혼이 나가 앞만 바라보고 있는 전위의 등판 깊숙 이 한 창을 찔러넣었다. 천하의 전위도 거기까지는 견뎌내지 못했 다. 몇 번인가 큰 고함을 지른 뒤에 쓰러져 붉은 피로 땅을 적시며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전위의 엄청난 힘에 질릴 대로 질린 장수의 군사들은 전위가 죽고도 한참이 되도록 감히 진문으로 몰려들지 못했다. 조조를

위해서는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때 조조는 조카 조안민만 도보로 뒤딸린 채 말을 타고 정신없 이 달아나고 있었다. 그것도 전위가 진문을 막아선 걸 보고 재빨리 진채 뒤로 가 말 위에 오른 덕분이었다. 그러나 워낙 철통같이 에워 싼 적병이라 마침내 무사하지는 못했다. 조조는 오른팔에 화살을 맞 고 그 말도 여러 곳에 화살을 맞았다.

다행히 조조가 탄 말은 대완苑)에서 난 좋은 말이라 아픔을 참 고 달려주었다. 간신히 포위를 뚫고 육수가에 이르렀으나 적병의 추 격은 급했다. 조카 조안민은 거기서 적병에게 사로잡혀 창칼에 다져 진 고깃덩이가 되고, 조조만 급하게 말과 함께 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좋은 말의 덕분으로 물은 무사히 건넜지만 말의 덕을 보는 것도 거기서 끝나버렸다. 조조가 겨우 맞은편 강 언덕으로 올 라섰을 때 마침 날아온 화살 하나가 말의 눈에 정통으로 박혀버렸 다. 아무리 대완의 양마(馬)라 해도 눈에 화살이 박혀서야 배겨날 리 없었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버님, 이 말에 오르십시오.”

조조가 황망해 있는데 어디선가 뒤따라온 맏아들 조앙(曹昻)이 말 고삐를 내밀었다. 병법을 익혀주려고 특히 이번 출전 때 데리고 나 왔는데 그 난중에서 용케 몸을 빼낸 모양이었다. 말을 잃는다는 건 곧 목숨을 잃는 것이란 걸 잘 알면서도 아비의 위급을 보자 자기의 말을 바친 것이었다.

“오, 너였구나. 고맙다.”

조조는 두말 않고 말 위에 올라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채찍질해 사라졌다. 조앙도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을 바꾸어 타는 동안 뒤쫓아온 적병이 소나기처럼 퍼부어대는 화살 을 피하지 못해 끝내는 꽃다운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음미해보고 싶은 것은 자식을 대신 죽게 한 것이나 다름없는 조조의 그 같은 처사이다. 창황중에 저질러진 일로 보기도 하나, 가장 흔한 해석은 조조의 비정함과 이기에서 구하고 있다. 실제로도 장자 조앙을 아들로 삼아 기른 조조의 정처 정씨(丁 氏)는 그 일을 들어 조조와 의절하고 평생을 다시 보지 않았다는 기 록이 있다.

하지만 그 일의 해석은 비정과 이기에서만 구하고 있는 것은 아 무래도 일세의 영웅 조조를 지나치게 비하시킨 감이 있다. 첫째로 아들을 사지에 버려둔 채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것은 비정이 아니 라 눈부신 냉철함일 수도 있다. 조조가 살아가면 원수라도 갚을 수 있지만 조앙이 살아가면 원수는커녕 제 한 몸도 보존하기 어렵게 된 다. 조조가 없는 패잔병들로는 장수의 끈질긴 추격을 끝내 벗어날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뒷날의 행적으로 보아 그걸 헤아리지 못할 조조 는 결코 아니었다.

이기로 해석되는 부분도 실로 영웅에게나 가능한 매서운 결단으 로 볼 수 있다. 그 경우 아들을 대신해 죽는 것은 세상의 범부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인정에 끌리지 않고 자기 목숨의 무게와 아 들의 목숨이 가진 무게를 냉정히 헤아려 결단하는 것은 범부로서는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조조는 그때 이미 사사로운 아비뿐이 아니었다. 가깝게는 흩어져 장수의 군사들에게 개 몰리듯 하고 있는 장졸들을 수습해 그들을 각자의 아비에게로 살려 돌려보내야 할 주장이 었고, 멀게는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뜻을 펼쳐야 할 영웅이었다. 어쨌든 자식을 희생으로 바쳐 겨우 목숨을 건진 조조는 오래잖아 흩어져 빠져나온 여러 장수들과 만날 수 있었다.

조조는 그들을 시켜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게 하는 한편 조조와 함께 있지 않아 피해를 면한 장졸들을 불러들였다. 오래잖아 사방에 서 모여든 군사로 조조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하후돈이 거느리고 있던 청주병(靑州)일부가 호되게 당 한 꼴로 쫓겨와 울며 고했다.

“우금(禁)이 주공을 배반했습니다.”

그 말에 놀란 조조가 물었다.

“무엇이? 우금이 어떻게 나를 저버렸다는 것이냐?”

“저희들을 까닭 없이 급습해 수없이 죽였습니다.”

청주병들은 더욱 구슬프게 울며 그렇게 대답했다.

청주병은 지난날 조조가 황건의 잔당을 토벌하고 거기서 항복한 자 가운데서 뽑은 군사였다. 원래도 싸움의 경험이 많은 데다 조조 밑에서 단련을 받아 날래고 용맹스럽기로 이름났지만 아무래도 출신 이 도적이었다. 장수가 이미 항복을 했다는 말을 듣자 마침 성 밖에 둔치고 있음을 기화로 삼아 인근 마을의 양민들을 약탈하고 돌아다 녔다.

마침 우금이 그들 가까이 있었는데 그 꼴을 보고 참지 아니했다. 자기가 거느린 군사들을 이끌고 양민을 약탈하는 청주병을 보는 족족 죽여버렸다. 지금 우금이 모반했다고 고하는 청주병은 떼를 지어 약탈을 나갔다가 우금을 만나 거의가 죽고 간신히 살아 도망친 자들 몇몇이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조조는 몹시 놀랐다. 뒤이어 모여든 하 후돈, 허저, 이전, 악진 등에게 급한 대로 영을 내렸다.

“평로교위 우금이 모반하려 한다 하니 빨리 군사를 정돈하여 막 을 준비를 하라.”

그 말에 장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우금도 조조의 진 채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기가 받고 있는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조는 찾아보지도 않고 진채를 세우기에만 바빴다. 조조의 본영과 화살 닿을 거리쯤에 세우는데 호를 깊이 파고 채를 든든히 하는 것 이 누구를 대항해 세우는지 얼른 짐작이 안 갈 지경이었다.

이때 우금과 함께 있던 순욱이 갑갑한 듯 권했다.

“청주병들이 먼저 도착했으니 반드시 승상께 장군이 모반했다고 일러바쳤을 것이오. 이제 여기 승상께서 와 계신데 어찌하여 그 일 을 밝힐 생각을 않고 영채부터 먼저 세우고 계시오?”

분위기로 보아 금세 거기서 있었던 일을 알아차린 순욱은 은근히 급한 마음까지 일었다. 그러나 우금은 태연했다.

“지금 적병이 뒤따라 오고 있어 언제 여기를 덮칠지 모르는 일이 오. 먼저 준비부터 하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막을 수 있겠소? 승상 께서 나를 그릇 생각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그걸 밝혀 바로잡는 것은 작은 일이요, 적을 몰아내는 것은 큰일이니, 작은 일은 먼저 큰일부 터 해놓은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순욱이 자기 좁은 속을 내보인 것 같아 은근히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과연 우금의 말대로 장수의 추격군은 우금이 영채를 안 돈시키기 무섭게 몰려왔다. 지금껏 뒤쫓기만 해온 터라 자못 거칠 것 없다는 기세였다.

이때 우금이 먼저 영채를 나가 맞으니 장수의 군은 당황했다. 이 미 질서 없이 쫓기는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사를 물려라. 돌아가자!”

놀란 장수가 급히 영을 내려 군사를 물렸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우금이 아니었다. 그대로 앞서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아직 영 채가 안돈되지 않아 처음 장수의 추격군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잠 시 당황했던 조조의 여러 장수들도 그제야 군사를 몰아 우금을 뒤 따랐다.

그렇게 되자 장수의 패배는 더욱 걷잡을 수 없었다. 형편없이 두들 겨 맞고 백 리나 쫓겨간 뒤에야 겨우 군사를 수습했다. 그 바람에 원 래도 조조의 적수가 못 되던 그 세력은 더욱 볼품없이 줄어 있었다. 

“이제 힘을 다하고 도울 이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장수가 맥빠진 목소리로 좌우에게 물었다.

“형주의 유표가 원래부터 조조와 사이가 좋지 못하니 그리로 의 탁해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우가 한결같이 그렇게 권했다. 달리 갈 곳도 없는 장수는 이에 남은 장졸을 이끌고 형주를 바라 달아났다. 가후의 꾀를 빌려 급습 에는 성공하였으나 끝내 조조를 죽이지 못한 바람에 당한 낭패였다. 전위나 조앙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셈이었다.

장수를 멀리 쫓은 뒤에야 조조는 군사들을 정돈하고 여러 장수들 을 불러모았다. 우금은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을 변호했다. 

“청주병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녀자를 희롱하고 재물을 약 탈하여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기에 제가 군사를 풀어 죽였습니 다. 결코 주공을 배반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먼저 내게 그 일을 알리지 않고 영채부터 세웠는가?”

조조는 짐작이 가면서도 짐짓 그렇게 물었다. 우금은 전에 순욱에 게 말한 대로 대답했다.

“장군은 쫓기는 황망함 가운데도 능히 군사를 정돈시키고 영채를 굳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진 싸움 을 이기도록 만들었소. 옛날의 명장이라 한들 어찌 장군보다 훌륭할 수 있겠소!”

조조는 우금의 말을 듣자 그렇게 칭찬한 뒤 금으로 된 그릇 한 벌 을 내리고 익수정후(益壽亭侯)에 봉했다. 그리고 하후돈을 향해서는 군사를 엄히 다스리지 않은 허물을 꾸짖어 상벌을 분명히 했다. 살 아 있는 장수들의 상벌이 끝난 뒤 조조는 다시 크게 제사를 지내 자 기를 위해 죽은 전위의 혼을 위로했다.

“내가 비록 맏아들과 조카를 잃었으나 그리 괴롭고 슬프지 않다. 지금 우는 것은 오직 전위를 위해서이다.”

조조는 친히 술을 치고 흐느낀 뒤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그렇 게 말했다. 또 한 번 조조다운 언행을 보인 셈이었다. 그러나 사랑하 는 자식이나 조카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그에게 장수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강의 뒷수습이 끝나자 조조는 다음 날로 군사를 돌렸다. 비록 싸움은 이겼으나 어느 때보다 침통한 회군이었다. 자신의 호색으로 그렇게 된 셈인 조조는 더욱 침통했다.

다행히 허도에서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서주로 여포를 달래러 갔던 왕칙이 뜻을 이루고 돌아와 있었다.

“그래, 여포는 평동장군(平東將軍)이란 벼슬과 보낸 물품에 만족하던가?”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왕칙이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조서와 특사품을 내리자 여포는 몹시 기뻐했습 니다. 거기다가 승상께서 자기를 공경한다는 말을 듣자 더욱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원술에게서 사신이 왔습 니다. 원술이 오래잖아 제위에 오를 것이니 동궁(東宮)이 될 아들의 비로 여포의 딸을 빨리 보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여포는 무어라고 대답하던가?”

“원술더러 역적 놈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하며 성을 내고 그 사신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만하면 원술과는 완전히 돌아섰다고 믿어도 되겠군.”

“뿐만 아닙니다. 전에 혼인 문제로 와 있던 원술의 신하 한윤까지 묶어 승상께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따로이 진등(陣登)에게 는 감사하는 표문을 주어 저와 동행 했습니다.”

“여포가 그렇게까지 할 때에는 무언가 더 얻고 싶은 게 있었겠지. 그건 무엇이던가?”

“여기 승상께 올리는 글이 있습니다. 보시면 여포가 무얼 더 원하 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왕칙이 품 안에서 봉서 한 장을 꺼내 올렸다. 조조가 뜯어보니 감 사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여포가 얻고자 하는 것은 겨우 정식으로 서주목에 임명되는 것이었다.

“어려울 것 없지.”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어쨌든 사자까지 죽이고 한윤 을 자기에게 묶어 보낸 것으로 보아 여포와 원술의 혼담이 끊어진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원술과 여포 사이에 남은 것 은 전쟁뿐이라 걱정거리를 덜었을 뿐 아니라 앉아서 이득까지 보게 된 조조로서는 크게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조조가 얻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여포의 사자로 온 진 등이 또한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진등은 여포가 힘으로 서주를 차 지하는 바람에 그 밑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여포의 사람됨이 오래 세 력을 보존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전부터 새 주인을 찾고 있었다. 그 런데 한번 허도로 와 조조를 보자 마침내 천하를 얻을 이는 그라 여 겨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포의 사자로 와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쑥스럽습니다만 여포 는 이리나 늑대 같은 무리입니다. 용맹은 있으나 지모가 없고, 또 거 취를 정하는 데 가벼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승상께서는 일찍 그를 도모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조조와 담소를 나누던 중에 진등이 가만히 권했다. 그리고 아버지 진규와 그간에 꾸며온 일을 조조에게 밝혔다.

“나도 이미 여포가 늑대 같은 심보를 가진 자라 오래 기르기는 어 렵다는 걸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공의 부자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 면 그의 사정을 알 길이 없고, 사정을 모르고 덤볐다간 오히려 그 용 맹에 화를 입을까 걱정이외다. 그런데 이왕에 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마땅히 함께 여포를 도모해야 되지 않겠소?”

“승상께서 만약 여포를 치시게 된다면 저는 안에서 접응하겠습니다.”

그 말에 조조는 한층 기뻤다. 여포는 이미 반쯤 잡아둔 늑대라 생 각하고 상부터 먼저 내렸다. 진규에게는 이천 석의 녹(祿)을 내리고 진등은 광릉 태수로 삼았다. 그리고 여포에게로 돌아가는 진등의 손 을 잡고 한 번 더 다짐했다.

“동쪽의 일은 오직 공 부자만 믿소이다.”

그 다짐에 진등은 고개를 끄덕여 조조를 안심시킨 뒤 서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는가?”

서주로 돌아가자 여포가 얼굴을 대하기 무섭게 진등에게 물었다. 

“승상께는 일간 표문을 올려 장군께 서주목의 직첩이 내리도록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뿐인가?”

“저희 아버님께는 녹 이천 석을 내리고 제게는 광릉 태수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말에 여포가 벌컥 성을 냈다.

“뭐라고? 네놈은 나를 위해 서주목 직첩을 얻어오는 데는 힘을 쓰지 않고 네놈의 벼슬과 네 아비의 봉록만 구했구나. 네 아비가 내게 조조와 손잡고 원술과의 혼담을 끊으라고 가르치기에 그대로 하였 는데, 이게 무슨 수작이냐?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도 얻 지 못하고, 네놈들 부자만 각기 높고 귀해졌으니 이는 틀림없이 나 를 조조에게 판 값일 것이다.”

그러고는 칼을 빼어 진등의 목을 베려 하였다. 여포의 둔한 머리 에도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 모양이었다. 진등은 속으로 깜 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했다. 한바탕 크게 웃고는 빈정거리듯 말 했다.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도 세상을 보는 눈이 어두우시오?”

“내 눈이 어둡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여포가 주춤하며 되물었다.

“조조를 만났을 때 나는 장군을 대하는 일을 호랑이 기르는 일에 비했습니다. 호랑이는 그 배가 부르도록 고기를 먹어야 하며, 만약 굶주리게 하면 반드시 사람을 문다고 말함으로써 은근히 장군께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권한 것입니다. 그때 조조는 장군을 매(鷹) 에 비유해 아직 토끼와 여우가 살아 있는데 배불리 먹여서는 안 된 다고 했습니다. 매는 배가 고파야 부릴 수가 있으니, 배가 부르면 멀 리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우와 토끼는 누구란 말이냐?”

여포가 좀 누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저도 그걸 물었던바 조공(曹公)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회남의 원술, 강동의 손책, 기주의 원소, 형주의 유표, 익주益州)의 유장璋), 한중(中)의 장로(張) 그 모두가 토끼나 여우 같은 무리가 아 니겠느냐고. 까짓 이름뿐인 벼슬에 그리 연연하실 일이 아닙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더 화가 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여포를 천하의 뭇 영웅들보다 높게 보아준 것은 좋으나, 그렇다면 그 여포를 기르 는 조조는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여포는 우선 조조가 자기를 원소 나 원술보다 높게 보아준 데 기분이 좋았다. 꼭뒤까지 올랐던 분기 를 풀고 칼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조공이 실로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리고 부드러운 얼굴로 진등과 서로 치하의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유성마가 달려와 급히 고했다.

“원술이 대군을 일으켜 서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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