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2화 : 와룡은 세 치 혀로 강동을 일깨우고
와룡은 세 치 혀로 강동을 일깨우고
다음 날이 되었다. 노숙은 역관으로 찾아가 공명을 만나보고 또 당부했다.
“오늘 우리 주공을 뵙게 되더라도 조조의 군사가 많다는 소리는 결코 하지 마십시오.”
“양은 때를 보아 알맞게 말하겠습니다.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니 마음 놓으십시오.”
공명이 빙긋 웃으며 한 번 더 노숙을 안심시켰다. 그제서야 노숙 은 먼저 강동의 인걸들을 모두 모아놓은 장막으로 데려갔다. 전날 손권이 시킨 대로였다.
공명이 장막에 이르러보니 장소, 고옹을 비롯한 스무명 남짓의 문 무관원이 높은 관에 띠를 두르고 옷매무시를 가지런히 하여 앉아있었다. 공명은 그들과 하나하나 만나 서로 이름을 대고 인사를 나눈 뒤 손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장소를 비롯한 강동 사람들은 공명 의 풍채가 당당하고 우뚝하며 사람됨이 헌걸찬 걸 보고 곧 그가 세 객(客)으로 자기들을 달래러 온 것임을 알아보았다.
장소가 먼저 그런 공명의 기를 꺾어보려는 듯 입을 열어 넌지시 걸고 들었다.
“장소는 강동의 보잘것없는 선비올시다만 선생께서 융중에 높이 누워 지내신다는 소문은 일찍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때 선생께서는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셨다는데 정말입니까?”
“그것은 제가 언제나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 견주어 나타내는 데 써 온 말입니다.”
제갈량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소는 기다 렸다는 듯 그 일을 물고 늘어졌다.
“요사이 듣자 하니 유예주께서는 세 번이나 선생의 초려를 찾아 보고서야 겨우 선생을 얻고는 마치 고기가 물을 얻은 듯이나 기뻐했 다고 합니다. 이는 형주와 양양을 손에 넣고자 함에서였는데 이제 그 땅은 도리어 조조에게로 넘어가버렸으니 어찌 된 셈입니까?”
관중과 악의 같은 인물이 왜 이 꼴이냐는 투의 빈정거림이었다. 공명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장소는 손권이 거느린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모사라 할 수있다. 만약 먼저 이 사람을 꺾지 못한다면 어떻게 손권을 달랠 수 있 겠는가.’
그러고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어조로 장소의 말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 한상의 땅을 얻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공 유예주께서는 인의를 몸소 행하시는 분 이시라 차마 같은 유씨의 땅을 뺏지 못하고 오히려 힘써 사양했던 것입니다. 그 바람에 결국 형주는 어린 유종에게 넘어가게 되었던 바, 유종은 못나게도 아첨하는 말만 믿고 몰래 조조에게 항복하여 조조의 세력을 이토록 크게 만들어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하에 자리를 잡고 따로 조조를 칠 좋은 계책을 마련하고 있습니 다. 우리가 결코 일을 등한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님은 누구라도 쉬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소는 그 정도의 말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쯤은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심술궂게 공명의 말을 받았다.
“일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바로 선생의 말과 행동이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선생은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게 견주었으나, 관중은 환 공을 도와 제후들을 억누르고 어지러운 천하를 단번에 바로잡았으 며, 악의는 힘 없는 연나라를 떠받치어 제나라의 칠십여 성을 떨어 뜨린 인물입니다. 실로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바로잡을 만한 재주를 지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어떠합니까? 초려에 머 물러 있을 때는 풍월이나 즐기고 무릎 쓸며 높이 앉았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미 세상에 나와 유예주를 돕게 된 마당에 는 마땅히 천하의 뭇 생령을 위해 이로움을 더하고 해로움을 덜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역적의 무리를 쳐 없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유예주만 해도 선생을 얻기 전에는 그래도 천하를 종횡 하며 의지할 성 몇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선생을 얻고 난 뒤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우러러보았으며 키가 석자 되는 어린아이들도 유예주께서 선생을 얻은 것은 호랑이나 표범의 등에 날개가 돋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습니다. 한실은 다 시 일어나고 조씨는 곧 멸망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말 속에 뼈가 있다든가 한껏 공명을 추키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공명이 아파할 곳을 골라 건드리고 있었다.
장소는 이어 말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조정의 옛 신하들이며 산림에 숨어 있는 선비들까지도 하늘 가득한 구름이 걷히어 해와 달의 밝은 빛을 우러 를 수 있기를 눈을 씻고 기다리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물불 속에 빠진 듯한 이 백성을 건져내고 천하를 이부자리처럼 편안한 곳에 두 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선생뿐이라 믿으며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하지만 유예주께로 가신 선생은 조조의 군사가 한번 나타나자마자 바람에 휘몰리듯 달아나니, 위로는 유표에게 보답하여 그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도 못했고 아래로는 유표의 외로운 아들을 도와 그 땅을 보전해주지도 못했습니다. 또 유예주는 유예주대로 신야(野) 를 버리고 번성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번성을 버리고 오는 중에 당양 (陽)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이제는 하구까지 쫓겨와 그 몸둘 땅도 없을 지경입니다. 이는 유예주께서 선생을 얻은 뒤가 얻기 전보다 못하다는 것이 되니 관중과 악의가 언제 그 주인을 이렇게 섬겼습니 까? 다만 이것은 저의 어리석고 굳은 소견에서 나온 말입니다.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몰라서 한 말이 있으면 깨우쳐주십시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공명이 꼼짝없이 무안을 당하리라고 믿었을 만큼 빈틈없는 장소의 말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거꾸로 공명은 어이없다는 듯 좌중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대붕(鵬)이 만리를 나는 뜻을 하찮은 새 떼가 어찌 알 수 있겠 소? 그 일은 비유컨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소. 사람이 큰 병이 났을 때는 먼저 미음과 죽을 먹게 한 뒤에 부 드러운 약부터 써야 할 것이오. 그리하여 창자와 폐부가 제대로 움 직이고 몸이 점차 회복이 되거든 고기를 먹여 그 힘을 돋우고 비로 소독한 약을 쓰는 법이오. 그래야만 병의 뿌리를 아주 뽑고, 사람을 온전하게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오. 만약 병자의 기운과 맥박이 제 대로 추스려지지도 않은 때에 서둘러 기름진 음식을 먹이고 독한 약 을 쓴다면 그 병자를 구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외다.
우리 주인 유예주께서는 지난날 여남(南)에서 패해 유표에게 의 지하게 되었으니, 군사는 천을 채우지 못하고 장수는 관우와 장비에 조운이 있을 뿐이었소. 비유해 말하자면 병이 깊고 오래되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소이다. 신야는 산골의 작은 현으로 백성의 수는 적고 먹을 것도 넉넉하지 못하니 잠시 빌려 몸 을 쉴 땅일지언정 어찌 눌러앉아 오래 지킬 수 있는 땅이겠소? 그래 도 유예주께서는 박망에서는 불을 지르고 백하에서는 물을 써서 하 후돈과 조인의 무리를 염통과 간이 터지도록 놀라게 했습니다.
병갑(甲)은 갖추지 못하고 성곽은 튼튼하지 못하며 군사는 조련 이 되지 못한 데다가 양식마저 댈 수 없는 처지에서 그 같은 승리를 거두었으니 관중과 악의가 살아와서 군사를 부렸다 한들 그보다 더 할 수는 없었을 것이외다. 거기다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실로 유예주께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오. 오히려 형주의 어지러움을 틈타 같은 종친의 기업을 빼앗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다 했으니 그야말로 대인이요, 대의가 아니겠소이까?
또 자포(布)께서는 당양에서 패한 일을 말씀하셨으나 마찬가지 로 그 일도 유예주의 대인, 대의함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 다. 의로움을 쫓는 수십만의 백성들이 어린것을 업고 늙은이를 부축 하여 뒤따르매 차마 그들을 버리지 못해 하루 십 리밖에 가지 못한 탓에 조조의 군사들이 따라잡을 수 있었던 까닭이외다. 백성들을 버 리고 급히 진군하여 강릉을 차지했으면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음에 도 기꺼이 백성들과 함께하다 패하는 쪽을 택하셨으니 실로 그보다 더 큰 어짊과 의로움이 어디 있겠소이까?
더군다나 설령 군사가 적보다 적지 않더라도 싸움에서 이기고 지 는 것은 매양 있는 일이다. 지난날 고황제(皇帝)께서는 여러 번 항우에게 지셨으나 해하성한 싸움에 이김으로써 천하를 얻지 않으 셨소이까? 또 한신은 좋은 계책으로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그때까지 오래 고황제를 섬기는 동안 다른 싸움에서는 그리 자주 이 긴 편이 못 되었소이다…….”
공명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문득 장소를 쳐다보며 되로 받은 빈정 거림을 말로 돌려주었다.
“무릇 국가의 대계나 사직의 안위를 의논함에는 으뜸으로 정해 흔들리지 않는 모책(謀策)이 서 있어야 할 것이오. 떠벌리고 부풀리 어 말하기 좋아하는 무리나 헛된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는 무리가 끼 어들어 이리저리 함부로 말하게 해서는 아니 되는 법이외다. 그런 무리는 앉아서 말로 하면 따를 사람이 없으나, 일이 닥쳐 맡겨보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오.”
장소는 그 같은 공명의 말에 은근히 노여움이 일었으나 얼른 대 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장소를 대신하듯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하나가 큰 소리로 맞섰다.
“지금 조조는 군사가 백만이요 장수가 천이라 하오.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노려보는 듯한 기세로 강하를 삼키려 하는데 공은 어떻다 보시오?”
공명이 보니 우번이었다. 장소가 긴 소리를 늘어놓다 낭패를 당하 는 걸 보고 짧은 말로 당장 공명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건드렸다. 공 명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조조는 개미 떼같이 수만 많고 쓸모없는 원소의 군사를 끌어모 은 데다 또 이번에는 까마귀 떼같이 시끄럽기만 하고 조련 안 된 형 주의 군사들을 더했으니 비록 그 수가 백만이라 한들 두려워할 까닭 이 무엇이겠소?”
그러자 우번은 기다렸다는 듯 차게 웃으며 비꼬았다.
“당양에서는 싸움에 지고 강하로 쫓겨와서는 계책까지 궁해 구구 하게 다른 사람에게 구해주기를 빌러 왔으면서도 오히려 두렵지 않 다고 하는구려! 선생이야말로 큰소리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공명도 지지 않고 맞섰다.
“겨우 수천의 의로운 군사로 우리 유예주께서 어떻게 조조의 거 칠고 모진 백만의 대군에 맞서실 수 있었겠소? 그래도 강하로 물러나 지키고 계신 것은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오. 하지만 여러분은 어 떠하오? 이곳 강동은 군사가 날래고 양식이 넉넉한 데다 험한 장강 까지 끼고 있지 않소? 그런데도 오히려 그 주인으로 하여금 역적 앞 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기를 권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천하의 비웃음 조차 돌아볼 줄 모른다 할 수 있소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유예주 야말로 참으로 조조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라 할 수 있소!”
그러자 기세 좋던 우번 또한 머쓱해서 물러났다. 항복이란 말 속 에 감추어진 치욕을 끄집어낸 반격이라 대꾸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우번을 대신해 또 한 사람이 나섰다. 보질(陽)이란 사람이었다.
“공명은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을 흉내 내어 우리 동오를 달래러 오셨소이까?”
“자산은 소진과 장의를 그저 말 잘하는 사람으로만 알 뿐 소진, 장의가 또한 호걸임을 모르시는구려. 소진은 여섯 나라 승상의 인 (印)을 차고 장의는 두 번이나 진나라의 승상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일으키고 바로잡은 사람들이외다. 힘센 자를 두려워하고 약한 자를 깔보며 칼을 두려워 피하는 이들과는 견줄 수가 없을 것이오. 여러 분은 조조가 거짓으로 지어 퍼뜨린 소문만 듣고도 겁이 나서 항복하 려 들면서 어찌 감히 소진과 장의를 비웃을 수 있겠소이까?”
자산은 보질의 자였다. 교묘한 말재주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강동에 서 그리 알려지지 않은 보질의 자까지 공명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 다. 모르긴 하되 공명은 아마도 그 자리에 나올 법한 사람들에 관해 미리 세밀하게 알아두었음이 분명했다.
남의 신하 되어 주인에게 항복하기를 권하는 입장의 떳떳하지 못한 구석을 날카롭게 헤집고 드는 공명의 반격에 보질이 대답을 못하자 이번에는 설종(薛宗)이란 사람이 엉뚱한 물음으로 가로막고 나왔다.
“공명께서는 조조를 어떤 인물로 보시오?”
“조조가 한을 노리는 역적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물으시오?”
공명이 한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그게 어찌 본심일까만, 설종이 슬그머니 그런 공명의 심사를 건드렸다.
“공의 말씀이 틀린 것 같소이다. 한은 여러 대를 전하여온 지금 천수가 다해가고 있소. 이에 비해 조조는 천하의 삼분지 이를 차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그에게로 돌고 있소. 그 런데도 유예주께서는 억지로 조조와 더불어 싸우려 하니 그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소.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까?”
그러자 공명이 소리 높여 설종을 꾸짖었다.
“설경문(薛敬)은 어찌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사람 같은 소리 를 하시오? 무릇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를 삶에 있어 충성과 효도로 써 몸을 일으키는 바탕을 삼아야 할 것이오. 공은 한의 신하 된 사람 으로, 불충한 무리를 보면 함께 힘을 합쳐 죽일 것을 다짐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소? 그런데도 지금 조조는 조상 대대로 한조의 녹을 먹었으면서도 그 은덕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오 히려 역적질할 꿈만 꾸고 있소. 천하가 다 그 일을 분해하고 있건만 공은 오히려 하늘의 운수가 조조에게로 돌아가고 있다니 실로 아비도 임금도 없는 사람이구려! 입 섞어 말하기 싫으니 두 번 다시 입을 떼지 마시오.”
이에 설종도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띤 채 물러났다. 한번 슬쩍 건드려본다는 것이 여럿 앞에서 망신만 사고 만 셈이었다. 그를 이 어 이번에는 윗자리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어렸을 적 원술을 보러 갔다가 귤을 대접하자 그것을 소매 속에 감추고 돌아와 모친에게 바 친일(회귤고사)로 이름난 육적(陸績)이었다.
“조조가 비록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기는 하나 상국 조 참(曹參)의 후예임에는 틀림이 없소. 하지만 유비는 중산정왕(中山靖 王)의 후예라고는 해도 거슬러 밝힐 길이 없고, 다만 지금 알 수 있 는 것은 돗자리나 짜고 짚신이나 팔던 사람이었다는 것뿐이오. 어찌 조조와 나란히 저울질할 수 있단 말이오?”
앞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출신을 들먹여 공명을 건드려본 것이었다. 말을 받는 공명의 태도는 설종 때와는 달랐다. 엄했던 안색을 풀 며 웃음으로 대답했다.
“공은 일찍이 원술 앞에 앉아서 귤을 품어 효로 이름을 얻었던 그 육랑이 아니오? 바라건대 이번에는 내 앞에 앉아 말 한마디만 들어주시오.
조조가 조상국의 후예라면 대대로 한의 신하였던 셈인데도 그는 지금 권세를 멋대로 부려 임금을 속이고 아비를 욕뵈고 있소. 이는 임금이 없는 자일 뿐만 아니라 조상을 얕보는 자이며 한실을 어지럽 히는 신하일 뿐만 아니라 조씨 문중의 못된 자식이 되기도 하는 것 이오. 그러나 우리 유예주께서는 당당히 제실의 핏줄을 이으신 분으로 당금()의 천자께서는 제실의 족보를 뒤져 항렬을 찾아내고 벼슬까지 내리셨소. 유예주의 핏줄을 거슬러 밝힐 수가 없다니 도무 지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또 우리 고조(高祖)께서는 비록 하잘것없는 정장(長)에서 몸을 일으키셨으나 마침내는 천하를 얻으셨소. 유예주께서 돗자리를 짜 고 짚신을 파셨다 한들 그게 꼭 욕될 게 무엇이겠소? 공은 아직 소 견이 어린아이와 같으니 학덕 높은 선비와는 더불어 얘기하기 어렵 겠소이다.”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말이었다. 육적 또한 말이 막히자 또 딴 사람이 나섰다.
“공명의 말씀은 한결같이 어거지로 이치를 벗어났소. 모두 올바른 논의가 못 되니 거듭 말할 것도 없겠소이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공명께서는 도대체 어떤 경전을 공부하셨소?”
공명이 보니 엄준이란 선비였다. 글줄깨나 읽은 모양으로, 학식을 내세워 공명의 기를 죽여볼 속셈인 것 같았다. 공명은 미리 준비하 고 기다리던 사람처럼 얼른 대답했다.
“책장이나 뒤적이고 남의 글귀나 따서 쓰는 것은 세상의 썩은 선 비나 하는 일이니 어찌 나라를 일으키고 큰일을 옳게 해낼 수 있겠 소? 옛날 신야에서 밭 갈던 이윤(伊尹, 은의 탕왕을 도와 걸을 친 재상) 이나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던 자아, 강태공)며 저 한초의 장량 (張), 진(陳)같은 이들에다, 등우(禹, 후한 광무제를 도와 적미를 친 공신), 경감(耿, 역시 광무제 때의 창업 공신) 등은 모두 온 세상을 바로잡은 재주를 가진 이들이었으나, 아직껏 그들이 평생에 무슨 경전을 공부했단 소리는 듣지 못했소. 내 어찌 못난 서생처럼 붓과 벼루 사이에서 검은 것을 세고 누른 것을 따지며 글을 가지고 놀고 먹으로 장난질하는 걸 본받겠소?”
공명이 경전 이름을 대면 얼른 받아 아는 체나 좀 해보려던 엄준 은 맥이 빠져버렸다. 구태여 경전을 끌어대 봤자 쓸데없는 일이란 걸 알고 머리를 수그린 채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또 한 사람이 큰 소 리로 떠들었다.
“공은 큰소리 치기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참된 학문은 가진 것 같지가 않소. 세상 선비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렵소이다.”
여남의 정덕(德樞)란 사람으로 역시 엄준과 같은 선비였다. 공명이 그 말을 가볍게 받았다.
“선비에도 군자와 소인이 있소이다. 군자다운 선비는 임금에게 충 성스럽고 나라를 사랑하며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미워합니다. 하는 일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을 끼치고, 이름은 길이 후 세에 남는 법이오. 그러나 소인인 선비는 오직 글줄이나 닦고 붓과 먹이나 매만지며, 젊어서는 부(賦)나 짓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는 경전이나 파고드는 부류외다. 글로는 비록 천 자를 써내려가도 가슴 에는 실로 한 가지 계책도 가진 바 없는 무리지요. 이를테면 양웅(楊 雄)같은 자들이니, 양웅은 문장으로 널리 세상에 이름을 얻었으나 왕망 같은 역적을 몸 굽히고 섬겨 마침내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스 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소이다. 이 같은 소인이라 를 수 있는 선비라면 설령 하루에만 마디의 부(賦)를 짓는다 한들 어디에다 쓰겠소?”
역시 실용과 임기응변에다 지조까지 내세워 눌러버리니 정덕추 같은 서생이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공명 의 말이 워낙 물흐르듯 하니 모두 낯빛이 변할 정도로 놀라고 감탄 했다. 다만 그때쯤에 기세를 회복한 장소와 또 한 사람 낙통(駱統)이 란 벼슬아치만이 또 다른 어려운 물음을 생각해내고 다시 공명을 몰 아붙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밖에서 한 사람이 뛰어들 어오며 소리 높여 좌중의 사람들을 꾸짖었다.
“공명은 당세의 기재)인데 그대들은 서로 입씨름이나 벌이고 있구려! 이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예가 아니외다. 방금 조조의 대 군이 국경에 이르고 있는데 적을 쫓아낼 의논은 않고 이 무슨 쓸데 없는 말싸움질이란 말이오?”
모든 사람이 놀라 쳐다보니 손견 이래의 오래된 장수로 그때는 동오 양관(糧官)으로 있던 황개였다. 어떤 일로 그 모임에 빠졌다가 뒤늦게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황개는 또 공명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여러 말로 이득을 얻으려 하는 것보다는 입 다물고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저희 주인을 위해 값지고 귀한 말씀을 드리지는 않으시고 여기서 뭇사람 과 쓸데없는 입씨름만 하고 계십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세상일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렵게 묻 는 바람에 대꾸하지 아니할 수 없었소이다.”
공명이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황개가 그런 공명을 재촉했다.
“어서 우리 주공을 뵙도록 하시지요.”
그리고 노숙과 더불어 공명을 손권에게로 데려갔다.
공명은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다가 중문에 이르렀을 때 제갈근을 만났다.
“너는 강동까지 와서 어찌 나를 보러 오지 않았느냐?”
공명이 예를 표하자 형으로서 자못 섭섭하다는 투로 제갈근이 물었다.
공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미 유예주를 섬겨 공사로 이곳에 왔으니, 마땅히 그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공 사를 다하지 못해 감히 형제간의 사사로운 정을 먼저 드러내기 어려 웠을 뿐입니다. 형님께서 너그럽게 헤아려주십시오.”
실로 몇 년 만에 만난 아우로서는 매정하다 할 만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제갈근이 또한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미욱하지 않았다. 곧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오후(吳侯)를 뵈온 뒤에는 나를 찾아보도록 해라. 오랜만에 이야 기나 좀 나누도록 하자.”
그러고는 공명을 더 지체시키지 않으려는 듯 휘적휘적 가버렸다. 제갈근이 가버린 뒤 노숙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어제 제가 당부한 말 부디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시 말해 손권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조조의 세력이 큼을 바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런 노숙을 안심시켰다.
당상에 이르니 손권이 몸소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공명을 맞아들 였다. 공명이 예를 마치고 손권은 자리를 내어 공명을 앉게 했다. 뒤 따라 문무의 여러 관원들이 좌우로 갈라서고 노숙은 특히 공명 곁에 붙어서서 그 하는 양을 살폈다.
공명은 유비의 뜻을 전하는 한편 세밀한 눈길로 손권을 살폈다. 눈은 푸르고 수염은 자줏빛에 당당한 풍채였다.
공명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이 사람은 생김새가 범상하지 않으니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 우리 쪽에 유리하게 일을 끌어갈 수 있을지언정 달래기는 어렵겠구나. 알 맞은 틈을 보아 말로 이 사람을 격동시켜야겠다.’
그러고 있는데 차가 나왔다. 손권은 찻잔을 놓기 바쁘게 공명에게
물었다.
“노자경을 통해 그대의 재주는 익히 들어왔소. 이제 다행히 만나 게 되었으니 유익한 가르침을 듣고 싶소이다. 이 권(權)이 어리석다 물리치지 마시오.”
그 말에 공명이 짐짓 겸양을 떨었다.
“재주 없는 것이 배운 것까지 적어 밝으신 물음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요사이 신야에 있으면서 유예주를 도와 조조와 싸웠다 하니 반드시 조조군의 허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그것만 들려주 어도 내게는 큰 가르침이 될 것이오.”
손권은 제갈량의 겸양을 듣자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것을 밝혔다.
그러나 제갈량은 더욱 마음에 없는 대답을 했다.
“유예주께서는 군사가 적고 장수가 모자란 데다 신야는 또 성이 작고 양식까지 넉넉하지 못한 땅입니다. 어떻게 조조와 맞설 수 있 겠습니까? 우리가 조조와 싸웠다는 것은 모두 부풀려진 소문일 뿐 입니다.”
“조조의 세력이 그렇게 크단 말씀이오? 도대체 그 군사가 얼마나되오?”
손권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강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면 마땅히 조조의 세력을 낮춰 말해야 할 것인데도 공명 이 그렇게 하지 아니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공명은 여전히 엉뚱한 소리만 했다.
“마군, 보군, 수군을 합쳐 백만이 넘었습니다.”
“혹시 그것은 조조가 거짓말로 퍼뜨린 소문 아니오?”
손권이 더욱 괴이쩍다는 듯 물었다. 공명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조조는 이미 연주(州)를 얻었을 때부터 청주군(軍)이십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소를 토벌하여 오 륙십만을 얻고 또 중원에서 새로 삼사십만을 뽑았지요. 어디 그뿐 입니까? 이번에 형주에서 다시 이삼십만의 군사를 얻었으니 이 모 두를 합쳐보면 아무리 적어도 백오십만은 됩니다. 제가 백만이라고 말한 것은 강동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봐 오히려 줄여서 말한 것입 니다.”
조조의 세력을 줄여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몇 갑절이나 늘려 떠벌리는 셈이었다. 세 번씩이나 그 반대로 말하기를 당부했던 노숙으로서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공명의 짓거리였다. 놀란 노숙은 공명에게 급한 눈짓을 보냈으나 공명은 그마저 못 본 체했다.
“조조 밑에 있는 자들 중에 싸울 만한 장수는 얼마나 되오?”
손권이 급한 물음을 계속했다. 공명은 여전히 부풀리기를 그만두 지 않았다.
“지혜롭고 꾀 많은 모사와 어떤 싸움이든지 능히 치를 만한 장수 만도 일이천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형초(楚) 땅을 평정한 조조는 달리 어떤 큰 뜻 을 품고 있는 것 같았소?”
“지금 조조는 강을 따라 진채를 세우고 싸움배를 마련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강동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여 얻을 땅이 달리 어디 있 겠습니까?”
공명 자신을 빼놓고는 아무도 속뜻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손 권이 혼란된 얼굴로 말없이 있다가 이윽고 다시 물었다.
“만약 조조에게 우리를 삼키려는 뜻이 있다면 우리는 싸워야겠 소? 싸우지 않아야겠소? 바라건대 그대가 한번 결정을 지어보시오.”
손권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 공명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것 같았다. 거기서 공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양이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장군께서 듣고 따라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바라건대 높으신 뜻을 들려주시오.”
손권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제서야 공명은 전에 없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때에 장군께서는 강동에서 몸을 일으키시고 우리 유예주께서는 한남(南)의 무리를 모아 조조와 더 불어 천하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조는 여러 가지 큰 어려움을 없이 하고 대강 천하를 평정한 데다 가까이는 또 형주를 새로이 얻어 그 위엄이 온 세상을 크게 떨쳐 울리고 있습니다. 비록 영웅일지라도 거기에 의지해 군사를 기르고 싸워볼 땅이 거의 없어 진 셈이지요. 우리 유예주께서도 그런 까닭에 조조에게 쫓겨 오늘 이 마당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장군께서 지닌 힘을 헤아리시어 조조에게 대처하도록 하십시오. 오월(吳越) 땅의 백성들을 이끌고 중원(中原) 의 힘에 맞서 버티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일찍 조조와 오고 감을 끊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맞서 버틸 수 없다면 여러 모사들의 의논 대로 따르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군사를 세워두고 갑옷 을 묶어 바친 뒤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면 될 것입니다.”
도무지 싸우라는 것인지 항복하라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소리 였다. 손권이 그 말의 참뜻을 헤아리느라 잠시 대답이 없자 공명이 다시 재촉하듯 덧붙였다.
“장군께서 겉으로는 조조에게 복종하시는 것 같으면서 속으로는 두 가지를 모두 의심하고 주저하시느라 시간을 끌어서는 아니 됩니 다. 일이 급한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다가 화(禍)가 이르게 되면 그때는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손권이 거기에 대한 대답 대신 불쑥 물었다.
“그대의 말이 정성된 것이라면 어찌하여 유예주께서는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으셨소?”
바로 공명이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공명은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옛적에 전횡(橫, 전국시대의 협객)은 한낱 제(齊)의 장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의(義)를 지켜 욕되지 않게 죽었습니다. 하물며 제 실(室)의 후예요 세상의 뭇 선비들이 우러르는 영웅이신 우리 유 예주께서 어찌 조조 따위에게 항복하는 욕됨을 입을 수 있겠습니 까? 뜻대로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 설령 끝내 싸움에 져 서 죽게 되더라도 스스로 몸을 굽혀 다른 사람 밑에 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 주인인 유비는 애초부터 손권과는 격이 다른 인물로 추켜세움으로써 손권을 겁 많은 졸장부로 만들어버린 셈이 었다.
‘너 정도의 인간은 항복한들 어떤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항복하든지 말든지 하라.’
대강 그런 뜻이었다.
손권이 어찌 그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문득 노기로 낯빛이 변한 채 소매를 떨치며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공명을 소리 높여 꾸짖지 않은 것만도 손권의 인품의 크기를 보인 것일 뿐이었다.
손권이 성나 자리를 떴으니 제갈량이 힘들여 강동까지 온 일은 일견 모두가 허사로 된 것처럼 보였다. 항복을 권하던 무리들은 그 게 바로 자기들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공명을 비웃으며 흩어졌다. 공명의 지나친 말이 일을 그르쳤다고 보는 것은 노숙도 마찬가지였다. 둘만 남게 되자 공명을 나무랐다.
“선생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소? 우리 주공께서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셨기 망정이지 아니면 아까 그 자리에서 크게 꾸짖음을 받았을 것이오. 도대체가 선생의 말씀은 우리 주공을 너무 깔보는 것이었소!”
그러나 공명은 오히려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그리도 남의 헤아림을 받아들이실 줄 모른단 말이오? 조조를 쳐부술 계책이 내게 있으나 그분은 내게 그것은 묻지 않으시 고 항복할 것인가 아닌가만을 물으셨소. 그분이 묻지 않으시는데 내 가 어찌 대답할 수 있겠소? 그 바람에 이야기가 잘못 흘러 그리된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노숙도 어렴풋이 짚이는 게 있었다. 얼른 낯빛을 바 꾸고 매달리듯 공명에게 물었다.
“정말로 선생께 좋은 계책이 있다면 저는 마땅히 다시 말씀드려 주공으로 하여금 선생께 가르침을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의 말 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조조의 백만 대군을 개미 떼만큼도 여기지 않소이다. 내가 한번 손을 댄다면 그것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오!”
공명이 자신에 넘치는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결코 무턱대고 하 는 큰소리 같지가 않았다. 이에 노숙은 공명을 남겨두고 손권을 보 러 후당으로 들어갔다.
아직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채로 앉아 있던 손권은 노숙을 보자 불쾌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공명 그 사람이 나를 너무 심하게 속였소(얕보았소)!”
공명에 대한 꾸짖음을 노숙에게 대신하는 것 같았다. 노숙이 얼른 대답했다.
“저 역시 그 일로 공명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공명은 오히려 주 공께서 남의 헤아림을 받아들여줄 줄 모른다며 웃었습니다. 공명이 비록 조조를 깨뜨릴 계책을 지녔다 한들 어찌 그것을 가볍게 말하겠 습니까? 그런데도 주공께서는 그 계책을 묻지 않으시니 이야기가 빗나가 그리된 것입니다.”
손권도 겉보기와는 달리 그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성난 기색을 거두고 기쁜 빛까지 띠며 노숙의 말을 받았다.
“원래 공명은 좋은 계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나를 격동 시켰구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한때의 얕은 안목으로 그를 대했으니 하마터면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소이다.”
그러고는 곧 노숙을 내보내 공명을 다시 불러들이게 했다. 뒷날 수성)의 명주(明主)로 알려지기에 족한 인물됨이었다.
노숙이 뛰듯이 돌아와 손권의 뜻을 전하자 공명도 못 이긴 체따 라 들어왔다. 손권은 그런 공명을 반가이 맞으며 말했다.
“아까는 선생의 맑고 엄숙한 뜻을 알아듣지 못해 맘에 없는 욕만보인 꼴이 되었소. 부디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그 부드러운 사과에 공명 또한 솔직하게 죄를 빌었다.
“양의 말이 높으신 위엄을 모독했습니다. 그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손권은 공명을 후당 안으로 청해 들인 뒤 술자리를 열고 마주 앉았다. 주인과 손이 권커니 잣거니 몇 순배 잔이 돈 뒤에 손권 이 슬그머니 마음속의 얘기를 꺼냈다.
“조조가 평생토록 미워했던 자들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여포와 유 표, 원소, 원술 그리고 유예주와 이 몸이었소이다. 그런데 이제 앞서 의 네 영웅은 차례로 망하고 남은 것은 오직 유예주와 나뿐이오. 그 것도 나는 오 땅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해 남의 억누름을 당할 지경 에 놓였소이다. 물론 내 뜻은 이미 정해져 있소. 나는 유예주와 함께 힘을 합쳐 맞서지 않으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겨 그쪽으로 방도를 찾아보았소. 그러나 유예주가 이제 막 조조에게 패한지라 어떻게 이 어려움을 맞설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기 짝이 없소 이다.”
“유예주가 비록 조조에게 새로 패했다 하나 아직도 관운장은 일 만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유기(劉琦)도 강하에서 싸울 만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역시 일만에 모자라지는 않을 것입니 다. 한편 조조의 군사들은 멀리서 와 지쳐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에 는 우리 유예주를 쫓는다고 가벼운 차림으로 하룻밤에 삼백 리를 달 렸습니다. 그런 군사들이 무슨 수로 싸움다운 싸움을 해낼 수 있겠 습니까? 이는 이른바 강한 활에서 쏜 화살일지라도 끝에 가서는 부 드러운 비단조차 뚫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가 조조의 군 사들은 북쪽 사람들이라 수전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물에 익숙하기 로는 새로이 조조 밑에 들어간 형주의 백성들이 있지만 그들은 또한 조조의 위세에 눌려 따르고 있을 뿐 본심이 아니니 제대로 싸워줄리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장군께서는 진심으로 유예주와 한마음으로 힘을 합친다면 틀림없이 조조군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달리 그렇게 형세를 낙관하던 공명은 거기서 그 치지 않고 조조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까지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싸움에서 지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형주와 동오의 세력은 오히려 전보다 커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하를 조조와 우리 유예주 그리고 장군 셋이서 나누어 가지는 게 되니 바 로 솥발[鼎足] 셋이 한솥을 떠받드는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장군께 서는 어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일이 그렇게 되고 안 되고의 기틀은 오늘 장군께서 내릴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손권은 어둡던 마음속이 일시에 확 개는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오갈 데 없어 자신에게 빌붙으러 온 것으로 볼 수도 있 는 유비까지 자신과 나란히 천하의 주인 노릇 하려는 게 아니꼬울 수도 있었으나, 당장은 조조의 발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리라 는 희망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그저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욕심으로 흐려져 막힌 내 가슴속을 문득 밝게 열 어주었소이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달리 의심하지 마시오. 여 럿과 의논하여 오늘로 군사를 일으키고 함께 조조를 쳐 없애도록 하 겠소.”
그러고는 노숙에게 명해 즉시로 그 같은 자신의 뜻을 문무의 관 원에게 알리게 했다. 공명은 그런 손권의 배웅을 받으며 역관으로 돌아가 쉬었다.
한편 장소는 손권이 군사를 일으키려 함을 알자 여럿을 불러모으고 의논조로 걱정했다.
“공명의 계책에 우리 주군께서 걸리시고 말았구려! 이대로 있을수가 없소.”
그런 다음 급히 안으로 들어가 손권을 보고 말했다.
“이 소(昭)가 들으니 주공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조조와 싸우려 하 신다는데 주공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저 원소에 비해 어떻다 여 기십니까? 지난날 조조는 강성한 원소도 많지 않은 장졸들로 북소 리 한번에 깨뜨려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그 조조가 백만 대군 을 몰아 남으로 밀고 내려오는데 어찌 가볍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제갈량의 말을 들어 함부로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이른바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 나고 말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화친을 주장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한 번 더 펴보는 설득이었 다. 이미 뜻을 굳힌 바 있으나 장소의 말 또한 함부로 물리칠 게 못 돼 손권은 머리를 수그린 채 생각에 잠겨 얼른 답하지 않았다. 고옹 이 곁에서 거들었다.
“유비는 조조와의 싸움에 져서 고단해지자 강동의 군사를 빌려 맞서 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유비에 게 이용당하려 하십니까? 바라건대 자포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십 시오.”
고옹까지 그렇게 나오자 손권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이미 정 한 뜻이 흔들렸다기보다는 대들보나 기둥 같은 문신들이 한결같이 항복을 권하고 있다는 데 대한 실망과 근심 탓이리라. 장소와 고옹을 침묵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앉았는데 이번에는 노숙이 들어와 말했다.
“장자포 같은 사람들이 와서 다시 주공께 군사를 내지 말고 조조 에게 항복하기를 힘써 권한 모양이나 주공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 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모두 몸이나 돌보고 처자나 지키려 드 는 무리라 스스로를 위해 꾸민 계책일 뿐입니다.”
그래도 손권은 대꾸가 없었다. 장소와 고옹의 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닌가 두려워진 노숙이 한층 엄숙하게 손권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만약 마음을 정하지 못해 시간을 끌다가는 항복을 주 장하는 무리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경은 잠시 물러가 있으시오. 나는 세 번 고쳐 이 일을 생각해본 뒤에 결단을 내리겠소.”
이윽고 손권은 그렇게 대답하고 노숙을 내보냈다. 아무래도 마음 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강동의 아홉 고을과 수백만 백성들의 안위는 물론 자신의 흥망이 달린 일이라 그런 것 같았다.
노숙은 적이 마음이 불안했지만 더는 손권에게 졸라대지 못하고 물러났다. 공명은 지혜와 변설을 다한 깨우침으로 강동을 일깨웠으 나 아직도 그 주인 손권은 선뜻 떨치고 나서 조조와 한바탕 큰 싸움 을 벌일 만큼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